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문은 부처님 말씀을 직접 들은 대제자 불멸 2백년 후의 대천 스님 “도는 소리로부터 일어난다 소리가 없으면 전도 안돼” 음성과 문자로 포교 가능 밀교의 성자관에 의하면 음성을 다양한 변화표현 불멸 천년후 비밀 불교 흥왕 용수보살이 비밀의 법장 연 ‘남천축 철합개안’ 밀교 근거 ? 불교에서는 이 음성이 어떻게 다루어 졌을까? 불경에는 번번히 여시아문(如是我聞)이라는 말이 나온다.‘이와 같은 것을 나는 들었다’. 무엇을 들었다는 것일까. 부처님의 말씀을 들었다. 그리고 부처님의 직제자를 존칭하여 성문(聲聞)이라고 일컫는다. 성문이란 ‘소리를 들었다’는 것인데, 들었다는 그것은 부처님의 말씀하시는 소리를 이른 것이다. 이로 보아 불교에서 음성을 중요시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성문은 직
7. 참회진언(懺悔眞言) 삼교는 부모님께 효도하고 국가에 충성을 바친다는 것 공자(孔子)의 도와 다를 바 없다. ? 유불도 들어오기 전에도 우리민족은 거룩한 삶 실천 화랑의 풍류는 현묘한 ‘도’ ? 옴 살바 다모디사다야 사바하(三遍) 참회진언의 참회는 앞에서 말하였으므로 더 언급할 필요는 없거니와, 진언에 대해서는 첫 대목의 정삼업진언에서 못 다한 이야기를 여기서 해야겠다. 좀 더 철저하게 알아두어야 한다. 진언(眞言)은 이를 번역하면 우리말로 주(呪), 혹은 주문(呪文). 범어는 만다라 또는 다라니. 신묘장구대다라니(神妙章句大陀羅尼). 반야심경(般若心經)의 즉설주왈(卽說呪曰) 따위.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진언은 모든 진리를 다 가지고 있는 말이라 하여 총지(摠持)라고 풀이한다. 또
탐욕을 툭툭 털어 버리고 안으로 모든 부처님 모셔들여, 밖으로 대비원력을 세워 부처님 같이 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갖게 된다면 어느덧 자기 자신이 거룩해지고, 환희심이 난다 정진·참회하고·발심하면 어느덧 자신도 모르게 깨쳐질 때가 온다 ? 我昔所造諸惡業 皆由無始貪瞋癡 從身口意之所生 一切我今皆懺悔 ?위대한 성자인 부처님의 모든 덕을 살펴보고 스스로를 반성할 때 마음 속으로 깊이 참회스럽고 미안한 생각이 난다. 자기 자신이 한 노릇을 돌이켜 보고 심히 참회한다. 양심의 발로인 참회를 심각히 하는 사람은 그만큼 도(道)를 절실히 구하는 것이 된다. 또한 도를 열심히 갈구하고 거룩한 일을 칭양 찬탄하는 사람은 한층 더 정성스러이 참회하는 것이다. 이 참회게는 보현행원품(普
불보·법보· 승보 덕과 진리 모두 망라한 원융무애한 자재로운 마하반야가 삼보에 있다. 원효대사는 삼보의 덕을 심덕·색덕·명호에 있다고 말씀하셨다. ? 4-9 귀경례 이렇듯 지관(止觀)의 수련을 통해 문(門)에 대한 의심을 풀어 버린다. 불교는 전진적(前進的)인 것이다. 삿된 집착을 버리고 부처의 도(道)를 넓히고 널리 선포하는데는 ‘나’라 하는 것, 조그만 나의 견해 같은 것을 버리고 우주적인 대아(大我)와 공정성(公正性)에 의하여, 방일하지 말고 더욱 정진하여 후퇴하지 말고 끊임없이 분발 전진해 나가야 한다. 이를 아비발치라고 하는데 불퇴전(不退轉)이라는 뜻이다. ? 至心歸命 十方法界常主三寶(一拜) 시방(十方)은 앞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사유사방(四維四方)인 동서남북과
