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들이 우리 지역에 오셔서 너무 너무 감사합니다. 부처님 설법이 2700년 전에 있었지만 오늘날 생생히 들리는 듯합니다. 이곳에서 3km 걸어가면 있는 로히니 강은 물 때문에 콜리야족(콜리족)과 샤키야족(석가족)이 싸웠을 때 부처님께서 설법하셔서 화해시키신 곳입니다. 부처님께서 해결 방법으로 제시하신 것은 바로 대화입니다. 우리는 그 가르침을 배워 화합할 것입니다.” - 무하마드 자심 치안판사힌두교도와 이슬람교도, 그리고 불교도들이 공존하는 곳, 부처님께서 석가족과 콜리족을 화합시킨 마을에서 부처님 가르침에 따른 화합의 장이 마
이국땅에 불법을 전하기위해 원력을 세운 전법자들은 수많은 난관을 뚫어야 했다. 관습과 제도, 낯선 이에 대한 냉대는 물론 각종 박해에도 맞서야 했다. 무엇보다 가장 큰 장애는 이교도의 공격이었다. 2500여년이 지난 지금, 불교는 세계종교가 되었지만, 부처님 당시에는 신흥종교였으며, 수많은 이교도의 냉대 속에 순교의 정신 없이는 전법 포교가 불가능했다.상월결사 인도순례단은 3월 12일 하르푸르부터 지역거점도시인 마하라즈간지를 거쳐 네팔 국경 근처인 브렛터와까지 26km를 행선했다.이날 순례단이 거쳐간 마하라즈간지(Maharajgan
인도의 불교 성지 순례는 보통 8대 성지를 중심으로 이뤄진다. 북인도 우타르프라데시주(UP주)와 비하르주, 네팔에 흩어진 이들 성지를 순례하는 것은 큰 공덕으로 여겨졌다. 룸비니와 보드가야 등 아소카 석주에서 보는 것처럼 아소카 왕이 순례한 기록도 있다.이중 부처님의 탄생지 룸비니, 정각지 보드가야, 초전법륜지 사르나트, 열반지 쿠시나가르를 특히 4대 성지라고 하며, 기원정사가 있는 쉬라바스티, 부처님이 즐겨찾은 바이샬리, 마가다국의 수도로 죽림정사가 있는 라지기르, 그리고 도리천을 방문하고 어머니 마야데비에게 불법을 설한 후 다시
길 위에서 탄생하시고, 길 위에서 깨달으시고, 길 위에서 가르침을 펴시고, 길 위에서 열반에 드신 부처님. 부처님의 길을 따라 걷는 상월결사 인도순례단(회주 자승)이 인도 부처님 길 위에서 불교 중흥의 원력을 담은 108원력문 초안을 공개했다.대중 속으로 적극적으로 나서는 상월결사 정신을 담아 전법과 포교의 원력을 담은 108원력문으로 참회 일변도 였던 기존 108참회문을 대체하여 향후 불교 대표 기도문으로 사용될 것으로 보인다.상월결사 인도순례단(회주 자승)은 3월 10일 부처님 열반지인 쿠시나가르와 부처님 탄생지인 룸비니의 사이
부처님 열반지인 쿠시나가르부터 부처님 탄생지인 룸비니까지 인도와 네팔의 접경지역으로 향하는 순례의 여정은 순례단에게 많은 것을 시사했다. 열반지에서 다시 탄생지로 가는 여정은 부처님이 직접적으로 걸은 기록이 남겨져 있지는 않지만, 그 가르침이 널리 퍼졌던 이 곳을 걷는 것 만으로도 순례단에는 큰 의미로 다가왔다.이날 순례단은 쿠시나가르를 출발하여 세마라까지 약 28km를 행선했다. 열반당과 다비장 사이의 잘 닦인 길부터 마을과 마을을 잇는 울퉁불퉁한 비포장길, 한사람이 겨우 지나갈 만큼의 제방길까지 다양한 길을 걸으며 2500년 전
