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 타고 남한강 거슬러 올라 요즘 자전거를 타고 서울의 한강을 거쳐 팔당 양평 이천 충주로 달리는 ‘남한강 종주코스’가 인기다. 조선의 선비들은 배를 타고 한강을 거슬러 여강을 거쳐 충주까지 가는 코스를 좋아 했다. 그런 코스를 유람하는 것은 아주 큰 호사였을 것이다. 김창협(金昌協 1651~1708)의 ‘벽사(?寺)’라는 시는 서울에서 배를 타고 신륵사 앞까지 올라가 절 풍경 속에서 나옹 스님과 목은의 자취를 그리고 박은(朴誾)의 시를 찬탄하는 내용으로 엮어진 20행의 칠언고시다. 제목 ‘벽사’는 신륵사의 다른 이름인데, 벽돌로 쌓은 탑이 있기 때문에 지방 사람들이 그렇게 부른 것이다. 시의 후반 10행을 본다. ? 사문노회기소슬(寺門老檜氣蕭瑟) 동대쌍탑고줄올(東臺雙塔高?)
좋은 풍경은 시심을 돋우지만 풍경만으로 시가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 풍경에 인연된 이야기가 녹아 있어야 한다. 시 속의 이야기는 어떤 사실을 전하기도 하지만 묘한 상징이 되어 풍부한 상상력을 자극하기도 한다. 풍경과 이야기가 잘 정제된 시는 맛이 잘 든 술과도 같다고나 할까? ? 세속 일을 떨치고 싶은 마음 신륵사의 경우 누구나 홀딱 반할 절경과 천년 고찰에 담긴 이야기가 있으니 시 창작 공간으로서의 조건을 잘 갖추었다고 할 수 있다. ? 장암평첩가반각(長巖平?可盤脚) 청풍은행고림유(靑楓銀杏高林幽) 부시징담백척강(俯視澄潭百尺?) 청소획연경양후(淸嘯劃然驚陽侯) ? 긴 바위가 평평하여 앉아서 쉴 만한데 푸른 단풍 은빛 은행에 숲은 그윽하여라. 맑은 못물 굽어보니 백 척이 넘을 듯해
나옹 스님의 열반도량 남한강의 유려한 흐름, 그 여정의 절정은 여강(驪江)에 있다. 태백 검룡소에서 발원한 남한강이 여주 지경에서는 여강이란 이름으로 불린다. 그 승경(勝景)의 백미는 봉미산 아래 신륵사(神勒寺) 일대다. 낮은 산은 절을 품었고 절은 유유히 흐르는 강물을 품고 있다. 고즈넉한 산사의 풍경은 동쪽 언덕 높은 전탑(塼塔 보물 제226호)과 팔각정자 강월헌(江月軒)으로 인해 완성된다. 신륵사는 고려 말의 고승 나옹혜근(懶翁慧勤 1320~1376)이 열반한 곳이다. 신륵사에는 나옹 스님의 부도와 탑비가 있다. 또 동쪽 전탑 아래 강을 연접한 커다란 바위 위에 작은 3층 석탑이 있는데 나옹 스님을 화장한 곳임을 기리기 위해 세운 것이라 한다. 산과 강이 멀지 않고 그 사이에 소담하게 자리한 절
관촉사를 대표하는 ‘은진미륵’ 즉 석조미륵보살입상은 고려 말의 목은 이색이 시로 읊은 이후 조선의 선비들에게도 시의 테마가 되곤 했다. ? 같은 불상 다른 느낌, 무상 속의 절 조선 중기의 선비 성현(成俔 1439~1504)의 문집 〈허백당시집(虛白堂詩集)〉 제2권에 수록된 ‘관촉사’라는 제목의 시를 보자. ? 노방유고찰(路傍有古刹) 초초과웅강(超超跨雄岡) 정중장륙신(庭中丈六身) 외아용원창(嵬峨聳圓蒼) 석유호사자(昔有好事者) 구차백척장(?此百尺長) 항하억만계(恒河億萬界) 변화수능량(變化誰能量) 관이시혜로(灌以施慧露) 촉이명호광(燭以明毫光) 사제사황홀(沙梯?惚) 후인안족상(後人安足詳) 당시루전성(當時樓全盛) 금벽다휘황(金碧多輝煌) 지금취매몰(至今就埋沒) 유유담경당(惟有談經堂
