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 학생들을 데리고 답사를 가곤했던 일본사찰에는 콜라나 녹차, 생수 등을 꺼내 먹을 수 있는 자동판매기가 있었는데, 이 물건이 그때는 꽤나 신기해보였다. 더운 여름 땀을 흘리면서 이리저리 조사를 하고 사진을 찍다가 자동판매기에서 시원한 녹차 하나를 꺼내 먹는 맛은 그야말로 일품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 후 꽤나 시간이 흐른 뒤, 우리나라 사찰에도 이러한 자동판매기가 도입되어 불자들에게 선을 보였다. 일본처럼 일상화되고 많은 이들에게 사랑을 받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음료가 필요한 불자들에게는 이 자동판매기가 여간 고마운 존재가 아닐 수 없었다. 그런데 이 자동판매기는 전기로 작동을 하는 것이기 때문에 비가 오고 눈이 오면 여러 가지 고장이 나고 작동을 멈추는 것이 문제였다. 일본사찰에서는 이 문제를 해
댓돌 위에 가지런히 벗어 놓은 하얀 고무신을 보면 그 절에 사는 스님들의 모습을 대번에 알 수가 있다. 스님도 스님이지만 절 살림을 사는 보살님이나 거사님들의 성격까지도 한눈에 들여다 볼 수가 있다. 신발 벗어놓은 모습이 뭐 그리 대단한 것이냐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작은 것 하나가 살림살이 전체를 드러내 보일 수밖에 없으니 작은 것이라고 해서 어찌 소홀히 생각할 수가 있겠는가! 예전처럼 절에 불자들이 많지 않고 절집에서 담당하는 기능이 다양하지 않았던 때에는 법당에 많은 사람들이 모일 기회가 드물었기 때문에 문밖에 벗어놓은 신발 한 두개가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요즘처럼 법당에서 사시사철 다양한 법회가 열리고, 많은 불자들이 끊임없이 자기 수행이나 기도에 참여하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법당에 출입하
최근에 눈치우기가 사회적 이슈가 되고 있다. 예년에 비해서 많은 눈이 내린 올 겨울, 눈을 치우지 않아 도로가 빙판이 되는 바람에 차량사고는 물론 보행자들이 미끄러지면서 발생한 다양한 사고들이 줄을 이었다고 한다. 눈은 우리들에게 여러 가지 즐거운 추억을 만들어준 선물이었다. 어린 시절 밤새 내린 눈을 보고 마음이 들떠 아침밥도 먹지 않고 동네를 서성이던 추억, 동네 꼬마친구들과 눈사람을 만드느라 시간가는 줄도 모르고 즐거워했던 추억, 눈 내리는 거리를 연인과 팔짱을 끼고 하염없이 걸었던 추억, 창밖으로 내리는 눈을 보며 친구나 사랑하는 연인에게 편지를 쓰던 추억… 등등. 그러나 도시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이제 눈이 즐거운 추억을 만들어주는 선물이라기보다는 출근길을 걱정하게 만드는 원인이요, 잘못해서 낙상
장승은 나무나 돌로 만든 기둥의 윗면에 신이나 장군의 얼굴을 새기는 일종의 신상이다. 사찰에서도 들어가는 입구에 장승을 만들어 세웠는데, 그 전통은 신라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사찰에서 볼 수 있는 장승의 유형을 보면 비보나 방위표의 기능을 가진 장생표(長生標)가 있고, 청정법역 수호의 기능을 가진 호법장생(護法長)이 있다. 초기에 만들어 세운 호법장승에는 방생정계(放生定界), 호법선신(護法善神), 가람선신(伽藍善神) 등과 같이 경내의 청정함이나 사찰수호를 염원하는 명문이 새겨졌다. 이후 점차 상원주장군(上元周將軍), 하원주장군(下元周將軍) 등과 같이 중국의 장군이름이나 금귀대장(禁鬼大將) 등과 같이 벽사에 관련된 명문을 새겨 넣었다. 이러한 호법장생들은 시간이 갈수록 불법수호라는 고유의 기능으로부터
