내 주인공이 나를 형성시켰으니까 내 주인공만이 내 무명을 벗기고, 아프지 않고 그렇게 그냥 무명을 벗고 가게 할 수 있습니다. (지난 호에 이어서) 질문자2(남) 스님, 질문 한 가지 하고 싶은데요, 모든 것을 일체 자기 마음에다 다 돌려놓고 생활을 하면서요, 모두 주인공한테 맡기면서, 예를 들어서 어떤 병이라든가 인간이 만든 어떤 법이 있을 경우에는 그 법도 따라야 되는지, 아니면 자기 주인공에다 일체 맡겨 놓고서 거기에만 따라가야 되는지 그걸 좀 알고 싶은데요. 예를 들어서 인간이 만든 법이라는 건 몸이 아프면 약을 먹으면서 그걸 치료를 같이, 주인공에다 같이 해야 되는지, 아니면 그냥 주인공을 믿고 모든 거를 거기다 맡겨 놓고 여여하게 걸어가야 되는지요. 큰스님 그거는 이런 게 있죠. 모든
우리가 이 진리를 탐구하는 데는 얕다 높다, 동이다 서다, 여자다 남자다, 잘못한다 잘한다, 모른다 안다 이런 거를 몽땅 놓는 것이 바로 선맥을 이어 나가는 그런 과정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오늘은 여러분과 어저께처럼 서로 질문 토론 하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한마디 할 것은, 먼저 앵커리지에 들어오게 된 동기와 뉴욕에 이렇게 선원이 서게 된 이유입니다. 첫째는 세계 평화와 둘째는 우리가 세계 평화를 이루려면 바로 마음의 핵심이 불어넣어져야 모두 각자 여러분의 마음의 주장이 뚜렷하기 때문에 어디 세워 놔도 빛이 있다고 보며, 또 내 나라에 빛을 가져오는 그런 여건이 되며 또한 한마음으로 뭉치는 그런 단결을 한다면 그것이 예전의 비참한 역사를 다시 가져오지 않도록 하기 위한 마음의 준비인 것입니다
마음 내기 이전은 마음의 내 선장이고, 마음 내는 것은 바로 중생의 마음이죠. 그러니까 그 마음으로 다스려서 몰락 놓아야 합니다. 현재가 과거에 의해서 결정되는지? 질문 제게 현재에 어떤 사건이 생긴다면 그것이 현생의 어떤 인과에 의해서 생기는 것인지, 아니면 그것이 전생으로까지 넘어가서 전생의 업보에 의해 이루어진 것인지요. 그러니까 현재가 과거에 의해서 완전히 결정되는지 그것도 알고 싶고요, 전생이라는 것이 정말 존재하는지 거기에 대해서 좀 알고 싶어요. 답변 이렇게 밝고 밝은 세상에 그것을 이해를 못하시면 안 됩니다. 의학적으로나 과학적으로 나와 있는 사실은 아마 이해하시리라고 믿습니다. 유전공학이니 뭐니 하고 있는 것 말입니다. 우리가 하루 동안 지내면서도 그것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고정
인간은 나쁜 것도 알고 좋은 것도 아니까 그걸 가려서 생각하고 거기에다 그냥 놓고 돌아가는 것이 그대로 법이죠. 내 마음 내키는 대로 그냥 판단을 해서 놨을 때 그대로 법이에요. (지난 호에 이어서) 지금 부족한 거는요, 이 마음의 정신세계를 판단치 못하는 거죠. 그것 때문에 우리가 애를 쓰는 겁니다. 우리가 이 공부를 해서 지금 일체 만물만생이 한마음으로 돌아가는 이치를 포착했다면, 과학자들한테 가고 옴이 없이 전달을 하게끔 돼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지구 안에만 사는 게 아니라 이 집을 딴 데다 지어서 살 수 있는 계기가 생길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지구 안에 부족한 재료를 딴 데서 끌어들이기도 할 수 있는 그런 여건도 되죠. 수명이 짧은 것을 길게 할 수도 있고. 인간의
