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대로 보답 못해 두고두고 후회 여덟 살 손자도 스승 고암 스님과의 인연 스물세 살 때로 기억된다. 부산 불교 청년수련대회에 참가하기 위해 해인사에 갔다. 성철 스님이 퇴설당에 계셨고 지월 스님께서 주지로 계실 때였다. 고암 스님이 조계종 종정으로 계실 때였다. 지금의 송광사 방장이신 보성 스님과 일타 스님, 법정 스님, 지관 스님 모두 젊었던 시절이었다. 수련회에 참가한 우리는 수련회라는 생각보다는 특별한 나들이라는 생각에 모두 들떠있었다. 수련생으로서 지켜야 할 사찰예절을 잊고 취침 시간이 되어서도 잠이 오질 않았다. 함께 한 수련생들과 좀 더 놀고 싶어서 스님들에게 떼를 썼던 기억이 난다. 지금 송광사 방장이신 보성 스님이 수련회 책임을 맡았던 것 같다. 스님은 밤늦게까지 수련생들에게 잣을
부족한 ‘나’ 보면 ‘삶’ 겸손해져 다른 생각 다른 모습 인정해야 내가 세상에 살면서 내가 세상에 살면서 누구로부터 행복했고 누구로부터 슬퍼하고 속상했던가? 반대로 나는 나로 인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기쁨과 행복 그리고 즐거움을 줄 수 있었던가? 생각해보면 지난 날 어리석고 모자라 더 잘할 수 있었던 일조차 잘못된 역사를 이루고 말았던 것 같다. 더 사랑하고 아름다운 말로 품어주고 안아주었어야 할 일에도 소홀히 흘려보내고 바보처럼 늙었다. 지금은 늦었지만 생의 남아있는 시간 동안 후회 없는 보람으로 채워 살고 싶다. 미움과 사랑은 눈에 보이는 물건이 아닌데도 미움을 안고 있노라면 돌을 안고 있는 무게만큼 가슴이 무겁고, 사랑할 때의 마음은 몸과 마음이 새털처럼 가벼워 훨훨 날아갈 것만 같다. 미
각자 본래 자리가 행복한 자리 부처님 알게 된 인연 늘 감사 바닷가에서 온 돌 오늘도 나를 점검한다. “아침에 깨어나 도량(내 마음) 청소는 했나요? 지난밤 하얗게 내린 눈(꿈)은 쓸어 내었나요? 도량 곳곳에 놓여있는(망상) 물건들은 다 제 자리에 두었는지요? 쓸기만 하고 닦지는 않았는지요? 양치하고(구업을 참회하고) 세수하여(모습이 깨끗하여) 기분이 상쾌해 졌나요? 옷매무새는 단정하게(단정한 몸매) 입었나요? 누구에게나 편안하고 반가운 얼굴로 만날 준비가 되었나요?” 아침에 일어나 먼저 도량청소(내 마음 청소)를 한다는 것은 오늘 하루를 잘 살기를 서원함이며 그것이 곧 작고도 큰 수행이리라. 내 마음의 도량을 늘 살펴, 미워하는 마음, 원망하고 저주하는 마음 모두 소멸되어 있을 때 비로소 나와
전라도 지역 사돈 맺었지만 우리집엔 ‘영·호남’ 없어 ‘좋기만 한 것’, ‘나쁘기만 한 것’ 없어 ? 나의 사돈은 나와 가족은 경상남도 부산에 살고 있는 ‘경상도’ 사람이다. 16년 전, 둘째 딸이 전라도 영광 사람과 결혼하면서 전라도 지역의 사람과 사돈을 맺게 됐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다양한 국적과 다양한 지역이 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우리 사회에 있어서는 안 될 말들을 쉽게 사용하고 있었다. ‘전라도’, ‘경상도’. 말만으로도 서로가 이미 상처를 안고 사는 것이다. 하지만 정작 우리 사돈 관계는 너무나 좋은 인연으로 서로가 감사히 받아들이고 있다. 나는 우리 사돈이 세상에서 가장 점잖은 분들이라고 힘주어 자랑한다. 선조로부터 좋은 가풍을 이어받은 사돈 내외를 우리 가족은 존경하고 있
짐승도 새끼 잃고 슬퍼할 줄 알아 사람으로 났다고 함부로 살면 안돼 알고 짓는 죄와 모르고 짓는 죄의 차이 마음 지니면 언젠가 그 마음 쓰게 돼 새끼 잃은 말 일요일 아침,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다. 말(馬) 주인이 애를 먹고 있다. 거의 매일 타던 말이 주인을 거부하고 있기 때문이다. 장애물 경기용 말이다. 주인이 아무리 쓰다듬고 애를 써도 말은 주인을 태워주지 않는다. 이유를 모르는 주인은 그저 답답할 뿐이다. 왜 그러는 걸까. 고민 끝에 주인은 외국인 동물 심리 치료사에게 도움을 청했다. 파견된 치료사는 말의 이곳저곳을 살핀다. 쓰다듬어 보고 끌어안아 보기도 한다. 치료사는 말과 이야기를 나누는 듯 했다. 그리고 잠시 후 놀라운 사실이 밝혀졌다. 치료사는 말이 지금 견디기 힘든 슬픔에 젖
