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학은 사회와 우주의 광범위한 진리를 터득해 그 법대로 살아가는 것 대중과 함께 불법을 실천해 안락에 이르는 생활을 해나가자 ? 수행은 신(信)이 근본이며 이 속에 모든 과정이 다 들어있다. 신을 떠나서 주(住)도 행(行)도 회향(廻向), 지(地)도 있을 수 없다. 믿음을 알뜰한 것, 신리실유(信理實有)고 노력하면 얻어지는 것, 노력을 하여 얻어진 경우엔 무궁한 공덕이 있다는 이것은 바로 묘각(妙覺)의 지경이다. 그러므로 신(信)에서 신실(信實)한 지경에서 모든 것을 다 본다. 이는 화엄경(華嚴經)에 있는 바와 같이 신위도원공덕모(信爲道源功德母)다. 신은 도의 근원이고 공덕의 모다. 모든 일을 성취시키는 근원의 힘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의 지경에서 우리는 부처님을 믿는다. 신, 믿음이란
南無至心歸命禮西方阿彌陀佛(一拜) 隨喜懺悔諸善根 廻向衆生及佛道 我隨一切如來學 脩習普賢圓滿行 勸脩淸淨波羅蜜 恒不忘先菩提心 滅除障垢無有餘 一切妙行皆成就 原共諸衆生往生安樂國 ? 상수불학(常隨佛學)은 세 가지의 각기 뉘앙스가 다른 말로 풀이된다. ① 항상 부처님의 학문을 따라 배운다. ② 항상 부처님을 따라서 배운다. ③ 항상 깨친, 어진 이를 따라서 배운다. 앞에서 우리가 수희공덕(隨喜功德)을 배우고 참제업장(懺除業障)을 하고 그런 것이 모두 결국에는 무엇을 이룩함이냐 하면 그것은 우리들로 하여금 중생과 전 인류가 달성해야 할 부처님의 과업을 위하여 그 도(道)를 성취토록 하기 위해서다. 이렇게 하는데는 우리가 모든 여래를 따라서 배워야 하고 또 모든 여래의 학문을 따라야 한다. (我隨一切如來學) 그
진리의 아름다운 수레바퀴를 굴려 말씀을 들려주시고 한량없는 광명 베풀어 주시니 삼라만상이 오늘 제 자리에서 뚜렷이 미묘한 모습으로 보인다 ? ?⑥ 청전법륜(請轉法輪) ?南無至心歸命禮西方阿彌陀佛佛(一拜) 十方所有世間燈 最初成就菩提者 我令一切皆勸請 轉於無上妙法輪 親觀如來無量光 現前授我菩提記 蒙彼如來授記巳 化身無數百俱祗 願共諸衆生往生安樂國 ? 전법륜(轉法輪)을 청한다. 즉 진리의 수레바퀴를 굴러 주십시오 하고 우리들이 여래께 청을 드린다는 뜻 이를테면 우리들에게 좋은 말씀을 일러 주십시오, 하는 뜻이다. 권해서 청한다는 권청(勸請)이라는 말이 있다. 이것도 우리에게 좋은 말씀을 일러 주십시오 하고 청한다는 것이다. 이 권청은 방법장(訪法障)을 제거한다. 방법장은 법(法), 진리를 비방
남의 좋은 일 착한 일 보고 기뻐하는 것이 수희공덕 질투심이란 동물의 야욕과 야수의 발로로 자연스런 본능 허나 이는 망상과 다르지 않다 공명·협력, 공덕을 수희해야 복지구가로 인류평화에 기여 ? 南無至心歸命禮西方阿彌陀佛佛(一拜) 六方如來舒舌證 專稱名號至西方 到彼華開聞妙法 十地願行自然彰 十方一切諸衆生 二乘有學及無學 一切如來與菩薩 所有功德皆隨喜 願共諸衆生往生安樂國 ? 참회와 반성을 하게 되면 다음에는 남의 덕의 좋은 것을 잘 알게 된다. 그 덕을 알아보고, 이를 기뻐하고, 나는 아직 못할망정 그는 위대한 덕행(德行)을 닦는다, 얼마나 거룩한 일이냐, 하는 것을 수희공덕(隨喜功德)이라고 한다. 수희(隨喜)는 남의 좋은 일, 착한 일을 보고 기뻐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지
