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모든 것의 가치를 결정지울 수 있는 표준이 있을까? 가을 들녘의 수확량은 알아 낼 수 있을지라도 황금빛 출렁이는 들판의 아름다움을 가치로는 측량하지는 못할 것 같다. 살다보면 소중하지만 물질적 잣대로 가치를?정량화하기 힘든 것들이 한둘이 아니라는 사실을 쉽게 알게 된다. 절에 온지 얼마 안 된 보살의 이야기이다. 한번은 자신이 다른 사찰에 갔다가 격은 얘기를 했다. 작은 사찰에 우연히 들렸는데 처음 보는 주지스님이 대뜸 ‘요즘 사업이 잘 안되지?’ 라고 해서 깜짝 놀랐다. 사실 하는 일이 어려워 갔었던 것이다. 스님은 천도재를 지내야 사업이 잘 풀릴 거라고 했다. 급한 마음에 그러고 싶다고 하며 가격을 물으니 100만원도 하고, 삼백, 오백, 천만 원짜리도 있다고 했다. 그래서 지금 스님이 아시
일상의 지혜는 속담에서 충분히 얻을 수 있는 것 같다. 인생을 고상하게 꾸며 말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어느 싯구처럼 인생은 낡은 잡지의 표지처럼 통속한 모습이기 십상이다. 어느 스님이 유행가 법문이라고 이름 지어 놓고, 법문 때마다 유행가를 부르기도 하고 가사를 인용해서 법문을 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처음에는 유치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는데 듣다보니 정말 삶의 애환과 애정을 너무도 적적히 인용하는 법문이라서 점점 빠져들었던 기억이 새롭다. 2008년 10월 10일로 기억한다. 약천사에서 전국불교합창제를 개최하였다. 참가한 합창단원만 1,600명이 넘는 대합창제였다. 설망대할멍으로 시작하는 제주의 탄생설화부터 불교의 전례, 그리고 불교의 중흥을 주제로 엮은 합창제였다. 모든 합창단이 함께 부른 마지
바라는 일이 이루어지면 참 기분이 좋다. 열심히 기도한 후면 소원이 이루어지면 감사한 마음까지 생겨나 더없이 기쁘다. 6년쯤 전이다. 어린이법회를 하고 있었지만 어린불자들을 강하게 결속해줄 무엇인가가 있어야 했다. 그래서 서귀포지역에 어린이합창단을 창단하였다. 창단했지만 어린이들을 모으기가 쉽지 않았다. 합창단을 만들어야 한다던 사람들마저 아이들이 가지 않겠다고 하니 어쩔 수가 없다며 참여조차 하지 않기도 했다. 당시 초등학교 앞에서 전단지를 돌리면서까지 단원확보를 위해 동분서주 해야만 했다. 겨우 18명이 모아노래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그때 단원모집에 힘들어하는 자모들에게 언젠가 우리합창단에 들어오려면 오디션을 통과하는 사람들만 입단 할 수 있는 날도 오리라며 위로했었다. 어린불자들의 열의와 지휘자의
오래전 일이다. 어린초등학생이 겨울방학동안 약천사에서 기도하겠다며 왔다. 불사초기 때라 제법어수선하기도 한데 단 한번 새벽예불에 빠진 적이 없었다. 심지어 사중일이 바빠 도와주다가도 사시불공 때가 되면 여지없이 기도하러 가야한다며 법당으로 가버리는 것이었다. 너무 당돌한 모습에 조금은 어이없기도 했다. 도무지 저 어린 것이 뭘 알아서 기도 할까? 신심이라는 말의 의미라도 알고 있는 것일까? 이런 저런 생각하던 사이 방학이 끝나서 기도도 마치고 돌아가면서 말했다. 자기도 고등학교만 졸업하면 바로 출가하여 스님이 되겠다고 했다. 어린치기가 너무 귀여워 꼭 출가 할 거지 하면서 약속을 했다. 한참의 세월이 흐른 12월 어느 날 그 어린보살의 어머니로부터 전화가 왔다. 꼭 한번 보자고 했다. 어느 찻집에서 만난