이 우주 안 어느 곳에도 내가 없는 곳이 없다. 시긴적·공간적으로 얽혀 분리할 수 없는 존재 자각이 대승이며 수행문의 선행 조건 문에는 진여문·생멸문이 있다 止觀병행, 운용의 묘 터득해야 4-8 귀경례 또 문(門)을 의심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과연 어떤 수행문(修行門)으로 들어가야 하는 것일까? 여래(如來)가 세운 수행문은 대단히 많아 과연 어떤 문에 의지하여야 여래가(如來家)로 들어갈 수 있는 것일까? 그러나 이런 것도 실상은 해결할 수 없는 부질없는 의심이다. 문에 대한 의심은 다음의 적당한 방법으로 풀어 버려야 한다. 우주와 나는 하나다. 그러므로 무아(無我)다. 먼저 이러한 명제(命題)에 의하여 나를 살펴 보기로 하자. 나를 거슬러 올라가 추궁해 보면 거기엔 무수한 아버지와 어
진리를 의심하게 되면 발심에 장애가 되고 망설이다 아무것도 못한다 ?문(門)을 의심하면 수행에 장애가 되어 갈팡질팡하게 된다 ?물론 부처님 외에 많은 대종사(大宗師), 큰 스님네와 큰 보살(菩薩)들 즉, 마명보살(馬鳴菩薩)·용수보살(龍樹菩薩)·무착보살(無着菩薩)·세친보살(世親菩薩) 또는 달마대사(達磨大師)·천태대사(天台大師) 등 위대한 스님네들이 많이 나시지 않은 바는 아니지만, 또 인도나 중국에서 그 밖에 여러 나라에서 대성자(大聖者)들이 많이 나셨지만 그 성자들 가운데 원효보살은 가장 뛰어나시고 어느 불 보다도 부처님의 전체적 부분을 종횡무진으로 남김없이 설명하시고 그리고 우리들 자신의 인간 생활에 있어서 탁월한 체득을 하셨다. 그러므로 8백년 전에 우리들의 대선배인 고려 대각국사(大覺國
중도는 바른 믿음으로 공정성을 확고히 해서 대사회 건설하는 ‘보살의 길’ 믿음이 확고하지 않으면 아집과 법집에 빠진다. 애착 버려 무분별지 얻으면 여래집에 태어났다한다 ?4-6 귀경례 더욱 직접적으로 사회의식(社會意識)이라고 하여도 좋은데 이에 대한 신앙이 없으면 두 극단에 떨어지기가 쉽다. 두 가지 극단이라고 한 것은 유(有)와 무(無)에 대한 우리의 고정관념(固定觀念)이다. 신(神)이, 하나님이 있다느니, 우리에게 불멸의 영혼(靈魂)과 같은 것이 있다느니 하는 유(有)의 관념과 이를 부인하는 아무것도 없다, 있을 수 없다고 하는 무의 관념이 언제나 우리 내부에 대립되어 있는 것이다. 만일 신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운명론을 유발하고 드디어는 숙명론(宿命論)에 빠지고 만다. 이것은
?‘관세음보살’은 부처님 심정 헤아리고 중생 심정 알 수 있는 합일된 경지를 의미 괴롭고 죄 많은 중생 구제하고 건져주는 어른 ? 흔히들 선정(禪定)을 닦는다고 말을 하지만 선정이란 확고 부동한 정각(正覺)을 이루는 방법인데 단지 그것만을 한다고 멍청히 도사리고 앉았기만 한다면 이는 정(定)에 계합하지 않는 것이 된다. 이를 닦으면서도 선정에만 머물러 있지를 말고 어떤 일이건 사리지 않고 모두 다 해나가는 거기에 스스로의 정신이 통일되어 확고 부동한 자세를 터득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안으로는 반야반라밀(般若婆羅蜜)을 만족케 하고, 따라서 모든 진리를 이러쿵 저러쿵 헐뜯어 희론(戱論)하지 않는다. 또 부질없이 논술(論述)하지도 않으며 헛되이 안다니처럼 씨석받은 소리를 하지도 않는다. 이렇게
