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일 생각 일으켜도 일으킨 바 없는 것을 알면 끄달리지 않는다 습기 없애려 하거나 쫓아가지 말고 흐름에 맡겨라 그러나 알고 가야지 모르고 길을 가면 깜깜할 뿐이다 정진은 어떻게 해야하나 먼저 눈뜬 선지식의 안내를 받아야 한다 ? ? ? 당장 한 생각에 깨달은 것이나 10지를 거쳐 깨달은 것이나, 그 효용에 있어서는 마찬가지다. 다시 깊고 얕음의 차이가 없다. 그렇지 않으면, 다만 영겁의 세월 동안 헛되이 괴로움을 받을 뿐이다. 무슨 문제를 해결하고자 할 때, 한 번에 되는 사람도 있고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쳐서 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여러 단계를 거쳐서 올라간 것이나 한 번에 올라간 것이나, 근본문제를 해결했다는 것에는 차이가 없다. 그래서 오랫동안 애쓰는 사람을
진귀한 보물도 탐하지 않고 오물도 싫어하지 않는 이런 마음이 곧 무심 무심할 수 있으면 바로 究竟 평상심이 도라고 말하는데 평상심을 만들거나 구하면 평상심과는 멀어진다 물들지 않은 마음이 평상심 보살은 모습이 없다 관음·문수·보현·유마는 성품의 현현일뿐 경전의 말씀은 믿음을 끌어올리기 위한 장치 “깨닫지 못하면 불보살님에 매달려 도를 등지게 된다” ?? ?관세음보살은 큰 자비를, 대세지보살은 큰 지혜를 상징한다. 유마는 ‘정명(淨名)’이란 뜻이다. 청정[淨]이란 성품을 말하고, 이름[名]이란 모습을 말한다. ? 사실 보살은 모습이 없다. 모습 없이 작용하는 것을 세상에 말하려다보니 이름을 빌려 관세음보살, 대세지보살 하고 드러낸 것뿐이다. 그 까닭을 알기 위해서는 불
무심한 사람…일체의 마음이 없다? 밝고 어두운 경계 바뀌어도 허공의 성품 변하지 않는다 마음·중생·부처 차별 없듯 부처와 중생의 차이는 ‘되니·안되니’밖에서 구하고 욕심 지나쳐 본심 잃는 것 털처럼 많은이 지견 구해도 도를 깨친이 뿔처럼 드물다 ? 보현행이라 말하는 순간 이치로 말하는 소리에 불과 ? ? 이처럼 밝고 어두운 경계가 서로 바뀐다 해도, 허공의 성품은 툭 트이어 변하지 않는다. 부처와 중생의 마음도 이와 같다. 〈화엄경〉에 ‘심불급중생(心佛及衆生) 시삼무차별(是三無差別)’이라고 했다. 마음과 부처와 중생, 이 셋은 차별이 없다는 뜻이다. 단지 부처, 중생, 마음이라고 이름을 붙여 구분을 지을 뿐, 깨달은 사람의 안목으로는 그것보다 더한 것이 뒤
?마음을 일으켜 생각을 움직이면, 즉시 법체(法體)와 어긋나고, 모양에 집착하게 된다. 어리석은 이들은 한 생각 잘못 일으키는 순간, 생사에 함몰되고 만다. 중생의 한 생각 한 생각은 생멸의 반복이어서, 무명에 뒤덮여 본질을 잃는다. 이것은 금생의 일만이 아니다. 과거 생부터 지금까지 이렇게 지냈던 것이다. 다행히 부처님 법을 만나면, 어느 날 홀연히 마음의 눈을 뜨는 기회를 가진다. 그렇게 전과는 다른 상태로 나아갔을 때, 비로소 생사윤회를 벗어날 수 있는 인연을 맺는 것이다. 또한 중생은 공부를 하면 만사형통 원하는 바가 다 이루어지는 줄 착각한다. 그것은 인과를 무시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표주박은 물결이 일면 이는 대로 덩달아 흔들리고, 물결이 없으면 없는 대로 가만히 있을 뿐이다. 이미