세모(歲暮)가 되면 어려운 이웃을 돕기 위한 온정의 손길이 있어 마음이 훈훈해진다. 자선냄비에 조그마한 정성이라도 보태려는 사람들이 줄을 서는 것을 보면 아직도 우리들 마음속에는 나보다 살기 각박한 사람들의 삶을 걱정하는 자비로운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 불교에서의 보시는 부처님이 살아계시던 때부터 있어왔다. 죽림정사를 지어 공양한 빔비사라왕이나 기원정사를 보시한 수닷따 장자는 보시를 실천한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이렇게 큰 재물을 보시하여 부처님이 안락하게 수행할 수 있고, 많은 제자들에게 법을 전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드린 부자들도 있었지만 가난한 이들은 자기의 분수에 맞게 부처님께 보시를 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의 머리카락을 팔아 부처님께 아주 작은 촛불을 공양함으로써 부처님
예로부터 사찰의 불사는 과학, 기술, 예술을 총망라하는 종합적인 접근을 통해서 이루어졌다. 당해 시대에 살았던 최고의 전문가들에게 불사를 맡김으로써 그 시대의 가장 대표적인 작품을 만들어냈던 것이다. 그 결과 우리나라 사찰은 세계 어느 나라의 사찰들과 비교해도 결코 뒤지지 않는 작품성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은 불사를 담당한 이들의 뛰어난 기술력과 예술성에 기인하는 것이겠지만 불사의 주관자인 스님들과 불사를 후원했던 신도들의 지극한 기도와 정성 또한 결정적인 작용을 하였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불사는 교단을 구성하는 불법승 삼보를 모시기 위한 것이므로 불자들에게는 더없이 중요하고 귀중한 일이다. 따라서 불사를 담당하는 기술자나 예술가들은 돌 하나 놓고 절 한번 하고, 기둥 하나 세우고 절 한번 하고,
사찰하면 떠오르는 것은 무엇일까? 마당을 지키는 탑, 법당 안에 모셔진 불상, 부처님의 말씀을 담고 있는 경전, 눈이 맑고 단정한 스님, 스님이나 신도들이 들고 있는 108염주, 스님들의 묘탑인 부도, 마당에서 불을 밝히는 석등, 골기와를 씌운 건물들, 길에 연달아 서있는 문, 연꽃이 가득 핀 연지 등이 생각날 것이다. 이렇게 사찰하면 기억되는 것들은 하나같이 불교를 표상하는 상징물들이다. 이러한 상징물들은 불교가 교단을 이루고 사찰이 지어지면서부터 존재해온 것들로 지역에 따라서는 요소별로 조금씩 다르게 표현되는 것들도 있지만 부처님의 말씀을 물상(物像)으로 표현한다는 측면에서 보면 근본은 다르지 않다. 이러한 불교적 상징물들의 특징은 우리들에게 친근하게 여겨질 뿐만 아니라 예측 가능한 장소성을 가진다.
오래된 절에 가보면 그 사찰이 들어서기에 꼭 맞는 터를 잡은 다음 그 터에 어울리도록 건물을 배치하고 마당을 조성하여 터가 가진 수용능력의 범위 안에서 불사가 이루어진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야말로 생태적으로 건강한 환경을 조성한 것이다. 현대로 오면서 오랜 역사를 가진 전통사찰이 직면한 다양한 요구 가운데에서 해결하기가 가장 어려운 것이 신도들이 원하는 기능을 담을 수 있는 새로운 공간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달리 방법이 없으니 사찰에서는 어쩔 수 없이 오랫동안 숙명처럼 지켜온 사역의 범위를 넘어서는 불사를 할 수밖에 없고, 그러한 불사는 사찰 내·외부의 자연환경을 파괴하여 건강하지 않은 사찰환경을 만드는 문제점을 낳고야만다. 어쩔 수 없는 경우도 있겠지만 사세를 과시하고 다양한 기능을 수용함으로써 경쟁
신도들이 많아지고 사회적으로 다양한 요구가 발생하면서 현대의 사찰은 점차 대형화, 복합화하는 경향을 보이게 된다. 예전의 사찰이 수행하고 기도하는 단순한 기능을 가졌다면, 오늘날의 사찰은 신도들에게 다양한 종교적 기능을 제공하는 것은 물론 종교 이외의 기능까지도 베풀어야 하는 복합적 기능을 수행해야만 한다. 그러다보니 산에 자리 잡은 현대의 전통사찰은 항상 공간부족현상에 시달릴 수밖에 없다. 이러한 공간부족현상을 해결하는 길은 건물을 더 짓는 것 말고는 달리 방법이 없다. 그러나 사찰의 공간적 범위는 제한되어 있고, 전통사찰의 경우 대부분의 사찰이 문화재를 보유하고 있기 때문에 문화재현상변경허가를 받아야 하는 법적, 제도적 구속을 받아야 한다. 더구나 전통사찰은 이미 구조적 틀이 완성되어 있기 때문에 이것