삼라만상의 모든 현상을 다 나타내지 않은 바 없는 원만한 모양이 ‘眞如海’이며 그것을 열반이라 하며 바로 이것이 극락세계다 보살은 불방일·여실수행자 지혜·덕행 공덕 우주에 가득 ? 4-4 귀경례 이 고를 없애는 것을 멸(滅)이라고 하였으며 그 원리를 또한 멸제(滅諦)라고도 하셨다. 또 열반(涅槃)의 원인은 무엇으로 얻어지는 것인가? 그것은 우리들의 깨친 행동, 실천으로써 가능한 것이며, 이는 환희(歡喜)와 대자대비의 행동으로써 이루어진다. 이를 도(道)라고 하셨다. 부처님께서 맨 처음 초전법륜(初轉法輪) 시에 중생에게 설법(說法)하는 가운데 이러한 고집멸도(苦ㆍ集ㆍ滅ㆍ道)의 사회적 현상과 원인(原因) 결과(結果)의 동시에 실천되어 나가는 일을 설명하신 대목이 있어 이를 사제법문(四
무명에서 망상이 일어나고 온갖 욕심이 생기는 것이며 큰 고통을 받게 된다 환히 밝아졌을 때 깨쳤다 하며 도통했다 한다 깨친 다음에는 망상은 다시 일어나지 않는다. 이 경지를 열반이라 한다 ? 4-3 귀경례 지심귀명례극락세계아등도사아미타불(至心歸命禮極樂世界我等導師阿彌陀佛) (一拜) 사람이 살아 나가는 데 오고 가는 사람의 왕래가 있다. 자기가 거처하는 집을 깨끗이 청소를 하고 그 다음에는 꽃을 심어 단장한다든지 향을 피운다. 그러면 자기가 거처하는 곳이 곧 성현이라도 거처할 수 있는 집이 된다. 성현 중에도 대표자 격인 부처님을 모셔오기로 한다. 부처님이라고 하지만 역사적으로는 석가모니부처님. 이에는 인도라고 하는 지역 석가족성(釋迦族姓)이며 시대의 한계성이며, 또 정반왕
4-2. 귀경례?? 부처님은 우리 인류에게 큰 은혜를 베푸셨다 모든 번뇌·망상 온갖 죄악에 싸여 있는 우리들의 근본 스승이 석가모니 부처님이시다 불이란 이를 설명하는 소리다. 항상 그 자체가 커다란 지혜의 광명을 발하면서 어디까지나 평등하고 아무 삿된 것이 없이 순결하고 자유자재하고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나 아무데서고 영향을 받지 않는 행동 그 자체를 각이라고 한다. 각은 자기가 알고, 남에게 알도록 하고, 안 것을 행동하고 실천한다는 뜻이 들어 있다. 이것이 무슨 소리냐 하면 아무런 망녕된 생각이 없으므로 그 생각이 정당하고 광대(廣大)하여 저 허공과 같고 지혜의 광명은 우주의 어느 곳에라도 안 가는 곳 없이 두루 다 갈 수 있고, 모든 사람을 이익케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다시
“지극히 목숨 돌이켜 절합니다” 믿는 마음 극상표시가 ‘귀명’ 돌아가는 ‘一心’ 삼보에 두는 광명·정대·화합의 절대 자리 ?4-1. 귀경례(歸敬禮) 그리고 이는 신심(信心)의 극(極)을 표시하는 말이다. 믿는 마음의 극상(極上)을 표시하여 귀명(歸命)이라고 한다. 신하가 임금을 안 믿으면 신하 노릇도 안 된다. 부부간에도 친구사이에도 이것은 역시 마찬가지다. 신(信)이 없으면 아무것도 안된다. 그러므로 신의(信義) 즉 믿는 마음의 극을 표시하는 데는 오직 귀명을 끌어온다. 그런데 돌아가는 바의 일심(一心)을 우리가 어디에다 두느냐 하면 그것은 삼보(三寶)이다. 밝고 바르고 사이 좋은 평화로운 그곳, 광명(光明)과 정대(正大)와 화합(和合)의 그 절대적인 자리에다 우리의 목숨을 돌이켜 놓는다. 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