그냥 소 타고 피리 불고 여여하게 돌아가는 것이 진리고 道입니다. 그런데 그 道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어디 가서 찾으려고 그렇게 헤매는지 모르겠습니다. 일체 만물이 다 끼리끼리 모이듯, 우리가 이렇게 마음공부 하는 분끼리 한자리를 하게 됐습니다. 그런데 지난번에도 얘기했지만, 한 번 더 짚고 넘어가지 않으면 안 될 만큼 아주 중요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우리는 수억겁을 거쳐서 진화되면서 인간까지 올라왔습니다. 그래서 이 인간의 육체 속에 모든 생명과 의식, 모습들이 아주 다양하게 있습니다. 우리 자체가 미생물에서부터 수없는 과정을 거쳐 왔다는 것을 인정을 못 하겠거든 바로 우리 육신 속에 있는 그 모습들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리고 우리가 잉태됐을 때에 열 달 동안 그 모습들을 가지고 형태를 바꾸어
이 촛불 하나가 얼마만큼 귀중한지 여려분은 아셔야 됩니다. 근본의 내가 탄생한 자리요, 나를 형성시킨 자리요, 또 우리 부모들을 형성시키는 그 에너지가 배출되는 장소입니다. 왜 삼독마저 둘로 보지 말라는지? 질문 탐진치 삼독을 끊고 소멸시켜야 내가 청정해지고 부처가 된다고 알고 있는데, 왜 스님께서는 탐진치 삼독마저도 둘로 보지 말라고 하시는지 그것을 여쭙고 싶습니다. 답변 옛날에 어떤 어른이 “쓰레기통이 돼 봐야 쓰레기의 이치를 아느니라. 금은보화 담은 창고가 되지 말고 쓰레기통이 돼라.” 하셨는데, 예전 일입니다만 왜 그런 소릴 했는가 하고 곰곰이 생각을 해 보니까 쓰레기통에는 별의별 게 다 담깁니다. 그리고 쓰레기통이라는 건 고귀한 데 있는 게 아니라 바깥에 아주 그냥 팽개쳐져 있죠. 그 쓰레
생활하는 자체가 앞으로도 그렇게 할 것이고 과거에도 그렇게 했고 지금도 그렇게 하고 나가는구나. 머리카락 하나도 내 게 아니로구나. (지난 호에 이어서) 그리고 또, 이사 가는 얘깁니다. 어느 집이나 이사를 가는 데는 반드시 우리들이 지금 공부하고 나가는 그 도리를 응용해야 할 텐데도 불구하고 그냥 그 관습 때문에 ‘어이구, 이사를 가도 괜찮을까?’ 요 생각부터 드는 겁니다. 자기가 공부하는 그러한 생각은 둘째고 ‘어이구, 이사를 가야 할 텐데 뭐 아무것도 안 해도 괜찮을까?’ 모르는 사람들은 이런 생각부터 앞서게 되죠. 완벽한 사람들은 또 괜찮고요. 여기 다니면서도 몰래 어디 가서 뭘 보기도 하고 그럽니다. 사실입니다. 그 뭐 토정비결을 안 보나, 어디 가서 점을 안 치나, 관상을 안 보나 허, 이
내면 그 한 구멍에서 일체가 들고 일체가 난다. 그 한 구멍에서만이 바다를 삼키고 바다를 토한다. 그 구멍이 아니라면 딴 구멍은 없다. 사람마다 다 마음이 간사해서, 간사하다기보다는 사람 사는 게 그런 게 아닐까 생각이 됩니다. 새해를 맞이하면 ‘새해를 맞이했다’는 생각이 들어서 좀 마음이 출렁거리고 새로운 무엇을 찾아보려 하는 그런 마음이 아마 정상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우리가 마음의 도리를 잘 알 수 있다면 경거망동을 하지 않고 그 모든 문제에 대해서 침착하게, 질서와 도리를 지키면서 기꺼이 삶의 보람을 크게 느낄 수 있는 그런 길을 아마 택할 겁니다. 우리가 어떠한 회사든, 또 어떤 사찰이든, 어떤 가정이든 사회든 모든 문제들을 가지고 살아나가는 데 대해서 예전에 부처님께서도 그랬습니다. “한