부처님께서 완전한 열반에 오른 쿠시나가르에서 순례단은 다시 한번 불제자로 불교중흥의 발원을 하며 의지를 다졌다. 뭇 중생에게 행복의 가르침을 전하고 열반하신 부처님께 순례단은 어떠한 물질적인 공양보다 중요한 불제자로서 그 길을 따라 행복을 전하겠다는 마음을 올렸다.상월결사 인도순례단(회주 자승)은 3월 9일 쿠시나가르 열반당에서 열반지 대법회를 봉행했다. 부처님 발자취를 따라 인도순례길에 오른지 29일차, 누적거리 총 689km, 인도 현지의 열악한 상황 속에서 결코 쉽지 않은 길이지만 순례단의 마음은 어느 때보다 환희로움으로 가득
‘가자, 쿠시나가로!’ 카쿠타 강에서 목욕을 하고, 춘다를 위로한 부처님은 쿠시나가르로 향하며 이렇게 말하셨다. 늙고 병든 몸이지만 대중의 앞에 서서 당당히 걸어가신 모습으로 부처님은 그렇게 걸으셨다. 낡은 수레와 같았다, 혹은 사자와 같이 당당했다는 인간붓다 그 자체, 부처님을 닮아가는 순례단도 그와 같이 걸었다.인도 순례 중후반부를 부처님 열반길을 따라 걷는 상월결사 인도순례단(회주 자승)은 3월 8일 부처님께서 열반을 향해 걸은 마지막 길을 따라 걸었다. 약 30여일간 쌓인 피로도, 아픈 몸도 순례단의 걸음을 멈출 수는 없었다
상월결사 인도순례단(회주 자승)은 3월 7일 27일차 순례를 진행했다. 비하르주 두바울리야를 출발하여 마다착, 마쵸아 비하르커드를 거쳐 다시 우타르프라데시주(유피주)로 들어와 쿠시나가르 권역의 삐뻐라까낙까지 24km를 행선했다.이날 삐뻐라까낙에서 춘다의 공양이 이뤄진 춘다마을 파질나가르까지는 4km 남짓 떨어진 곳, 순례단은 열반의 여정에서 일어난 공양의 의미를 화두로 정진했다.보드가야 파트나 바이샬리 등이 있는 비하르주를 벗어나 유피주 접경에 들어서자 마을주민들이 나와 북과 트럼펫을 불고, 꽃공양을 올리며 순례단을 환영했다. 공양
쿠시나가르에 도착하여 반열반에 드시던 날 부처님의 몸은 황금색 가사보다 더 빛났다. 부처님은 강에서 목욕하시고 사라수 두 그루 사이, 북쪽으로 머리를 둔 채 침상 위에 발과 발을 포개고 오른쪽 옆구리를 붙여 사자처럼 누우셨다. 마지막 유훈을 남기신 부처님이 반열반에 드시니 이때가 바이샤카(Vaisakha) 2월 보름날 밤이다.음력 2월 15일인 3월 6일, 열반재일을 맞은 상월결사 인도순례단(회주 자승)은 부처님 열반 후 사부대중이 열반회를 열었던 것처럼 사부대중이 함께 정진했다. 이날 행선은 고팔간지부터 칼라스쿨와, 쉬브라지푸르,
부처님은 한 평생을 일관되게 깨달음의 길을 전하신 길 위의 스승이셨다. 부처님은 깨달음을 얻은 여래라 할지라도 육체를 타고난 중생이라면 누구나 피할 수 없는 죽음을 맞이해야 했다. 마지막 하안거 장소인 바이샬리에서 부처님은 열반이 가까이 왔음을 알리시고, 수구초심(首丘初心)으로 고향 쪽을 향해 길을 떠난다.상월결사 인도순례단(회주 자승)은 3월 5일 사다우아에서 고팔간지까지 약 24km를 이 수구초심의 마음으로 걸었다. 고팔간지는 부처님 열반지인 쿠시나가르까지는 약 72km 떨어진 곳이다.부처님께서 열반으로 나아간 길, 근본으로 돌
