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무는 시간태양은 스러지고흘러가던 시간은잠시 각자의 것뒤돌아본다지나온 시간은 그립고지금 이 자리는 눈물겹다저무는 시간가슴은 스러지고물 위의 법당으로시간은 다시 흘러간다
금당으로 가는 길계절을 오는 것으로만 알았지사는 일도 그랬지다가오는 것들만 보였지언제부턴가 계절은 가는 것이었지사는 일도 변했지지나간 것들이 더 선명해졌지그리고 언제부턴가는계절이 가는 걸 알지 못했지어느 늦은 가을날금당으로 가는 길에서바람에 날리는 마른 낙엽을 만났지하필 금당으로 가는 길에서
아침 공안온 산엔 차가운 안개온 하늘엔 울음 한 점이 순간의 인연은 그것뿐산새의 작은 눈에도 세상은 끝이 없고산새의 작은 날개는 끝없이 하늘을 기다리니어디부터가 절이고어디부터가 나인가어디까지가 어제고어디까지가 오늘인가
계절의 힘피었던 것들은 지기 시작하고이름 있는 것들은 모두 자신의 이름 앞에 선다적적하고, 아프고, 시리고, 미어지고나무가 마른 가지를 드러내고새들은 더 멀리 울어야 하고‘무정’이라 이름 지어진 것들의 이름에도찬바람은 불어서 기어이 길은 또 어려워져만났던 것들이 그 길 위에서 이별을 하고가까이 있는 것들과 멀리 있는 것들 사이에서해는 또 저문다이 별도 어제 보단 작아졌으리하물며 나의 이름쯤이야
그리운 도반바람이 차가워지면가슴은 깊어지기 시작한다눈에 보이는 것마다귀에 들려오는 것마다가슴에 쌓여걸음은 쇠처럼 무겁고입 안엔 단 하나의 이름이 고인다눈에 보이는 것마다귀에 들려오는 것마다그 이름을 거쳐 오고짙어가는 단풍 앞에서방법은 없다
꽃이고 싶다아팠던 날들 생각하면꽃이고 싶다부끄러운 날들 생각하면꽃이고 싶다죄 많은 날들 생각하면꽃이고 싶다그렇게저무는 저녁이면나는 단지 꽃이고 싶다길이 없는 새벽이면나는 오늘뿐인 꽃이고 싶다바람에 돋고 바람에 지는꽃이고 싶다
가을 문턱이제 무엇을 바라보아도그것들은 모두 쉽지가 않다아침 길에 마주친 노인의 먼 시선과다시 시작된 가을의 조짐과향 한 자루에 타고 있는 오늘과석양 끝에 보이는 내일과한 없이 작은 나와창가에 찾아오는 저녁과끝내 알 수 없을 것 같은 삶과이 가을 문턱을 넘어야 하는 모든 것들이
하루가 간다오늘 하루도 지나간다. 길겠구나 싶었는데 어느새 신을 벗고, 몸은 고단하게 내려앉는다. 끼니마다 수저를 들고, 어제 한 근심 다시 펴고, 풍경(風磬)소리 몇 번, 바람소리 몇 번에 하루가 또 간다. 이루지 못한 것들과 그리운 것들이 두 눈을 감게 하고, 반야심경, 화엄경, 금강경도 어쩌지 못한 하루가 또 간다. 한 줄 독경보다 짧은 하루가 또 지나간다. 난리 같았던 이 여름도 다 되어간다.
돌담풍경꽃은 피고 지는 때가 있고햇살은 들고 나는 때가 있고뙤약볕에도 돌담은 그늘을 드리우니풍경은 늘 여법하다많은 눈길에도 꽃은 달라진 것이 없고지나는 바람에도 풀들은 자리를 옮기지 않으니말없이 살아도 법도가 우리보다 나은 것을언젠가는 닮을 수 있을까돌담이 드리우는 그늘을변함없이 살다가는 꽃송이와 풀잎들을…
고해(苦海)오늘, 누군가는 떠났고누군가는 또 남았다떠난 이는 모든 것을 해결했고오늘은 또 숙제로 남는다소겁 속의 하루사겁 속의 하루그 기막힌 순간에풀들은 하염없이 돋고바위틈으로 냇물은 흐른다한 곳에 있지 못하는 것들만이떠나고, 남고시간을 세고
무정의 시간에서수많은 별들을 지나온 햇살과수많은 계절을 지나온 풀들이먼저 시간이 되고먼저 길이 되어간다우리의 시간이란 그렇게그들의 여부에 달렸으니우리의 길이란 것 또한 그렇게반 발짝도 그들의 앞에 설 수 없음이니이 아침에 근심이 있고 없고는이미 이 시간의 사안이 아님을풀들이 햇살 쪽으로 기우는 것도이미 부처님이 말씀하셨으니북치고 종치고 눈을 감아도내 것은 내 것네 것은 네 것일 뿐
나무 아래서여름햇살 아래나뭇잎 짙어간다나뭇잎이 짙어가는 것은세월 또 흘러가는 것을뻔한 나뭇잎은 신기하고세월은 보이지 않으니그 많은 후회의 빌미가다른 게 아니었네한 시절 나무였던 나무이제는 ‘生’과 무관하고분명한 이름 아래 서있던 석조들이제는 역사와 무관한데그 ‘무관’ 위에 앉아서짙어가는 나무만 보일 뿐매일 보는 산 아래가 궁금할 뿐그 많은 후회를 어찌하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