이메일이 막 보급될 때 쯤 이었던 것으로 기억난다. 어느 보살에게서 메일이 왔다. 아니 보살이라고 하기 보다는 여자라고 해야 할 것 같다. 문투와 글의 내용으로 보아 신심있게 절에 다니는 불자는 아닌 듯도 했다. 내용은 대충 이랬다. 불교에서는 여성을 차별하여 출가하여도 남자스님보다 아래고, 차별이 심한데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는 투였다. 그날부터 많은 메일을 주고받았는데, 그러던 어느 날 자신도 출가하여 비구니가 되면 안되겠냐며 출가 과정에 대해 구체적인 몇 가지를 묻고는 소식이 끊어졌다. 왜 많은 사람들이 불교의 여성차별을 강조하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불교 내부의 상황을 보면 8경계법이 있어 언뜻 그래보일지 모르지만 종교라는 테두리에서 보면 여성을 우리사회에서 당당한 일원으로 진정 해방시킨 종교가
8월의 마지막 밤의 날씨가 제법 선선했다. 참으로 계절 주관자가 누구일까. 달력도 보지않으면서 어떻게 9월이 오는 것을 알았을까? 아침에 어느 보살이 초하루법회 하냐고 물었다. 초하루 법회가 아니고 오늘은 음력 초여드레 약사재일법회 한다고 일러주었다. 약사재일법회 던 무슨 법회 던 9월 첫째 날 하는 법회면 그것도 초하루법회 아니냐고 하고 전화를 끊었다. 언젠가 법타스님께서 양력을 공식적으로 사용한지 오래 지났는데도 절에서 음력을 기준으로 법회를 하고 있다며 변화의 필요성을 말씀하셨다. 양력에 맞춰 생활하는 사람들의 패턴과 이격되어 불교가 대중으로부터 멀어지고 있다며 안타까워하셨다. 공감이가는 말이다. 주부들 중심으로 사찰이 운영된다고 하여 보살절이라는 별칭으로 불려지고 있는게 현실이다. 여기에서 탈피하
“자~ 스님들, 요기 보시다가 하나 둘 셋 하면 파이팅~! 하면서 웃으세요.” 인상 좋은 사진사의 말에 21명의 스님들이 웃음을 터트렸다. 청암사 승가대학에 재학 중인 학인들이 지역 대학교에서 2년간 사회복지 과정을 모두 마치고 졸업사진을 찍는 날이다. 2012년 2월 절 밖 출입이 제한된 스님들이 승복 위에 사립대 학사모를 썼다. 학인들이 일반 대학에서 단체로 위탁교육을 받고 졸업하는 건 우리나라 승가대학 중에서는 처음 있는 일이다. “주지 스님, 이제 학인 스님들도 전문성을 갖춰야 불교의 사회적 역할 확대에 도움을 줄 수가 있어요. 현재의 승가대 4년 교육과정 속에 사회복지사 자격증을 취득하는 교과 과정을 연결하면 사회복지 활동이 증가하는 시대에 스님들이 사회 참여를 하는데 도움이 됩니다.” 김천
구미 마하이주민센터 3층에는 법당이 있다. 특별하다면 불단에는 어느 나라에서 모셔 왔느냐에 따라 스리랑카 부처님, 캄보디아 부처님, 중국 부처님, 베트남 부처님으로 구분되는 크고 작은 부처님이 작은 불단을 가득 채우고 있다는 것이다. 국내 이주노동자들의 50%는 불교문화권에서 온 노동자로서 자기 나라에서 온 부처님 모습을 보면 매우 좋아한다. 부상으로 아픈 몸으로 센터를 오거나 휴일날 갈 곳이 없을 때 이 곳 법당은 남방불교 염불소리와 향 내음으로 가득하다. 그 나라 말을 알아듣지는 못하지만 대부분 고향에 두고 온 부모님이 아프지 않기를 기원하고, 한국에서 돈 많이 벌 수 있기를 염원하는 모습이 느껴진다. 15년 전 나는 3개월 간 헝가리에 머문 적이 있다. 부다페스트에서 3시간 떨어져 있는 작은 쩔러싼
