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설이다. 차창 밖으로 눈보라가 휘몰아친다. 세상 어디를 둘러봐도 하얀 풍경만이 펼쳐진다. 월정사를 품은 오대산이 그려내는 설경은 보는 이의 마음까지도 깊이 침잠하게 한다. 신라 자장 스님이 문수보살 성지를 찾아 7년이란 긴 세월을 주유한 끝에 낙점한 오대산. 오대산은 문수보살이 있어 1만 보살을 거느리고 항상 설법하는 성산(聖山)이다. 속진의 세계에서 성(聖)의 세계로 성큼 걸어 들어갔다. 천왕문을 들어서자 적광전과 동별당 서별당을 비롯한 전각들이 설법을 들려주는 듯하다. 한암 스님과 탄허 스님이 주석하며 1600년의 역사를 가진
달아 달아 밝은 달아정월에 뜨는 달은 새로운 희망을 주는 달이라다같이 달 바라보며 밝고 맑은 마음으로 소원을 빌어보세
얼마 전 설이었다. 합동차례를 지내는 가족이 많아져 아이부터 어른까지 절은 여느 때보다 북적였다. 1년에 두 차례, 여러 가족의 모습을 볼 수 있는 특별한 날을 맞아 입춘 때 준비해둔 입춘부와 소원성취부를 나눠주며 안부를 물을 때였다.“스님! 잠시만 대화할 수 있을까요?”점심시간이 지나고 여러 사람과 인사를 나누는 와중에 한 보살님이 다가와 물었다. 마스크로 얼굴을 가렸지만 눈에는 슬픔이 가득했다. 안색은 어둡고 무언가로 힘들어하는 모습이었다. 이미 정해진 일정들이 있어 갑자기 짬을 내기 부담스러웠지만 상담을 뒤로 미루기엔 보살님의
지원(가명) 씨는 14년간 이어 온 남편의 병간호로 지쳐있었다. 평소 사람을 좋아해 친구를 사귀고 여행을 즐기던 지원 씨였지만 오랜 병간호로 더 이상 만날 친구도 없었고, 자신만을 찾는 남편의 고함소리에 외출은 쉽지 않았다. 요양병원에 보내라는 자식들의 권유를 들을 때면 화가 치밀고 남편과 함께 죽고 싶다는 생각 때문에 상담실을 찾았다. 남편은 모야모야병을 앓고 있었고 뇌출혈로 쓰러졌다. 다행히 일찍 발견했지만 재발했고 병간호는 오랫동안 이어졌다. “낫는다는 희망마저도 이젠 사라졌다”며 눈물을 흘리던 지원 씨는 “그래도 그를 놓을
정상에 홀로 세운 돌탑 셋산행이 익숙하지 않은 사람이 처음 치악산을 오르면, 대부분은 ‘진짜 이름 그대로 치가 떨리고 악이 바친다는 말이 맞구나’ 생각하게 된다. 치악산의 주능선은 북쪽 비로봉(1282m)에서 남쪽의 남대봉(1182m)까지 10㎞ 정도며, 설악산, 월악산과 함께 3대 악산으로 꼽힌다. 특히 치악산은 당일 산행만 허용할 만큼 험하다.어느 해 겨울 치악산 능선을 종주하고 비로봉에서 하산할 때였다. 비로봉 바로 아래 산장 직원은 우리의 늦은 하산길이 걱정되어 그곳에서 묵기를 청하였다. 비로봉 아래에서 하룻밤이라, 조심스럽
(지난 호에 이어서)질문자3(남) 저는 스님 법문에서 주인공에게 맡기라는 말씀을 들었는데요, 그러면 그 주인공은 제 몸속에 있는 것인지, 또 우주의 허공 법계에 꽉 찬 것인지, 기독교에서 말하는 그 하나님과 주인공은 어떻게 다른지, 이런 것들이 궁금합니다. 그러면은 염불이나 기도는 꼭 할 필요성이 있는 것인가? 주인공에게 맡길 경우가 된다면 그렇게도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좀 여쭤 보는 것입니다.큰스님 뭐, 문은 여기도 많죠. 염불을 해서 가는 문이 있고, 경을 읽어서 가는 문이 있고, 선을 해서 가는 문이 있고 여러 가지의 문
