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사·초의 1815년 학림암서 만나 평생 거쳐 벗으로, 도반으로 지내 불교사상·예술 등 걸쳐 서로 영향 추사 유배길, 초의가 직접 배웅도 유배 당시 추사 차와 불교에 천착 얻은 기쁨 편지 보내 조선 후기는 성리학이 주도했던 시기로 신분제도도 엄격했다. 이런 때에 유학자와 승려의 교유를 가장 활발하게 남긴 인물은 추사와 초의이다. 이미 알려진 바와 같이 이들은 1815년 겨울 학림암에서 만나 평생을 교우했다. 특히 추사는 첫 만남에서 초의와의 숙연(宿緣)을 짐작했던 지. 가까운 자신의 벗들을 초의에게 소개해 주었다. 1815년 10월 27일에 쓴 초의의 편지엔 이들과의 해후를 이렇게 드러냈다.? 하물며 정벽(유최진)선생께서는 화권(畵卷)을 주시고 형암(김훈)선생께서는 비를 무릅쓰고 찾
조선시대는 흔히 숭유억불(崇儒抑佛)의 시대로 잘 알려져 있다. 정치 이데올로기를 ‘유교’로 삼은 조선은 사대문 안에 승려가 출입할 수 없도록 만들기까지 했다. 그럼에도 승려는 당시 유학자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지식인이자 교양인이었다. 그래서 유교와 불교를 넘어 서로의 학문과 사상을 교류했던 유학자와 스님들은 상당수다. 본지는 억불의 시대 조선에서 불교를 만나 혜안을 넓히고 유·불의 지평을 키웠던 유학자들을 정리한다. ?〈편집자 주〉 불교·금석학 등에 밝았던 유학자 초의 스님과 차·불경 담론한 지음 옹방강·소동파 ‘친불’에 영향 해붕 스님과의 법거량서도 드러나 〈금강경〉 空 사상의 일견 보여줘 학림암, 상경 승려 거점사찰 역할 추사 김정희(1786~1856)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