“안녕하세요.” 인사를 건넨 청년이 모자를 벗자 나는 말을 이을 수 없었다. 왼쪽 뇌의 3분의 1을 잘라 낸 청년의 얼굴을 본 사람은 대부분 놀라워했다. 마음고생을 나타내 듯 까맣게 타들어간 입술, 멍한 그의 모습에 맞이할 말을 잃었다. 그의 곁에는 아버지 반디가 아들의 손을 꼭 붙잡고 있었다. 무슨 말로 이 가족이 겪고 있을 고통을 위로해야 할지 생각이 복잡했다. “반가워요. 이곳이 이주노동자 쉼터라는 것은 알고 있지요? 오늘밤은 마음 편안히 푹 잠을 자세요.” 1차 수술을 마치고 그들은 갈 곳이 없었다. 28살의 착한 눈빛을 가진 베트남 청년, 토안(To An)은 이렇게 나와 인연이 시작되었다. 한국으로 건너온 지 3년째가 되는 2010년 7월 늦은 밤 오토바이를 타고 마트에 다녀오다 한국인 자가용
부처님은 달리라고 설법하신 적이 없다. 하지만 극한의 고통을 반복하며 달리기를 하는 것이 내가 선택한 수행 방법이다. 그리고 그것이 제일 잘하는 일이기도 하다. 하지만 마라톤이 어디 쉬운 운동인가. 새벽 2시, 굽이굽이 이어진 깊은 산골을 달리다 보면 간혹 전봇대가 내게 다가오기도 하고 발을 헛디뎌 아슬아슬할 때가 있다. 졸음이 밀려들면서 환각상태가 찾아오고 앞이 보이지 않아 어지럼증도 도진다. 발은 물집이 잡혀 엉망이다. 한 발 디디기도 어려운 몸을 끌고 끝까지 완주해야 한다는 신념으로 버티는 순간이다. 졸음이 몰려들면 허벅지를 꼬집고 뺨을 때리기도 하면서 달린다. 정말 이렇게까지 달려야 하나 싶어 눈물이 솟구칠 때가 있다. 맨살을 드러내는 일을 금기시하는 보수적인 불교계에서는 마라톤복을 입고 뛰는
1981년 2월 사미계를 받았다. 계를 받기 전 법주사에서 행자생활을 했지만 동국대학교에서 체계적으로 불교 교리를 공부하고 싶은 생각에서 법주사를 나왔다. 수능시험을 본 뒤 법주사로 돌아가지 못하고 나를 받아 줄 스승을 찾아 나섰다. 다행히 지금의 모악산 금산사에서 나를 받아 주었다. 남은 행자 생활을 마친 뒤 큰스님께 법명을 받았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약간의 논란이 있었다. 처음부터 금산사에서 행자 생활을 시작 한 것이 아닌데다 금산사에 얼마 지내지 않고 바로 동국대학교에 가겠다고 하니 학비 지원을 해 줄 수 없다는 거다. 1년 이상 큰 절에서 생활을 하다 대학에 가면 사찰장학금을 받을 수 있었지만 나는 여기에 해당되지 않았다. 공부하고 싶다는 이유를 들어 동국대를 선택했다. 그곳에 가니 같은 기수
운명이라는 말로 모든 삶을 결정지을 수는 없지만 가끔은 이것이 나의 운명이라는 말로밖에 달리 설명할 수 없는 일들이 있다. 내가 출가를 결심하게 된 것은 고등학교 2학년 때다. 고등학교에 입학 후 우연이 불교 동아리를 만나게 되면서 불교를 처음 접하게 되었다. 불교반 지도 법사님으로부터 ‘너의 인생관은 무엇이냐?’라는 질문을 받았다. “인생관은 사람이 인생을 어떻게 살아가느냐 하는 가치관입니다. 가는 실이 있고 굵은 실이 있는 것처럼 사람의 삶도 가늘 게 사는 사람과 굵게 사는 사람이 있어요. 또한 가늘고 길게 사는 길과 굵지만 짧게 사는 인생의 길이 있을 때 여러분은 어떻게 살고 싶은가요? 의미있는 삶, 가치있는 삶을 찾아보세요.” 법사님의 설법은 내게 오랜 여운을 남겼다. 그러면서 진리가 무엇이냐를