사람은 태곳적부터 땅과 접촉하면서 살아왔다. 그러면서 늘 지구와 전기적으로도 연결돼 있었다. 모든 전기제품은 접지선이 있다. 접지는 전기회로나 전기기기를 땅에 연결하여 이상전압이 발생했을 때 고장 전류를 대지로 흘려보내서 기계와 땅이 같은 전기적 상태인 ‘0’볼트를 유지하게 하는 것이다. 사람이나 모든 생물도 마찬가지로 늘 땅과 접촉해 있으면서 ‘0’볼트의 전기적 상태를 유지해왔다.그런데 수십 년 전부터 사람들이 고무로 된 신발을 신기 시작했다. 고무는 가장 대표적인 절연체이다. 게다가 땅에는 아스팔트가 깔리면서 환경 전체가 절연체
긴장과 불안에 노출된 사람의 심리 상태를 안정시켜줌으로써 숨 돌릴 여백을 만들어주는 물질 중에 차만한 것을 찾기는 어렵다. 이는 옛사람들도 동일하게 경험하고 공감했던 차의 오묘한 효험(效驗)이다. 21세기를 살고 있는 필자 또한 응송 스님(1893~1990)과의 인연으로 ‘초의차(草衣茶)’를 연구하는 과정에서 차의 공덕을 깊이 공감하는 기회를 얻었다. 이런 차의 공덕을 노래한 조선 전기 이목(李穆)은 차의 이로움을 오공(五功)과 육덕(六德)으로 분류한 바가 있다. 실로 사람들이 차를 통해 얻었던 공효(功效)는 어느 시대이건 간에 유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은 참된 가치를 구현하기 어려운 시대이다. 진짜와 모조품을 구분하기 어려운 것이 아니라 모방된 가상의 물건들이 진본을 능가하는 시대가 되었다. 만고에 푸른 연못에 비친 달, 두세 번 건져봐야 거짓인 줄 알게 되리.(萬古碧潭空界月 再三撈벀始應知) -대혜 종고(1089~1163)연못 위에 비친 달그림자가 아무리 아름다워도 진짜 달이 아니라는 대혜 종고 선사의 게송은 모조품을 추구할 것이 아니라 참된 것을 찾아야 한다는 것을 일깨워 준다. 많은 것이 복사되고 복제되는 우리 시대에 곰곰이 새겨볼 내용이다. 우리 시대의
그리고 봄이 온다 ‘잘 주무셨습니까. 비가 내린 산사의 정취를 느끼며 무소유길로 살포시 걸어오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천천히 올라오세요.’ 아주 오랜만에 받아보는 정성스러운 글 인사였다. 쉬이 쓰고 지워지는 가벼움도, 끝내 무미건조한 회색 벽돌을 주고받는 기분이 되고 마는 그런 대화도 아니다. 정중함 속에 다정한 마음이 스며들어 새처럼 지저귀는 순간. 비 내린 2월의 어느 아침, 승소를 찾는 새로운 여정이 시작되는 찰나였다.불일암 국수를 찾아서삼보종찰 순천 송광사. 서늘할 정도로 맑은 기운이 전해지는 이 천년고찰 곁에는 산속 암자를
〈본 투 런〉이라는 책이 있다. 이 책의 내용은 세계 최고의 울트라마라토너(정규 마라톤 코스인 42.195㎞를 뛰는 경주자이지만, 여기에 나오는 경주는 보통 100㎞, 150㎞다)와 멕시코의 숨겨진 원시부족 타라우마라족이 벌이는 경주에 관한 이야기이다.그런데 미국의 울트라마라토너들의 가장 큰 고민은 가장 비싸고 최고로 과학화된 신발을 신음에도 불구하고 발에 부상이 잦다는 점이다. 이에 비하여 타라우마라족은 아주 가볍고 얇은 ‘와랏치’라는 전통적인 신발(소가죽으로 만든 샌들)을 신고 달리지만, 부상을 걱정하지 않는다.이 두 부류를 오
경기도 남양주에 소재한 조계종 제25교구본사 봉선사는 교종(敎宗)의 종풍(宗風)과 선종(禪宗)의 선맥(禪脈)이 계승되고 있는 본사이다. 월초 화상(和尙)이 교종판사가 되고 나서 줄곧 주석하시면서 가람을 중수하고 후학 양성에 힘썼던 까닭에 봉선사에는 한국의 구마라집이라고 칭송 받는 운허 스님을 비롯해 내로라하는 강백들이 몰려들었다. 이러한 교종본찰의 전통은 한글대장경 318권을 완간한 역경보살 월운 대강백에게 계승돼 내려왔다. 그렇다고 해서 봉선사 대중이 선종의 청정한 수행가풍을 등한시한 것도 아니었다. 입산한 이래 여러 해 동안 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