중생들은 생각을 쉬고 도모하지 않으면, 부처는 저절로 눈앞에 나타난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 한 생각 돌이키면 저절로 쉬어지고 비워지는 법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 도리를 모르고 온갖 사량 분별에 사로잡혀, 찾고 또 구하려고 한다. 생각을 쉬고 쓸데없는 망상에서 벗어나 고요한 무념 상태에 이르면, 부처는 저절로 나타나는 것이다.? 그러나 ‘마음을 쉬고 생각을 잊으라.’는 말에 속아, 아무 일도 안하거나 일어나는 생각을 일부러 없애려고 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어리석은 행동일 뿐만 아니라, 선지식의 가르침을 능멸하는 것과 다름없다. 안목이 열린 사람이 쉬고 비우는 것과 열지 못한 사람이 쉬고 비우는 것은 그야말로 천양지차다. 이 마음 그대로가 부처고, 부처가 곧 중생이다. 그러므로 중생이라 해서 마음이
?한마음 깨치면 부처 황벽스님이 배휴에게 말씀하셨다. 모든 부처님과 일체 중생은 한마음일 뿐, 다른 어떤 법도 없다. 이 마음은 본래부터 생긴 적도 없고, 없어진 적도 없다. 푸르지도 않고, 누렇지도 않다. 형체도 없고, 모양도 없다. 있고 없음에 속하지도 않는다. 새롭다거나 낡았다고 헤아릴 수도 없다. 길거나 짧지도 않다. 크거나 작지도 않다. 모든 한계와 계량 그리고 이름과 언어를 넘어서 있다. 모든 자취와 상대성도 초월한다. 당체 그대로일 뿐, 한 생각이 일어나면 곧 어긋난다. 오직 한 마음일 뿐, 더 이상 다시는 다른 법이 없다! 이것이 바로 양변을 떠난 중도인 것이다. 양변이 있으면 중간도 있을 텐데, 양변을 떠나고 중간이라고 할 것도 없는 이것, 중도를 올바로 깨달으면 생사를 해탈하는 데도 걸
배휴의 서문 당나라 하동 배휴가 모으고 아울러 서문을 쓴다. 대선사가 계셨으니 법휘는 희운이고, 홍주 고안현 황벽산 취봉 아래 주석하셨다. 조계 육조의 적손이요, 백장의 사법 제자이며, 서당의 법질이시다. (이하 원문 번역은 경허스님이 엮고 범어사에서 펴낸 〈선문촬요〉를 저본으로 한국간화선연구소에서 했다.) 홍주는 지금의 강서성이다. 황벽사는 강서성 이평에 있다. 선종 사찰은 대부분 깊은 산 속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넓은 분지가 있는 지형에 자리 잡고 있는데, 황벽사 또한 예외가 아니다. 얼마 전에 방문했을 때, 황벽사는 허름한 창고 같은 건물이었다. 옛 법당은 벌써 허물어졌고, 마을사람들은 문화혁명 때 홍위병의 눈을 피해 창고처럼 법당을 지었다고 한다. 법당 안으로 들어가니 흙바닥이었고, 정면
?배휴거사 묻고 황벽선사 답한 돈수의 길 ?〈전심법요(傳心法要)〉는 배휴(797~870)거사가 황벽희운(?~850)선사에게 법을 묻고 이에 답한 내용을 기록한 것이다. 황벽스님의 어록은 보리달마의 ‘일심법’과 육조혜능의 ‘돈교법문’을 투철하게 설파했다고 평가될 만큼 선문의 귀한 자료이다. 황벽스님은 육조-남악-마조-백장-황벽-임제로 이어지는 당대(唐代) 조사선의 황금기에 선풍을 크게 드날렸던 분이다. 이 조사들께서는 ‘평상심이 곧 도’라고 하여 일상생활 가운데서 간단명료하게 불법을 실천해 보임으로써, 선의 대중화에 크게 성공했다. 당대 일류의 지식인이었던 배휴는 842년 강서의 종릉에서 관찰사로 재임할 때, 스승인 황벽스님을 가까운 용흥사에 모시고 시간 날 때마다 참배하고 가르침을 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