다산 정약용의 아버지 정재원의 시는 백련사의 외양을 아주 잘 드러내고 있다. ‘금릉의 옛 절 쓸쓸하여 고요하다’는 표현에서 조선 후기 백련사의 사세를 짐작할 수 있다. 한 때 백련결사로 수행의 일가를 이루었던 옛 절이 ‘억불숭유’의 시절 인연 속에 초라하게 명맥을 잇고 있는 모습이 그려지는 것이다. ?혜장 스님과 다산의 만남 강진은 다산의 유배지다. 다산은 유배지에서 학문과 문학을 더욱 연마했기에 500여 권에 이르는 방대한 저술을 남겼다. 그의 유배생활에 신선한 활력소가 되었던 공간이 바로 백련사다. 백련사의 스님 혜장(惠藏)과의 만남은 그에게 새로운 세계를 열어주는 계기가 되었다. 불교에 대한 시각의 변화와 다도(茶道)를 통한 심신의 안정이 그의 학자적 정신을 고양시켰던 것이다. 1801년 강진으로
동백과 다산의 얼이 스민 고찰 “전라도 강진현(康津縣) 남쪽에 산이 있어 우람차게 일어나 맑게 빼어나고 우뚝하여 바다 기슭에 접하여 그쳤으니, 이름은 만덕산(萬德山)이요, 산의 남쪽에 사찰이 있어 통창하고 광활하여 한 바다를 굽어보니, 이름은 백련사(白蓮社)다. 세상에 전하는 바에 의하면 신라시대에 창설되고 고려 원묘(圓妙)국사가 중수하였으며, 11대를 전하여 무외(無畏)국사에 이르도록 항상 법화도량(法華道場)이 되어 동방의 명찰이라 일컬었다.” 고려말에서 조선 초기를 살다간 윤회(尹淮 1380~1436)가 쓴 ‘만덕산백련사중창기(萬德山白蓮社重創記)’의 도입부다. 서거정 등이 편찬한 〈동문선〉 제81권에 실려 있다. 이 중창기가 말해주는 것처럼 강진 백련사(白蓮寺)는 신라 고찰이고 고려의 원묘국사가 백련
아름 난 절과 길의 조화 조선 후기의 ‘강화학파’를 계승한 학자 이긍익(李肯翊 1736~1806)은 고증(考證)을 역사의 생명으로 여겼다. 그의 대표적인 저술 도 객관성과 공정성 등을 중시하며 지은 책이다. 별집 제16권 ‘산천의 형승’ 부분에 오대산을 소개하는 대목이 있다. ‘강릉부의 서쪽 1백 40리의 거리에 있다. 동쪽에는 만월봉(滿月峯), 남쪽에는 기린봉(麒麟峯), 서쪽에는 장령봉(長嶺峯), 북쪽에는 상왕봉(象王峯), 중앙에는 지로봉(智?峯) 등 다섯 봉우리가 둘러섰는데 각 봉의 대(臺)마다 각각 한 암자가 있다. 산 아래에 월정사(月精寺)가 있고 절 곁에는 사고(史庫)가 있다. 또 금강연이라는 못이 있는데 사면이 모두 반석이며, 폭포가 10척(尺)을
명산 중의 명산 오대산 ‘국내의 명산 중에서 가장 좋은 곳이고 불법(佛法)이 길이 번창할 곳이다.’ 일연 스님은 〈삼국유사〉에 오대산 월정사를 이렇게 표현했다. 신라의 자장율사(慈藏律師)가 643년(선덕왕 12)에 창건한 월정사는 우리나라 문수신앙의 성지(聖地)이기도 하다. 많은 고승대덕들이 머물며 수행과 전법을 이어 온 월정사는 한국전쟁으로 가장 크게 훼손 되었다. 1.4후퇴 때 아군에 의해 10여동의 건물이 전소되었고 양양의 선림원지에서 발굴된 신라시대 범종마저 불타버렸다. 이 종은 신라 성덕대왕신종보다 주조연대가 앞선 것이어서 매우 귀중한 성보였기에 안타까움이 더한다. 전쟁으로 인해 폐허가 된 월정사는 1964년 탄허(呑虛 1913~1983)스님이 적광전을 중건하면서 중창이 시작되어 오늘날까지 불
