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사 가르침으로 문인화가 기반 다져 ? 소치 허련은 조선 후기 남종화를 대표하는 인물이다. 그가 맺은 추사와 초의와의 인연사는 참으로 흥미로운 일로, 초의를 찾아간 일이나 한산전에서 그림을 탁마했던 인연사가 그렇다. 그는 〈〈몽연록(夢緣錄)〉〉에서 초의와의 첫 만남을 “을미(1835)년 대둔사 한산전으로 초의스님을 찾아갔다. (나를)따뜻하게 대해주었고, 방을 빌려주어 머물게 했다”고 회상했다. 수년을 왕래하다보니 기질과 취미가 서로 같았다던 소치, 이들은 오래도록 변치 않는 사제의 정을 나누었으니 진정 숙생의 인연임이 자명하다. 실제 그가 초의를 찾았던 연유는 알려지지 않았다. 다만 그가 진도 출신이었다는 점에서 진도 쌍계사를 내왕하던 초의와 일찍부터 면식이 있었던 것은 아닐까.
추사는 초의의 관음진영보고 감탄 초묵법 절세의 명작 소재 자못 궁금 ? 근자에 발굴된 〈벽해타운첩〉은 추사가 초의에게 보낸 편지 첩으로, 총 21신이 실려 있는데, 〈완당문집〉〈여초의〉와 중복된 것이 13신이고,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은 편지도 8신이나 된다. 이들이 나누었던 지음의 아름다운 세계는 이것을 통해 더욱 풍요롭게 밝혀지리라. 새로 발굴된 〈벽해타운첩〉4신의 내용은 이렇다. ? 一以阻截 適從人獲見所?觀音眞影 何異見師 殊勝相也 但筆法何時到此地位歟 讚歎不能已 大?焦墨一法 爲不傳妙諦 偶因許癡發之 何料墨輪輪轉又及於師也 此像卷見爲黃山尙書所藏 尙書將欲手寫師所作讚語於其下 洵爲禪林藝圃一段佳話 恨無由拉師共見耳 近寒禪安念切 此狀嗽甚 四大之苦如是也 玆因秀奭便 略申不具 新蓂付之 己亥
초의스님이 금강산을 유람할 때 아낌없는 후원을 보낸 인물이 추사였음은 이미 언급한 바와 같다. 최근 발굴된 〈주상운타첩〉에는 지금껏 소개된 적이 없는 새로운 추사의 편지가 수록되었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크다 하겠는데, 이 첩 속에는 두 편의 편지를 한 면에 수록해 두었다. 좌편의 해서체로 쓴 편지는 〈〈완당전집〉〉 〈여초의〉 10신과 같은 내용이고, 오른 쪽에 초서체로 흘겨 쓴 것이 처음 소개되는 편지이다. 두 편의 편지 중, 우선 〈여초의〉10신의 내용을 먼저 살펴본다. ? 昨因季歸 略聞聲信 卽又獲見梵 種種慰浣 第甁鉢栖皇客惱可悶 至於明日金剛之行 遂不見我而去耶 仲之長川行 亦非明日可以經發者 且暫收拾躁猿靜俟數日 亦爲休憊之方便也 慧衲殘糧 豈可浪費 亦當裁處 放下着不式 (〈여초의〉10신) 어제 막내아우가 돌아왔
초의스님의 금강산 유람은 우여곡절 끝에 이루어진 일이었다. 1838년 봄, 유람 길에 오른 그가 제자 수홍과 함께 지은 〈유금강산시(遊金剛山詩)〉에는 장중한 금강산의 기세를 ‘첩첩히 산이요, 굽이 굽은 물길이라(山萬疊兮水萬重) 첩첩한 산, 굽이 흐르는 물, 활처럼 휜 하늘을 가릴 듯(重重疊疊鬱穹?)’라고 노래했으며, ‘안개이슬 구름으로 옷을 만들고(霧露雲霞作衣裳), 서리 맞은 꽃잎으로 식량을 대신하리라(霜花雪葉充후糧)’고 했다. 선경(仙境)을 유람하던 그가 추사에게 보낸 비경(秘境)의 감회는 남다른 의미를 지녔을 것이라 짐작되지만 애석하게도 초의의 편지는 한 점도 발견되지 않았다. 다만 금강산 유람을 함께하지 못한 추사의 편지만이 그의 문집과 〈주상운타첩〉에 남아 있다. 〈〈완당전집〉〉〈여초의〉9신에 수록된
조선 후기 금강산은 승속을 불문하고 누구나 유람하기를 열망했던 승경지였나 보다. 초의스님이 처음 금강산 유람을 계획한 것은 1834년의 일로, 이 해 가을, 그는 제자 취연과 함께 유람을 계획하고, 철선(鐵船1791~1858)과 만휴(萬休1804~1875)도 함께 가려했지만 성사되지 않았다. 신헌(1810~1884)의 에 ‘두 선사가 산천(김명희1788~1857)과 함께 금강산을 유람하기로 약속했다. 초의는 천리 길을 달려와 약속을 지켰지만 산천이 병이 나서 그만 두었다’고 한 것을 통해 저간의 사정이 밝혀지게 된 셈이다. 그가 다시 금강산 유람을 도모한 것은 1838년 봄의 일이다. 이 편지는 8과 에 수록된 것으로, 소치에 대한 언급은 문집에만 수록되었다. 그
추사 좌부승지 제수돼 다시 초청 ?