이 세상에 잠시 왔다 가는 거예요. 그러니 살기 위한 욕심으로, 가난 때문에, 병고 때문에, 잘 살아야지, 위대하게 돼야지, 이런 것 때문에 이 공부 하지 마세요. 진짜! 자유스럽게 살아가려면 질문 큰스님의 법문을 들을 때는 금방 제가 부처가 될 것만 같고 하늘을 날 것 같고 그런데 실생활 속에서 저의 모습을 지켜보면 너무도 부족하기 그지없습니다. 새로운 한 해를 맞이해서 어떻게 공부해 나가야 큰스님처럼, 부처님처럼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을는지요? 답변 이거 보세요. 부처가 되려고 하지도 마세요. 이 세상에 부처가 되려고 하는 마음이 있다면 답답한 마음이 또 생길 테니까요. 그러니까 그대로, 못났든 잘났든 그대로 그냥 수순히 걸어가세요. 그냥 딱 세우곤 입 딱 다물고 그냥 걸어가다가 딱 닥칠 때 ‘
꼭 그렇게 맡겨 놓고 그것을 지켜보는 사람이 돼서 체험을 해라. 하나하나 체험을 하다 보면 완성된 참다운 인간이 돼서 훌륭한 자유인이 될 수 있다. (지난 호에 이어서) 질문자2(남) 예. 스님께서 말씀하시는 영원한 친구, 자기 자신의 주인공 있죠? 그런 자기 자신의 주인공인 한마음이 항시 좋은 것만 하려고 하는 게 아니라 나쁜 걸 하려고 그러고, 열심히 살려고 그러는 게 아니라 놀면서 그냥 많은 것을 바라기만 하고 그런다면 그런 주인공도 그렇게 맡겨 놓고 따라야 되겠습니까? 큰스님 이거 봐요. 그렇다면 주인공이 말이요, 그 사람을 올바로 이끌어 가기 위해서 더 타격을 주는 거죠. 타격을 줘서 자기 자신을 생각하게 만들어서 다시 그 후에 끌고 가요. 참 묘한 겁니다. 그러니까 잘되는 것만 법이 아니
내가 이 세상에 나지 않았으면 뭐 때문에 부딪쳐요? 그러니 모든 걸 내 탓으로 돌려라, 그러면 복이 오고 공덕을 받을 수 있느니라. … 그럼으로써 또 그것을 자꾸 그렇게 굴리다 보면 스스로 지금 내가 여러분한테 말씀드리는 이 뜻을, 모든 일체를 다 알게끔 돼 있습니다. 내 영혼 자체의 그 근본이 바로 내 주처의 주인공이라면, 내 옛 친구가 아니라 옛날부터 지금까지 끌고 다니는 ‘나’ 친구가 있습니다. 주인공 친구가 있어요. 그래서 이 속으로, 뜻으로 여러분을 이끌고 다니면서 뜻으로 여러분의 머리에, 마음에 항상 이렇게 뒷받침을 하고 있기 때문에 그 뜻을 들으면 아주 그냥 절실하게 여기에 감응이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그것을 진실히 믿고…, 저기 지금 오하이오 주 주립대학에서 박사 과정에 있으면서 이 공
부처님이 아무리 좋은 말씀을 해 놓으셨어도 지금 시대의 여러분이 알아듣지 못하고 감지를 못한다면 좋은 말인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용무가 자재해지려면 질문 『도덕경』에 보면 “무위이무불이(無爲而無不爲)”라는 내용이 나옵니다. 그 뜻은 ‘무위를 실천해 봐라. 그러면 안 되는 일이 없을 것이다.’라는 말이라고 하는데, 그 말씀이 큰스님 법문 중의 “내 내면에 진실하게 맡기면 안 되는 게 없다.” 하신 말씀과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한 가지 의문이 듭니다. 제가 알기로는 불교뿐만 아니라 수없이 많은 성인들과 선지식들께서도 자신의 내면을 깨달아서 진리를 실천해 나가셨는데, 왜 실천해 나가는 모습에 차이가 나는 것인지요? 그리고 그런 성인들처럼 용무가 자재해지려면 어떻게 수행해 나가야 하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