? 우리나라 사찰에는 침계루(枕溪樓)라고 이름 붙여진 건물이 여러 곳에 있다. 그중에서도 순천 송광사, 해남 대흥사, 울산 석남사의 침계루는 건물도 좋은데다 자리 잡은 곳이 특별하여 단연 돋보인다. 침계루라는 이름은 계류를 베고 누운 건물이라는 뜻이니 계류에 바짝 붙여 지었을 터이고 그런 까닭에 이 건물에서 하룻밤 묵는 경우에는 밤새도록 흐르는 물소리를 들을 수 있다. 적막한 밤에 침계루에서 듣는 물소리는 가히 환상적이다. 우리나라 사찰은 대부분 높은 산, 깊은 골에 자리 잡은 까닭에 물과 친숙한 장소성을 갖는 것이 일반적이다. 예전에는 이 물이 지극히 청정하여 식수로 사용해도 문제가 없을 정도였다. 목욕시설이 변변치 못했던 그 옛날 사역을 휘감고 흐르는 계류는 스님들이 몸을 씻는
? 사하촌은 사찰에 필요한 물자를 공급하기 위해 만들어진 독특한 형식의 마을이었다. 이 마을은 불교국가에서 사찰의 존재와 더불어 형성된 집단공동체인데, 사찰과 사하촌은 상생의 관계를 유지하며 존재해왔다. 사하촌 사람들은 스님들이나 절집에 사는 사람들의 의식주를 책임졌고, 사찰에서는 이들에게 소정의 사례를 지불함으로써 그들의 생활이 유지될 수 있도록 도왔다. 현대사회로 오면서 교통수단이 좋아지고 생활권이 광역화되는 바람에 사하촌이라는 개념은 이미 없어져 버린 지 오래되었다. 그래도 공간적으로는 절 아랫마을이 여전히 존재하고 있는데, 이곳은 예전처럼 사찰에 필요한 물자를 공급하는 상생적 구조가 아니라 사찰을 찾는 사람들에게 다양한 서비스를 제공하고 경제적 이익을 취하는 구조로 변화되었다
야외기도공간은 아주 오랜 옛날부터 있어왔다. 인도나 스리랑카는 물론 동남아시아의 여러 나라를 가보면 야외기도공간이 많고 그곳에서 기도에 몰입한 불자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에도 예외는 아니다. 경주 남산에는 마애불을 조성하고 야외기도공간을 조성한 사례가 아주 많다. 이러한 야외기도공간은 최근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신라시대부터 있어 온 것이니 불가에서는 예로부터 실내는 물론 야외에서도 다양한 신앙생활을 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최근 대학입학을 위한 수학능력시험을 앞두고 우리나라 온 사찰이 들썩들썩하다. 자식들의 무사합격을 기원하는 부모들이 절마다 넘쳐난다. 특히 오래되고 영험이 있다고 소문난 부처님이 상주하시는 야외기도공간에는 기도하러 온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룬다. 사람이 많아서 설
석굴암의 세계문화유산적 가치는 본존불의 조형미나 좌향의 의미에서 찾을 수도 있겠지만 석굴을 축조한 재료나 조각을 위해 사용한 석재가 주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다는 점 때문이기도 하다. 주변과의 조화가 석굴암의 조형적 가치를 크게 높일 수 있었다는 뜻이다. 기술적 제한이 있기도 했겠지만 오래전에 만들어진 건물이나 조형물의 재료는 가까이에서 구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먼 곳에서부터 운반해온 재료는 질감이나 색채가 주변의 그것과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이질적이 되어 좋은 작품을 만들기가 어려워진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사찰경관은 다양한 요소로 구성된다. 특히 돌을 사용해서 만든 요소가 많은데, 석단, 계단, 화계, 다리 등이 바로 그것이다. 이러한 돌요소들은 주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돌을 재료로 사용하는 경
사찰의 못은 두 가지 목적을 가지고 만들어진다. 하나는 불교의 상징인 연을 심어 연꽃을 피우기 위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불교에서 존숭의 대상으로 삼는 탑, 불상 그리고 산의 그림자를 비치기 위한 것이다. 앞에서 말한 못을 연지(蓮池)라 하고 뒤에서 말한 못은 영지(影池)라고 부른다. 우리나라 사찰의 못은 불교가 도입되면서 함께 만들어진 것으로 보고 있다. 불교도입초기에 지어진 사찰에서 발굴조사된 못이 그것을 증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발굴조사결과를 토대로 살펴볼 때, 우리나라 사찰의 못은 인도나 중국사찰의 못과 양식적으로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나라 사찰의 못에서 발견되는 가장 큰 특징은 호안석축이다. 호안석축은 대체로 주변에서 구하기 쉬운 자연석을 잘 다듬어 층층이 쌓아올리는 형식을