당시 불교계 현실 비판도 엿보여 ? 계사년 새해가 밝았다. 오가는 세월에 대한 회한은 예나지금이나 같은 듯. 병신(1836)년 새해, 초의에게 보낸 추사의 편지는 다음과 같다. 禪榻茶煙又是一年 年去年來之中 能有不去來者在否 其間 魚鴻之誤千里遠塗 亦復無怪 世諦人事 尙有藉是而印照遠心 在師不滿一呵 在我寔不勝其低回??也 卽見來 又是拙書以前出也 未知卽收耶 春風漸? 禪誦近復何如 獨居無伴否 有勝侶否 世間每易萍散蓬轉 有能住定 不爲此障 亦佳甚也 賤狀依舊揷脚於紅塵中而已 近得安般守意經 是禪藏之所希 有禪家每以盲捧?喝 做去黑山鬼窟 不知此無上妙諦 令人悲憫 恨不如與師天機淸妙者一爲對證可歎 維摩經鐵衲 遂食言耳 比與師無來往否 漠然無聞何至此甚 爲我轉致也 姑留不式 참선하며 차 마시며 지내던 한 해가 또 지나갑니다. 해가 가고 오는 중에서
?추사가 다시 좌부승지에 오른 것은 1835년 8월23일이다. 이 해에 소치 허련(1809~1893)은 진도에서 대흥사로 초의 스님을 찾는다. 초의의 배려로 대흥사 한산전에 머물며 불화를 익혔던 그는 공재 윤두서의 화첩을 두루 섭렵하여 화안(畵眼)을 높였는데, 이러한 인연은 공재의 후손인 윤종영(1792~?), 윤종심(1793~?) 등이 대부분 다산의 다신계 제자들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후일 추사는 소치의 괄목할 만한 재주를 한눈에 알아보고 자신의 슬하에 머물게 하였다. 조선 후기 걸출한 남종화의 대가, 소치는 추사와 초의의 깊은 인연이 만들어낸 결과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평생 두 스승과의 사제(師弟) 인연을 소중히 여겼던 그는 한양과 제주도, 해남을 오가며 슬픔과 기쁨을 함께 전했던 아름다
?초의 ‘七佛’ 현판 글씨 부탁 조사상 그림 진표율사 아닐까 ? 추사가 초의 스님에게 보낸 짧은 편지 글에는 그들이 나눈 진솔한 우정 이외에도 초의와 관련된 직간접 정보를 살펴 볼 수 있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여초의(與草衣)〉4신(信)이 바로 그런 편지라 할 수 있는데, 이를 통해 초의가 지리산 칠불암에서 금담스님(1765~1848)에게 서상수계를 받은 후, 추사에게 ‘칠불(七彿)’이란 현판 글씨를 부탁한 새로운 사실이 밝혀지게 된 것. 추사의 편지는 이렇게 시작된다. ? 截然阻久 禪味世趣較長爭短 未知何居 但是心事白雲而已 無有念及於江上臭塵歟 俗人每不能 斷送舊日想 其牽纏可惡 亦不得不如是耳 頃託七彿扁書 尙未入量 祖師像本 才擬移拳拳完當付 送 而如大隱躬來取去則 又有他件件好事 試使圖之也 師輩心心念念
판향 동봉 부처님께 청공 올려 ? 추사가 초의스님에게 보낸 편지 속에는 두 사람의 교유관계는 물론 당시 세상사가 한 눈에 드러나는 묘한 매력이 있다. 때로 추사의 편지글에는 불교의 출세간을 비난하기도 하지만 이는 추사뿐만 아니라 당시 사대부들이 불교를 바라보는 시각이었다. 위명존순(俟命存順: 천명에 맡기고 순리로 보존)은 유자(儒者)의 사생관(死生觀). 이런 연유로 윤회를 반복하는 스님들의 처사를 곱게 보지 않은 듯하다. 〈완당전집〉에 수록된 〈여초의(與草衣)〉 두 번째 편지에는 이러한 간극이 또렷이 드러난다. ? 세월은 유수처럼 흘러, 세간에도 또 한 해가 지나가는구려. 그대들은 영원히 윤회를 벗어나 윤회가 없는 곳에 머물려고 하지만 그러나 평범하게 살면서 천명을 기다리며, 사
