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집의 봄날 떠돌이의 슬픔 삼당시인 가운데 가장 드라마틱한 삶을 살았던 시인은 손곡(蓀谷) 이달이다. 그는 서얼출신이었기에 당초 벼슬길에 나갈 생각조차 접었으며, 그 신분적 한계로부터 오는 비애를 안고 평생을 떠돌았다. 이달은 자식도 없이 떠돌다 평양의 어느 여관에 얹혀살다가 쓸쓸히 생을 마감하고 무덤조차 남기지 못했다. 그러나 그의 문학은 초라하지 않았다. 제자 허균(許筠)이 그의 유작을 모아 〈손곡집〉을 편찬하고 서문에서 스승의 생애와 문학을 소개하고 있다. ? 손곡옹(蓀谷翁)이란 사람이 있었는데 처음에 두보(杜甫)와 소동파(蘇東坡)를 호음(湖陰)에게서 배웠다. 그 읊고 읊조린 것이 이미 웅대하고 치밀하였으나 최경창과 백광훈을 사귀게 되자 배움의 허술함을 깨닫고 진땀이 흘러내
서울 강남의 대표적인 전통사찰 봉은사는 고려 때의 견성사(見性寺)에서 그 연혁을 시작하지만, 조선 중기부터 면모가 새로워졌다. 1498년(연산군4) 정현왕후가 성종(成宗)의 능인 선릉의 원찰로 견성사를 중창하고 이름도 봉은사로 고친 것이다. 1551년(명종 6)에 선교양종의 승과제도가 부활될 때 봉은사는 선종수사찰로 선종 승과고시를 시행하는 절이 되었다. 서산대사와 사명대사가 바로 봉은사 선과 출신이다. 봉은사는 유정, 각성, 경림, 상헌, 한영 스님 등으로 대를 이어오면서 쇠락과 중창을 거듭해 왔다. 강 건너에 위치한 봉은사는 시인묵객들에게 좋은 답사코스였다. 특히 조선 중기 풍류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던 동호(東湖) 너머에서 들려오는 봉은사의 종소리[奉恩聞鐘]는 ‘한양십경(漢陽十景)’ 중의 하나로 꼽
해박한 지식과 은근한 공감 〈성종실록〉에는 서거정이 불서를 좋아하지 않았다고 기록하고 있지만 그가 사찰을 읊은 시나 스님들에게 써 준 시편에서는 해박한 불교적 소양이 묻어난다. ? 용진강상고가람(龍津江上古伽藍) 석경기구입취삼(石徑崎嶇入翠杉) 억석루요영운과(憶昔屢邀靈運過) 지금유조원공담(至今猶阻遠公談) 계변주발용응복(溪邊呪鉢龍應伏) 석상번경호응참(石上?經虎應參) 백멸청혜오역재(白?靑鞋吾亦在) 상봉일소호계남(相逢一笑虎溪南) ? 용진강 위의 옛 절을 찾아 오르노라니 구불구불 돌길이 삼나무 숲으로 들어가네. 옛날에 영운의 발길은 자주 맞았으련만 지금은 원공의 말을 들을 길이 없네 그려. 시냇가에서 주문 외우면 용이 발우에 숨고 돌 위에서 설법하면 범도 응당 참여할 테지. 흰 버선 푸
세조와 나한도량의 인연 경기도 남양주 운길산 수종사(水鍾寺)는 조선 세조(世祖)에 의해 중창된 절이다. 언제 창건되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세조의 중창과 관련한 설화는 흥미롭다. 세조가 오대산에서 기도를 하고 돌아오던 길에 양수리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그런데 두물머리의 야경을 즐기는데 멀리서 은은한 종소리가 들려왔다. 이상하게 생각한 세조가 신하들에게 살펴보라 했다. 다음날 신하들은 운길산에 올라 소리 나는 곳을 찾아보니 폐사가 있었다. 거기 바위벽에 18나한이 줄지어 앉아 있고, 바위틈에서 물방울이 떨어지며 종소리를 내는 것이었다. 이 사실을 전해들은 세조는 감동하여 절을 중창하게 하고 이름을 수종사라 하였고, 수종사는 나한기도 도량으로 이름이 나게 되었다. 남한강과 북한강이 합수(合水)되는 양수