저 이제부터 “딩티응앗!” 아니에요. “임지영”으로 불러주세요. 27살 베트남 출신 이주여성이 웃으면서 법회에 참석하자마자 요청을 한다. 자국 출신의 이름을 한국 국적 취득한 다음 가장 먼저 한 일이 개명이란다. 왜 그런가 했더니 엄마 이름을 두고 아이들이 학교에서 놀리기 때문에 화들짝 놀라서 취한 행동이었다. 한국인 아빠와 베트남 엄마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들 중에는 갑작스런 이혼이나 기타 사유로 엄마 나라로 출국한 뒤 아직도 되돌아오지 못한 7세 이하의 한국 아이들이 1,000여명이 넘는 통계자료가 있다. 또한 이주노동자 부모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들도 무국적 상태로 건강보험과 같은 의료보호를 받지 못하고 여러 가지 어려운 상황이 지속되어 한국을 떠나고 있다. 우리나라는 부모의 체류자격에 따라 출생한
하루에도 수많은 인연과 만나고 헤어진다. 나에게 특별한 만남을 말하라면 당연히 새 생명과 눈을 맞출 때이다. 그리고 가장 아픈 이별을 떠올려보라면 이 아이들이 국내에서 자라지 못하고 연락없이 어느 새 사라지는 때이다. 6년 전 탄시르는 태어난 지 4개월 만에 엄마 친구의 품에 안겨 인도네시아로 출국해야했다. 인도네시아 노동자 부부가 공장에서 월급을 제 때 받지 못한데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노동비자를 연장 받지 못해 미등록 노동자가 되었다. 사실 이들은 불법노동자가 아니다. 나쁜 범죄를 저지른 사람이란 의미가 포함된 불법이란 용어보다 서류가 갖춰지질 않아서 행정기관으로부터 비자를 연장받지 못한 미등록 노동자로 불러도 될 것이다. 탄시르 엄마, 스텔라는 같은 나라 출신인 아빠와 사랑을 나누었고, 준비되지
2013년 초파일을 한 달 앞두고 우연히 뚜안을 만났다. “스님, 안녕하세요. 센터에 친구 만나러 왔어요.” “반가워! 뚜안. 그런데 왼손이 아픈 거야? 붕대를 왜 감고 있어?” 그런데 단순히 붕대를 감은 수준이 아니었다. 새끼손가락을 빼고 모두 프레스기에 잘린 상태였다. 합장을 하게 했더니 사라진 부위가 너무 컸다. 사실은 새끼손가락도 안 남고 손바닥 안쪽까지 잘려나갔던 것이다. 손이 없으니 당연히 그에게 일자리를 줄 사람은 없었다. 다행히 산재보험에 해당되어 보상금을 받았단다. 하지만 한국에 올 때 빚진 것을 갚기 위해 모두 집으로 송금했다고 한다. 무료하고 심심한 일이 반복되면서 뚜안은 2주 뒤에 고향인 베트남으로 돌아간다고 했다. 나는 그에게 의수를 왜 안 했는지 물었다. “비싸요.” 30살
“내 마누라! 여기 있는 거 다 알아.” 이주여성 쉼터 입구에서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들렸다. “당신들이 뭔데 내 마누라, 내 새끼 데려가려는데 막아!”라며 들어오려는 사나이와 실강이가 벌어졌다. 욕설과 고함, 폭력이 난무하면 결국 경찰을 부를 수밖에 없다. 긴급 피신한 여성은 애를 안 주겠다고 울고, 남편은 막무가내로 아이를 데려가려고 하고 난감한 상황이 아닐 수 없다. 처음에는 변명으로 일관하다가 그 정도 양보안하면 누가 집에 들어가겠냐고 되물으면 남편들의 기가 꺽인다. 아내의 역할을 도와주는 양성평등 문화에서 자란 여성과 보수적인 남성위주의 삶 속에서 자란 남편과의 문화적 차이에서 오는 갈등도 적지 않아 이 문제가 극복되면 원만한 합의하에 가정으로 돌아가는 이주 여성도 있다. 정답은 서로가 공통분