상월결사 인도순례단(회주 자승) 43일 여정의 반결제에 따라 순례단의 모습을 사진으로 전한다. 3편에서는 인도순례단 석보원 기록원의 도움으로 순례단과 인도의 불심을 느낄 수 있는 그들의 모습을 함께 담았다.한편, 상월결사 인도순례단은 3월 4일 케사리야 대탑을 바라보며 행선을 시작하여, 후새니, 두마리아, 카라스카트를 거쳐 사다우아까지 총 26km를 행선했다. 부처님께서 열반의 여정을 따라온 랏차비족을 위해 발우를 띄워 전한 칸타키강을 건너 마을과 마을을 다니며 불심을 전했다. 부처님의 열반길을 따르는 순례단은 3월 8일 열반지인
상월결사 인도순례단(회주 자승)이 3월 1일 전체 43일의 일정 중 반결제를 맞았다. 이에 23일간의 순례단의 모습을 사진으로 전한다. 총 3일동안 전할 ‘사진으로 보는 순례’ 속에는 주요 스님들 뿐만 아니라 순례단 구성원의 다양한 모습을 전할 예정이다.2편에서는 2월 23일 보드가야부터 3월 3일 케사리아 대탑까지의 여정 중 이른바 인터넷 뉴스와 지면 뉴스에 싣지 못한 B컷에 해당하는 순례단의 이모저모를 담았다. 2월 23일 – 전정각산서 부처님 장엄하다 *B컷인 관계로 주요 내용 및 사진은 해당일자 기사를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상월결사 인도순례단(회주 자승)이 3월 1일 전체 43일의 일정 중 반결제를 맞았다. 이에 21일간의 순례단의 모습을 사진으로 전한다. 총 3일동안 전할 '사진으로 보는 순례' 속에는 주요 스님들 뿐만 아니라 순례단 구성원의 다양한 모습을 전할 예정이다.1편에서는 2월 9일부터 2월 22일 보드가야까지의 여정 중 이른바 인터넷 뉴스와 지면 뉴스에 싣지 못한 B컷에 해당하는 순례단의 이모저모를 담았다. 2월 9일 B컷 - 수많은 불자들의 응원 속 고불식 *B컷인 관계로 주요 내용 및 사진은 해당일자 기사를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2월
부처님께서는 마지막 안거를 위해 바이샬리 인근의 벨루와라는 마을로 가셨다. 대나무숲이라는 뜻으로 우리말로 죽림촌이라 불리는 이곳에서 부처님은 마지막 안거를 보내셨다. 안거가 끝나자 부처님은 바이샬리에 있던 대중들을 모아 놓고 ‘3개월 후 열반에 들리라’고 선언하시며 그 자리에서 계정혜 삼학을 닦을 것을 당부하고,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는 ‘자등명 법등명’(自燈明 法燈明)을 설하셨다.부처님의 후대를 위한 가르침이 절실히 새겨진 곳, 부처님이 위대한 열반의 여정 중 가장 중요한 곳, ‘바이샬리’에 상월결사 인도순례단이 당도했다.상월결사
부처님은 함께 행복해지는 삶을 참구하여 스스로 깨달음을 얻고, 평생 동안 다른 이들도 괴로움이 없는 삶을 살도록 안내하는 역할을 했다. 많은 이들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고 어리석음을 깨쳐서 자유와 행복을 누렸다.부처님이 걸은 길을 따라 함께 정진하고 있는 상월결사 인도순례단(회주 자승)이 2월 28일 부처님 열반의 길을 따라 이 파탈리푸트라, 아소카왕의 수도로 불리는 ‘파트나’에 도착했다. 갠지스 강변의 파트나는 총 11km에 달하는 파트나 간디교를 건너야 진입할 수 있다. 이날 순례단은 평일 수많은 차량으로 인하여 일부 구간 차량