1815년 겨울, 학림암에서 법거량을 나눴던 해붕스님(?~1826)을 끝내 잊지 못했던 추사였다. 해붕의 큰 가르침을 가슴에 새겼던 그는 학림암의 일을 부끄러운 마음으로 회상했다. 초의스님에게 보낸 추사의 편지에는 해붕에 대한 그리움을 한껏 드러내고 있다. ? 산중에서 하루 밤을 묵으니 마치 제유(諸有)를 벗어나 삼매에 들어 간 듯합니다. 다만 몽중의 망설이 많아서 스님들에게 괴이하고 무능함을 보였으니 산이 조롱하고 숲이 꾸짖을 일은 아닌지요. 곧 스님의 편지를 받고 보니 끊어지지 않는 인연이 이어진듯하여 기쁘기도 하고, 또 기려집니다. 해 스님의 한결같은 맑고 아름다운 마음은 질박한 마음에서 생긴 정이니 끊어 버릴 수가 없습니다. 속인의 속된 일은 옛일에서 이어진 것이니 노스님의 마음(梵聽)에 누가 되
초의, 추사를 그리워하며 詩 읊어 ? 초의스님은 학림암에서 추사를 처음 만난 후, 첫 만남의 설렘이 식지 않은 듯. 불국사에서 추사와의 재회를 오매불망 기다렸지만 허사가 되고 말았다. 그가 지은 〈불국사회고〉는 추사를 향한 그의 마음을 짐작할 수 있는 시로, 그 정회(情懷)를 이렇게 노래했다. ? 오래도록 순시하고 있는 그대가 못내 그리워 (苦憶先生久在行) 자하문 밖 맑게 갠 하늘을 보네 (紫霞門外看新晴) 세상의 불국은 차라리 얻기라도 쉽지만 (佛國人間寧易得) 서로 만나서 편안한 정을 다할 수 있을까 (相邀始可遂閒情) ? 이 시는 초의스님이 추사를 기다리며 쓴 시이다. 초의는 이미 기림사에 오기 전부터 추사가 경주감영에 내려온다는 얘기를 듣고 추사와의 재회를 기약했는지도 모른다. 이
추사와 초의선사의 만남은 필연이었을까. 결과적으로, 이들의 만남은 우연이 아닌 듯하다. 이는 동 시대에 태어나, 고락을 함께 나눈 지인들이었다는 점에서도 그렇고, 유학자와 승려라는 사회적인 신분을 초월한 통유가 그렇다. 따라서 이들의 우정은 금생의 인연이 아니라 숙생(宿生)의 인연이었음이 분명하다. 이들이 처음 만난 것은 1815년 겨울, 학림암에서이다. 당시 초의가 무슨 연유로, 상경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유산 정학연(1783~1859)과의 내락(內諾)이 있어 상경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나 초의가 상경해 두릉을 찾았던 늦가을, 유산은 강진으로 부친을 뵈러 떠난 후였다. 당시의 상황으론 운길산 수종사에 머물 수밖에 없었다. 초겨울이 되자, 수종사는 산이 높고 추워 겨울을 지내기 어려웠다. 이 해 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