“스님, 우리 집에 갈거에요? 엄마에게 이것 좀 전해 주세요.” “이게 뭐예요?” “별거 아니에요. 우리 엄마에게 꼭 부탁드려요. 그리고 제가 시댁에서 떠나온 이야기 하면 안 돼요. 잘 지낸다고 그렇게만 전해 주세요.” 싱팔라가 왜 그런 말을 하는지 이해한 나는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하고 캄보디아로 떠나는 여정에 올랐다. 우리나라에 씽팔라와 같은 이주 여성들이 얼마나 많은지 비행기 속에서 착찹한 내 마음은 석양의 아쉬움 만큼 허전했다. 행복을 기대하며 온 땅, 그러나 이들에게는 가파른 시련이 기다리고 있었다. 좋은 남편을 만나 잘 정착하고 살아가는 여성도 있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가 더 많은 것이 냉정한 현실이다. 폭행·폭언에 무방비 상태로 노출 되는 여성들을 만날 때마다 나는 이 현실을 더 뼈아프게 느
베트남에서 시골학교에 화장실을 지어주기 위해 마라톤을 뛰었을 때의 일이다. 얼마나 달렸을까? 마라톤 첫날 5시간 만에 체력이 서서히 떨어지기 시작했다. 수은주는 영상 38도. 수분이 계속 땀으로 배출되어 입안이 바짝바짝 마르자 나중에는 눈앞의 길과 나무가 나에게 달려드는 환각에 시달렸다. 손등으로 연신 눈으로 흘러드는 땀을 닦아내며 얼굴을 꼬집거나 뺨을 때렸다. 눈앞에 이국적인 풍경이 펼쳐지다가도 베트남 간판만 한글로 바꾸면 1970년대 한적한 한국 농촌과 너무나 많이 닯아서 여기가 베트남이 맞는지 착각이 들 정도였다. 달리다보면 예기치 않은 일들이 많은데 갑작스럽게 비가 내리면 폭우 수준이라 반드시 비옷을 걸쳐야했다. 결국 승복을 벗고 마라톤 복으로 갈아입었다. 피부가 옷에 쓸려 아프고 땀띠가 나서 어
“선근이 있어 틀림없이 스님이 될 인연이 있는 학생이 있으니 잘 키워봐라” 고등학교 교복 차림의 소년이 대둔사로 찾아왔다. 소년은 꾸벅 허리를 숙여 인사하고 김승재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며칠 전 전화를 주셨던 도리사 법등 큰스님의 신중한 음성이 떠올랐다. 스님은 내게 밑에 거둔 제자가 있냐고 물으셨다. 정신없이 대둔사와 이주노동자 센터, 김천시 다문화가족지원 센터를 오가는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어서 누군가를 책임지고 가르칠 처지가 아니었다. 그날부터 승재의 절집 생활이 시작되었다. 기특하게도 승재는 도착한 날부터 새벽 5시 예불에 한 번도 빠지지 않을 정도로 성실했다. 내가 처음 출가할 때 스승으로 모시려던 분이 더 좋은 스님이 계신다며 소개했던 것처럼 승재도 큰스님의 소개로 내게 왔으니 참 희한했다.
지현이는 내가 만난 통일(탈북의 이미지 보다는 미리 온 작은 통일의 의미로 이렇게 불러야 한다고 생각함) 청소년 중에서도 유독 똑똑하고 야무진 친구다. 16살 때 혼자 두만강을 건너 북에서 중국으로 건너갔던 소녀가 19살에 한국에 들어오기까지 많은 일들이 있었다. 이런 지현이가 2014년도 4년제 대학에 합격했다는 소식을 듣던 날 오뚜기쉼터 식구들 얼굴에는 함박꽃이 피었다. “스님, 저 검정고시 학원에 다니면 어떨까요?” 어느 날 쉼터에 들어온 지 3개월 된 지현이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초등학교 4학년과정이 지현이가 북한에서 배운 공부의 전부였다. 더구나 남한은 초등과정이 6년 기간이라 학습량이 차이가 컸다. “저는 학교에서 경1, 경2, 경3 이런 과목을 배웠어요. 한글 익히고 읽은 책이 김일성 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