대장정 중반부에 접어든 상월결사 인도순례, 한때 70여 명이 치료받을 만큼 엄중한 상황도 있었지만, 그 고비를 넘어 후반부로 향하고 있다. 수많은 한국 불자들의 관심과 애정 때문일까. 상월결사 인도순례단(회주 자승)이 2월 27일 기자간담회를 열고 의료 현황과 순례단의 의지를 전했다.이날 기자간담회에서 김명숙 운영지원단 의료팀장은 “초기 물집과 관절염, 장염 등으로 6~70여 명이 치료를 받았지만 현재는 30여 건 수준으로 치료건수가 감소한 상태”라며 “장기간의 순례 일정으로 인하여 기초체력 저하로 인한 회복이 우려되지만 의료팀이
부처님은 삼계의 모든 중생을 인도하여 가르치신 위대한 스승이지만, 태어나면서의 삶이 그렇지는 않았다. 전륜성왕의 길과 출가자의 길에서 부처님은 출가를 택했고 이후 성도하니 출가한 순간의 의미가 그만큼 크다고 볼 수 있다.그 중요한 의미만큼 부처님의 길을 따라 걷는 상월결사 인도순례단이 출가재일을 맞이하는 마음가짐은 남달랐다. 특히 순례단의 스승인 회주 자승 스님의 경책과 격려로 좀 더 특별한 출가재일을 맞이했다.회주 자승 스님은 2월 26일 저녁예불 후 다시 대중 앞에 섰다. 회주 스님이 순례단 대중 앞에서 대중생활의 주요한 대소사
지혜의 상징인 ‘연꽃이 있는 곳’의 나란타(那爛陀)로 음사되는 인도 날란다대학은 불교학의 중심지로 불교를 공부하는 이들에게는 꿈의 장소였다. 수많은 구법승들이 이 곳을 향해 길을 떠났고, 현장 스님도 마찬가지였다. 를 지은 현장 스님(602∼664)은 천산북로를 이용해 3년을 걸어 인도 날란다대학에 도착했다. 현장 스님의 목숨을 건 구법(求法)행 결과 중 하나인 로 인하여 정글에 묻혀 잊혀진 날란다대학은 후대에 발굴된다.5세기부터 12세기까지 700년이 넘는 오랜 기간 수천명의 승려와 학자 등 1만여 명이
‘부처님께서 영축산 설법단에 오르시자 1250 비구승가가 자리를 잡았다. 천상의 보살과 신장들까지 내려와 모여 들었으니 그야말로 장엄함을 이루었다.’부처님께서 법을 설하신 영축산은 신령함과 장엄함으로 불전에 전해진다. 수없이 많음을 의미하는 1250명으로 묘사된 비구스님의 수만 하더라도 그 당시의 장엄함이 느껴진다. 수많은 경전에서 부처님께서 설하셨다고 말하는 그곳에 순례단이 당도했다.상월결사 인도순례단(회주 자승)이 2월 25일 법왕의 도시라 불렸던 마가다국의 수도 라지기르에서 불교 중흥을 위한 전법 포교를 다짐, 또 다짐했다.이
부처님께서 카사파 형제를 비롯한 천명의 비구와 더불어 마가다국의 수도 라즈기르로 걸은 길, 상월결사 인도순례단(회주 자승)은 2월 24일 그 길을 걸었다.보드가야에서 깨달음을 이룬 부처님은 사르나트로 이동해 다섯 비구를 교화 후 전도선언 후 자신도 출가 직후 6년간 고행 한 우루벨라로 향했다. 이 곳에서 카사파 형제와 그를 따르던 1000명의 귀의를 받는 일대 사건을 일으킨다.빔비사라왕의 요청에 의해 가사를 입은 수많은 수행자들이 라즈기르로 향하는 광경은 당시에 참으로 신성하고 감동적인 것으로 전해진다. 그 모습에 수많은 이들이 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