‘안수정등’의 가르침 비승비속으로 전국을 떠돌던 김시습이 금산사에서 하룻밤 묵으며 남긴 시를 차운한 윤증(尹拯 1629~1714)작품이 돋보인다. 윤증은 우암 송시열의 제자였으나 후에 그와 학문과 정치적으로 대립한 소론의 영수였다. 학문도 깊었지만 효행의 실천이 남달랐던 그의 문집 〈명재유고〉 1권에 금산사와 관련한 시가 보인다. 먼저 김시습의 시를 차운한 작품을 보자. 제목은 ‘금산사(金山寺)에 노닐며 김열경(金悅卿)의 시에 차운하다[遊金山寺 次金悅卿韻]이다. ? 부세수여차지관(浮世誰如此地寬) 세심태경도청단(細尋苔徑度淸湍) 소번자문수등정(疎煩自問垂藤井) 선승선등노회단(選勝先登老檜壇) 답장증하추색힐(沓蒸霞秋色?) 만임비우간성한(滿林飛雨澗聲寒) 청풍홀억동봉자(淸風忽憶東峯子) 삼창유편야이란(三
신령한 풍경 속에서 찾는 ‘묘한 경지’ 금산사를 읊은 고려 선비의 시로는 이곡(利穀 1298~1351)의 작품이 전한다. 이곡은 고려 말의 문신으로 원나라에서 벼슬을 오래 했다. 관료로서의 인격도 곧아 한 시대의 존경을 받았고 문학적 재능도 뛰어났다. 그가 지은 〈죽부인전〉은 대나무를 의인화 한 것으로 가전체 문학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목은 이색의 아버지다. 그의 문집 〈가정집〉 제20권에 ‘금산사(金山寺)의 벽 위에 있는 시에 차운하다’라는 시가 실려 있다. ? 춘도청구일욕중(春到靑丘日欲中) 승유요급미농공(勝遊要及未農功) 위심해상봉래경(爲尋海上蓬萊境) 인방인간도사궁(因訪人間覩史宮) 위구첨아마북두(危構?牙磨北斗) 법음탁설어동풍(法音鐸舌語東風) 갱사장구궁유절(更思杖?窮幽絶) 만학연하로역궁(滿
개산 1300년 넘은 법상도량 전북 김제 금산사는 모악산(母岳山 794m)을 병풍처럼 배경삼아 자리한 고찰이다. 1635년에 지어진 〈금산사사적〉에는 이 절이 서기 600년(백제 법왕2)에 지어진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반면 1492년에 씌어진 〈금산사5층석탑중창기〉에는 과거불인 가섭불 때의 절터를 중흥시켰다고 하여 이 절이 불연(佛緣) 깊은 곳임을 강조하고 있다. 금산사는 진표율사(眞表律師 ?~?)에 의해 신라 경덕왕 때인 762년에서 766년 사이에 중창되며 법상종의 근본도량으로 자리 잡았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후 많은 보수와 중건을 하며 오늘에 이르러 지금은 조계종 제17교구 본사다. 미륵전(국보 제26호)을 비롯한 많은 국보와 보물을 간직하고 있으며 근래 개산 1300주년을 기념하는 각종
부목화상과의 깊은 교유 이색의 문집에는 송광사 부목화상(夫目和尙)과의 교유시가 5편 가량 수록되어 있다. 부목화상의 전기는 미상이지만 당시 영향력 있는 스님이었고 이색과는 상당한 교분이 있었음을 시를 통해 알 수 있다. 송광산초체(松廣山?遞) 명전대길상(名傳大吉祥) 장신능간고(長身能幹蠱) 대후위반향(大后爲頒香) 주실청풍탑(籌室淸風榻) 납의명월랑(衲衣明月廊) 삼생습기탁(三生習氣濁) 회수경창망(回首更蒼茫) ? 송광산은 아스라이 멀리 있어 이름은 대길상이라 전해 오는데 큰 체구는 선대 사업을 잘 이행하고 태후께서는 위하여 향을 내리었네. 주실엔 청풍의 선탑이 놓여 있고 납의는 밝은 달 아래 복도를 거닐리. 나는 삼생의 습기가 혼탁한지라 머리 돌리니 다시 아득하기만 하네. -이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