이변 여의고 중도 얻은 뒤 자재로운 해탈에 들어간다 해탈이란 자유로운 행동이다. 속박과 번뇌에서 벗어나 죄·업장 뒤따르지 않으면 자유라 부른다 ? ?南無至心歸命禮西方阿彌陀佛佛(一拜) 彌陀身色如金山 相好光明照十方 唯有念佛蒙光攝 富知本願最爲强 四句三聚戒圓滿 六意五修爲成辨 遠離二邊滅諸罪 等?一味遊方外 願共諸衆生往生安樂國 ? 업장(業障)을, 자기가 한 짓을 참제(懺除)한다. 이것은 중대한 일이며 육시행원 예참문의 예참(禮懺)에 해당하는 대목이다. 사람은 자기가 한 짓에 얽매이고 장애(障碍)가 되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수가 많다. 업장을 참회하고 제거(除去)해 버리는 사람은 대장부(大丈夫)요, 용단 있는 사람이라고 할 것이다. ‘부처님의 몸은 금빛이다(彌陀身色如金山)’ 하였는
시자·수자·공양물 즉 삼륜은 청정해야 하며 정성껏 성의를 다해야 한다. 봉사 역시 공양을 의미 공양 통해 평안에 이른다. ? ?南無至心歸命禮西方阿彌陀佛(一拜) 以諸最勝華?樂 塗香傘蓋衣服香 燈燭皆如妙高聚 我悉供養諸如來 我以廣大勝解心 深信一切三世佛 悉以普賢行願力 普遍供養諸如來 願共諸衆生往生安樂國 ?광수공양은 널리 여러 사람에게 공양한다는 뜻. 공양은 지공하여 영양되는 것을 지어 바친다는 것. 결국 우리는 생명을 가지고 있는 것이며 생명은 먹어야 유지되는 것이다. 안 먹으면 안 된다. 만일에 이 먹는 본능을 부정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불가사의한 꿈을 가진 허무 맹랑한 사람이다. 먹는다는 것이 얼마나 위대한 일이며 또 아주 중대사라는 것을 생각해 볼 일이다. 고대 중국에서는 요(堯) 임금,
?②-1 칭찬여래 유정·무정 모두 부처이니 티끌 하나의 부처도 각양의 덕이 충만 ?일체의 겁이 다하도록 부처님 공덕 깊고 무량 이를 칭양 찬탄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엇 보다도 먼저 이 칭양하고 찬탄한다는 덕성부터 길러야 되겠다. 이것은 퍽이나 중요한 일이다. 칭찬여래가는 어일진중진수불 각처보살중회중(於一塵中塵數佛 各處菩薩衆會中)하는 첫귀로 시작한다. ‘하나의 티끌 가운데에 또 티끌 수만큼의 덕 있는 부처님이 계시다.’ 참으로 묘한 사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가? 이것은 단순한 시적 과장이나 메타포어가 아니라 벌써 믿음으로 화한 뚜렷한 사실이라 보는 것이다. 현대 과학은 원자핵(原子核)을 얘기하고 있는데, 원자핵이란 눈에 보이지도 않는 미립자이다. 그러나 이것이 한번 발동하는 날이면 전세계
② 칭찬여래(稱讚如來) 南無至心歸命禮西方阿彌陀佛 於一塵中塵數佛 各處菩薩衆會中 無盡法界塵亦然 深信諸佛皆充滿 各以一切音聲海 普出無盡妙言辭 盡於未來一切劫 讚佛甚深功德海 願共諸衆生往生安樂國 ? 앞에서 언급을 보류하였는데 서방아미타불이라는 데서 서방(西方)이란 어떤 의의가 있느냐 하는 것을 고찰해 보기로 한다. 방위로 말한다면 동서남북의 사방이 있고 상중하방이 있는데 왜 하필이면 서방이라고 하느냐, 그 까닭은 무엇이냐 하는 의문이 생길 것이다. 방위를 서방으로 정해 놓은 이것을 불교학 교리에서는 지방입상(指方立相)이라는 말로 설명한다. 우리는 마음을 어디에다 돌이켜야 되는 것일까? 집중할 방위가 결정되지 않으면 동서남북, 상중하, 어디에다 마음을 두고 정신이나 행동통일을 할 것인지, 초입자(初入者)에