아득한 시간 속 공덕의 도량 산사에서 읊은 선비들의 시는 풍경의 묘사와 인생의 이야기를 반연 시키는 것이 주류를 이룬다. 시는 예나 지금이나 고도의 상징이다. 풍경의 묘사가 단순히 자연 풍경만을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 깊은 의취(意趣)를 숨기고 있다. 그래서 시를 읽고 해석하고 이해하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 부석천년사(浮石千年寺) 평임학가산(平臨鶴駕山) 누거운우상(樓居雲雨上) 종동두우간(鐘動斗牛間) 고목분하형(?木分河?) 개암종옥한(開巖種玉閒) 비관탐불숙(非關貪佛宿) 소쇄각망환(瀟?却忘還) ? 천년의 절 부석사 평야가 학가산에 임했네. 누각은 구름과 비 보다 높고 종소리는 두우 사이로 울려 퍼진다. 깎아 만든 나무로 나뉜 강은 아득하고
무한 감동의 천년고찰 태백준령을 뻗어 온 대간의 맥박이 소백연봉으로 건너뛰는 봉황산. 그 신비로운 자락을 품고 앉은 부석사를 이름나게 한 것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해동 화엄사찰의 종가(宗家), 의상대사의 원력과 선묘낭자의 사랑이야기를 담은 창건설화, 배흘림기둥의 유려한 곡선으로 세워진 무량수전, 멀리 중생계를 굽어보는 안양루, 조사전의 벽화와 비선화 등등. 역사적 연원과 교리적 해석, 신앙적으로 심화된 가람의 배치, 그리고 멋진 풍경이 자아내는 무한한 감동이 부석사를 최고의 고찰로 만들고 있다. 이 땅의 모든 사찰이 그렇듯, 서기 676년 의상대사가 창건한 부석사도 적지 않은 변화를 겪었다. 무너진 법당을 다시 세우기도 하고 없던 당우가 들어섰다가 사라지기도 했을 것이다. 시절인연
최치원은 해인사 홍류동 계곡에서 시를 읊었다. 사진 왼쪽은 최치원 영정 경북유형문화제166호(청도경주최씨종중 소장) 사진 오른쪽은 해인사목조희랑대사상 보물제999호. ? 한 번 들어가면 나오지 않으리 결핍과 갈망이 시를 낳는다고 했던가? 최치원은 철저히 세속을 버리고 싶었기에 홍류동 깊은 계곡에 묻혀 살면서도 물소리로 온 산을 에워싸 세속의 시비소리를 들으려 하지 않으려 했다. 그 적극적인 표현은 둔세의 극치를 보여준다. ? 승호막도청산호(僧乎莫道靑山好) 산호하사갱출산(山好何事更出山) 시간타일오종적(試看他日吾踪跡) 일입청산갱불환(一入靑山更不還) ? 스님, 청산이 좋다 말하지 마오 산이 좋으면 무엇 하러 나오겠소. 두고 보라, 훗날 나의 자취를 한번 청산에 들면 다시는 나오지 않으리.
천년의 시간과 공간 속으로 불교와 유교는 동양의 문명시대를 견인해 온 양대 축이다. 석가모니 고타마시타르타(B.C 563~B.C 483 추정)의 시대와 공자((B.C 551~B.C 479 추정)의 실존시대가 엇비슷한 것이 우연인지 필연인지 모르겠지만, 두 성인의 위대한 가르침은 종교와 철학은 물론이고 세계관과 통치이념, 윤리도덕, 문화예술 등 광범위하게 동양 역사의 대간을 이루어 왔다. 우리나라에 불교와 유교가 전래된 시기도 그리 다르지 않다. 기록상 전하는 불교 전래는 372년(고구려 소수림왕 2)인데, 묘하게도 고구려는 같은 해에 국립 유학교육기관인 태학(太學)을 설립했다. 이 또한 우연인지 필연인지 알 수 없지만, 이 땅에 들어 온 불교와 유교는 곧바로 이 땅의 역사를 끌고 가는 축이 되었다. 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