예부터 우리나라에서는 신분이나 계급, 가문의 촌수 또는 연령에 따라 위와 아래가 엄격히 구분되었고, 그것을 통해서 조화로운 질서를 구현하였다. 이러한 계층적 질서의 구현은 사회적인 현상뿐만이 아니라 건축공간에서도 예외 없이 나타나는 것이었다. 사찰에서 주불전의 공간규모를 다른 건물에 비해서 크게 한다든지, 주불전을 가장 높은 곳 혹은 가장 중심이 되는 곳에 짓는다든지, 주불전의 장식성을 다른 불전과 차별화한다든지 하는 것이 바로 사찰에서 계층적 질서를 구현하는 방법이었다. 최근에 들어 사찰에서 이러한 계층적 질서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건물을 앉히거나, 부불전이나 부속건물을 주불전보다 크게 짓거나, 지나치게 화려하게 장식하여 지금까지 우리 사찰에서 지켜온 계층적 질서가 교란되는 경우가 생기고 있다
신라 말 이후 우리나라 사찰은 산간벽지에 지어지는 것이 일반적인 경향이었다. 화엄십찰의 건립과 더불어 구산선문이 열리면서 교리를 실천하고 선 수행에 적합한 땅을 찾은 결과였다. 이왕이면 다홍치마라고 산속에 자리를 잡을 바에는 경관이 빼어난 곳이 더 좋았으리라. 이른바 풍수적으로 물 좋고 바람 막기 좋은 곳이 바로 그러한 땅이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경사가 급한 산지에 절을 짓기 위해서는 땅을 골라 평평하게 하는 것이 기본적인 조건이다. 우리나라에서는 부지정지를 할 때 서양과는 달리, 절토보다는 성토를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가능하면 원생의 땅을 건드리지 않으려는 생각 때문이었다. 성토를 하기위해서는 석단이 축조되어야하는데, 이 석단이야말로 우리나라 사찰의 수직적 경관요소로서 매우 중요하게 취급된 구
고색창연하다는 말은 오래되어 예스러운 풍치나 그윽한 분위기를 말할 때 쓰인다. 오래된 사찰의 경관을 설명하는데 그럴 수 없이 잘 어울리는 말이다. 법당의 퇴색한 기둥, 마당에서 모진 세월을 꿋꿋이 견뎌온 오래된 석탑, 칠이 보기 좋게 벗겨져 고풍스러움을 드러낸 법당의 벽체... 이러한 것들이야말로 우리 사찰의 고색창연한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귀한 요소들이다. 불교가 이 땅에 뿌리 내린지 1600여년이 흘렀건만 우리 사찰의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요소들은 특별한 변화 없이 잘 전승되고 있다. 불교적 상징성과 이미지를 보여주는데 더할 나위 없이 잘 들어맞기 때문일 것이다. 현대로 오면서 우리 사찰에도 많은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특히 재료의 변화는 매우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현상이다. 골기와를 얹은 전통건축물이
어느 날 영산회상에서 범왕이 석가모니 부처님께 설법을 청하며 연꽃을 바치자, 석존께서 연꽃을 들어 대중들에게 보이셨다. 그 자리에 참석한 많은 사람들 가운데 이 뜻을 아는 사람이 없었으나, 오직 가섭만이 석존의 뜻을 깨닫고 빙긋이 미소를 지어보였으니 이것이 바로 염화시중의 미소이다. ? 부처님이 탄생하시기 이전부터 인도에서는 연꽃이 많은 사람으로부터 사랑을 받아왔다고 한다. 연꽃의 원산지가 인도인지라 아주 오래전부터 보아왔던 꽃이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왕성하게 자라고 환경이 열악한 곳에서도 꽃을 피우는 생태적 특성을 좋아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불교교단이 성립되면서 연꽃은 불교의 상징적인 꽃으로 자리를 잡게 된다. 그것의 청정성 때문이었다. ? 우리나라에 연꽃이 언제 도입되었는지에 대한 분명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