우리가 발로 디디고 있는 것은 모두가 부처라 할 수 있다. 세계도 국가도 부처 시방세계 안의 모두가 부처 일체 여래 앞에 모든 것 부처 ? ?10. 행원례 (行願禮) ① 예경제불(禮敬諸佛) 南無至心歸命禮西方阿彌陀佛 所有十方世界中 三世一切人獅子 我以淸淨身語意 一切遍禮盡無餘 普賢行願威神力 普賢一切如來前 一身復現刹塵身 一一遍禮刹塵佛 願共諸衆生往生安樂國 ?여기서 예경제불(禮敬諸佛)의 예경은 앞에서 말한 바인데 제불이라는데 대하여는 그러니까 모든 부처라고 한다면 광범위한 것이지만 이에는 원효대사(元曉大師)의 말씀을 인용하여 설명하는 것이 알기 쉬울 것이다. 원효대사는 제불을 셋으로 나누었다. 첫째 과만족 덕불(果滿足德佛)이다. 과가 만족스러운 덕을 이룬 부처다. 과는 모든 수행의 결과라
나무아미타불 명호 부르면 자비와 사랑 받는다 감사한 마음을 내면 결초보은의 생각 품게 돼 전인류는 대자비에 포섭되고 어떠한 사람이건 모두 구원을 얻을 수 있다 ? 8-1 십념(十念) 대사회의 모든 중생을 위하고, 전인류를 위할 뿐만 아니라, 꼼지락거리는 목숨 붙은 모든 생물에 대하여서도 사랑과 자애를 베풀어야 된다. 이와같은 사랑을 베푼 은덕(恩德)있는 이에게 우리가 귀의 해야 되고 그를 경순(敬順)해야 되고 우리의 목숨을 온통 바쳐 그를 받들어야 된다. 나무아미타불이라는 여섯자를 뇌이는데는 칭념(稱念)과 칭명(稱名)이라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칭념은 아미타불을 일컬어 생각한다는 것, 칭명은 아미타불의 명호를 일컫는 것으로 조금 다른다. 그러나 일컬어 생각한다 하더라도 마음으로
은혜 느끼고 보은한다는 뜻을 가진 ‘나무아미타불’ 이는 스스로 사람이라는 것을 자각하는 행위이며 떳떳이 사람 노릇하고 살아야겠다는 진언이다 8. 십념(十念) ? 南無阿彌陀佛 우리는 참회하는 진언을 읊었다. 이제 다음은 나무아미타불 하는 아주 큰 구호를 외우는 일이다. 아미타불로 돌아가야겠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대성인을 모셔 놓고 이 도량에서 나무아미타불이라는 일을 하는 것이다. 나무(南無)는 돌아가 의지하는 것. 아(阿)는 없다는 부정사, 미타(彌陀)는 커다란 생명, 이를 번역하면, 수량(壽量), 또는 자비와 사랑의 빛이라는 뜻으로는 광량(光量)이라고 한다. 그리하여 아미타(阿彌陀)는 헤아릴 수 없는 큰 목숨, 무량수(無量壽) 혹은 헤아릴 수 없는 자비의 빛, 무량광(無量光)이라고
?‘신구의’ 삼업의 신비성 합일 되는 것이 ‘삼밀가지’ 정신·육체·음성 완전히 통일 몸뚱이가 부처를 이룬 지경 불멸 후 1천년대 비밀불교는 진언·만다라 등에 진리요약 우리는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지 않을까? 법문은 진리를 일러 준다지만 실상 어떤 면에서는 지루하고 장황되어 자칫하면 후학들이 지엽말단에 얽매어 참 소리를 놓쳐 버리는 것이 일쑤다. 법문을 통해 누가 일러 주어서 아는 것 보다는 가만히 마음을 가다듬고 앉아서 법문 이전의 진리를 터득하는 그것이 더 중요하고 근본적으로 아는 길이 아닌가. 벌써 이렇게 저렇게 해라 하는 소리 한번 일러서 안 듣고, 두번 일러서 그만이고 세번 씩이나 일러야 하게 되면 큰 소리가 나게 마련이고 재미 적은 것이다. 큰 소리 나기 전에 첫마디에 선뜻 알아차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