추억의 집 내가 살던 집은 지금도 이웃에 있다. 한때는 그 집에서 행복 했었다. 결혼하여 처음 장만한 넓은 마당의 작은 기와집이다. 서른이 갓 넘었던 그때, 나는 그곳에서 연년생 네 아이들을 키웠고, 불교를 모르던 젊은 또래들을 모아 ‘연꽃모임’을 만들었다. 불심으로 불붙은 나와 도반들은 우리 집에 모여 열심히 공부했다. 그리고 가끔 큰스님을 모셔 법회라도 할 때면 잔치하는 기분이었다. 그 때 매일 손님맞이로 신이 났던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너무 행복하다. 그중에서도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감히 종정스님이셨던 윤고암 스님을 너무도 격 없이 공양을 청했고, 스님의 잔잔한 미소와 자비로 들려주신 설법을 들었던 일이다. 그리고 일타 큰스님께서도 다른 집 부탁 다 물리시고 꼭 우리 집으로 오셔서 공양하시고 우리
다른 사람 사랑하려면 ‘나’부터 바르게 닦아야 “기복아닌 정법으로 부처님 닮자” 내가 나를 사랑 할 수 있는 삶 나는 늘 내가 정신없이 살고 있는 건 아닌지 뒤돌아보곤 한다. 날마다 내가 하고 싶은 일과 내가 가지고 싶은 것과 내가 먹고 싶어 하는 일로 삶을 살아가지 않는지. 늘 하는 일이지만 거울 앞에 앉아 나를 살펴본다. 굳이 대중의 선방이 아니더라도 나만의 시간에서 나를 들여다보며 지나온 많은 날들을 어떻게 살아왔는지, 눈을 감고 생각해본다. 옥에도 티가 있다는 말이 있다. 그러나 거꾸로 내가 살아온 부족한 삶 속에는 옥구슬 같은 삶이 있다. 그건 부처님과의 만남이니 그야말로 보배로운 삶이었다고 믿는다. 부처님과의 만남은 세상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귀한 인연으로 은혜로운 삶 그 자체인 것이
갑작스런 교통사고로 아픈 몸 되니 삶과 죽음 늘 함께 있음 알게 돼 따뜻한 이웃의 은혜에 감사 ‘방생하는 삶 살아야겠다’ 발원 업은 스스로 만들고 받는 것 그림자가 나를 따르듯 삶과 죽음이 언제나 동반하고 있다. 건강한 몸으로 세상을 살아 갈 때와 생각지 못했던 사고나 병고를 만났을 때의 세상은 너무도 다른 경험을 얻게 된다. 나는 그동안 건강한 편으로 잘 지나왔었다, 그러나 갑작스런 교통사고를 만나게 되었다 신문이나 TV에서 뉴스로 보던 그 일들이 남의 일이 아닌 나의 일이란 걸 알게 되고 뜻하지 않은 수술과 입원을 하게 되니 모든 일들이 멈추어버렸다. 그냥 환자가 된 것이다. 그러나 내가 평소에 늘 부처님 품속에 살았던 그 삶이 예외일 순 없었다. 날마다 아침이 밝아올 때면 세수하고
통도사 화엄법회에 가던 날 통도사 화엄산림에 갔었다. 한 달 내내 법문이 있었지만, 좀처럼 시간이 맞지 않아 가고 싶어도 갈 수가 없었는데, 일요일엔 시식이 있다고 해서 가까운 도반들과 함께 시간을 내어 갔다. 새벽, 설법전. 일찍 간다고 갔는데 우리보다도 더 일찍 온 사람들도 많았다. 조금 지나자 설법전은 발 디딜 틈이 없게 됐다. 우리는 그래도 겨우 한자리 차지하고 앉았지만 계속 밀고 들어오는 인파로 자리 잡기는 쉽지 않았다. 내가 앉은 바로 뒷자리와 옆자리에는 많은 보살들 틈에 거사님들이 몇 분이 앉았다. 여자 불자가 대부분인 법회에서 보기 드문 광경이다. 나는 왠지 보살들 틈에 앉아있는 거사님들이 무척 반가웠다. 나는 반가운 마음에 방석도 없이 찬 바닥에 앉은 그들에게 내 방석을 내밀고 준비
2013년 새아침 축원 내가 30대에서부터 늘 지켜온 일이 있다. 우리 내외는 어린 아이들과 새해 1월 1일 0시가 되면 한해를 보내는 마지막 인사와 무사한 지난날들에 감사를 드리며 밝아오는 새날을 동시에 만나는 귀한 시간으로 우리 집 부처님 방에서 기도를 올린다. 이제는 그 아이들이 자라 가정을 가지고 어른이 되었으니 각자의 집에서 같은 시간에 기도를 올리고 마치면 서로가 휴대폰 문자로 메시지로 신년 인사를 나눈다. 가족들의 진심어린 축원으로 새로운 한 해에 더욱 건강한 모습으로 행복하길 기원한다는 아름다운 글들이다. 조용한 새벽의 기도는 지극한 마음의 약속과 진실한 서원을 발원함이니 지난날의 삶도 돌아보는 귀한 시간이다. 지난해에도 오늘과 같은 기도였는데 왜 그리도 허물이 많은 지 참회로 마
내가 아닌 ‘우리’로 살아야 정직한 꽃의 종자처럼 살고파 사람도 자연만큼 정직하게 살았으면 좋으련만, 곁에 있으면서 친히 지내면서도 비밀이 많아 속을 알 수 없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몇 년 만에 한번 볼까말까 하는 사이라도 가슴을 터놓고 이야기할 수 있는 사이도 있다. 양파는 벗겨도 또 벗겨도 겉과 속이 다르지 않고 그대로 임을 보게된다. 그런가 하면 밤송이는 무서운 가시로 온 몸을 감고 있어 함부로 만질 수도 없고 그 속의 알밤에도 역시 딱딱한 껍질로 스스로를 보호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그 단단함 속에 또 한 번 떫은 막으로 싸여있어서 그마저 벗겨 내고서야 밤의 진실을 알게 되고 달콤한 맛을 느끼게 된다. 양파처럼 겉과 속이 한결같아서 더 궁금해 할 것 없는 사람과는 아무런 허물이 없는 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