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오악(五嶽)가운데 형산(衡山)은 후난성(호남성) 중부에 있는 명산이다. 옛날에는 이 산을 남악(南嶽)이라 불렀다. 육조의 수제자 남악회양 선사가 이 산에 오래 주석하였으므로 호를 남악이라 하였다. 물론 천태지의 대사의 스승이었던 천태종 2조 남악혜사(南嶽慧思) 스님도 이 산에 오래 머물었기 때문에 산 이름을 따서 호를 삼았다. 이 형산의 척발봉(擲鉢峰) 아래에 복엄사(福嚴寺)라는 절이 있다. 이 절이 바로 남악회양 선사가 살았던 곳이다. 이 절 곁에 황벽희운 선사의 재가 제자였던 재상 배휴(裵休)가 쓴 최승륜탑(最勝輪塔)이라는 탑이 있고 회양 선사의 탑비가 있다. ‘최승륜’이란 회양 선사의 탑호다. 그리고 조금 떨어진 곳에 마경대(磨鏡臺)라는 표지석이 하나 세워져 있다. ‘마경대’는 글자 그대로 거
육조 혜능 선사로부터 법을 이은 사람이 모두 43인이 있지만 이 가운데 5대 제자라 하여 다섯 사람을 꼽는다. 남악회양(南嶽懷讓), 청원행사(靑原行思), 영가진각(永嘉眞覺), 남양혜충(南陽慧忠), 하택신회(荷澤神會)이다. 이 가운데 육조 혜능 선사의 수제자가 되어 남악파(南嶽派)를 이루어 육조 사후 정맥(正脈)을 이어 선법을 크게 드날린 이가 남악 회양 선사(677~744)이다. 그가 처음 육조를 배알했을 때 있었던 일을 〈선문염송설화〉 119칙에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육조 혜능 선사가 물었다. “어디서 왔는가?” 남악 회양 선사가 대답했다. “숭산(嵩山)에서 왔습니다.” “어떤 물건이 이렇게 왔는가?” “어떤 한 물건이라 말하여도 딱 들어맞지 않습니다.” “수증(修證:방편을 닦아 깨닫는 것)
중국 선종의 육조 혜능(慧能:638~ 713) 대사는 매우 드라마틱한 생애를 산 인물이었다. 한 인물의 생애가 전설로 엮어지기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불교적 입장에서 볼 때 숙생의 선근인연이 성숙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를 봉양하며 살던 가난한 나무꾼으로 정상적인 교육을 받지 못해 글을 읽고 쓰지도 못했다는 그가 저자거리에 나무를 팔러 갔다가 〈금강경〉을 독송하는 소리를 듣고 발심출가 하여 오조 홍인 회상을 찾아갔다는 것과 8개월 허리에 돌을 달고 방아를 찧다 신수 대사의 게송을 능가하는 게송을 지어 야밤에 오조로부터 몰래 조사위(祖師位)를 전해 받았다는 일화는 상식을 뛰어 넘는 이야기다. 대유령에서 의발을 빼앗으러 뒤쫓아 왔던 몽산 스님을 깨우쳐 준 그는 남쪽으로 내려가
홍인(弘忍: 601~674) 대사는 도신(道信) 대사로부터 법을 전해 받은 중국 선종의 5대 조사다. 선종사에서 홍인 대사는 동산법문의 주인공으로서 역할을 하고 으로 선법을 드날린 새로운 가풍을 보였다. 그가 제자 육조 혜능 스님에게 법을 전해줄 때도 〈금강경〉을 설해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달마 대사로부터 도신 대사에 이르기까지 을 중시하여 선행을 닦은데 반해 홍인 대사는 을 소의경전으로 삼았던 것이다. 홍인 대사에게는 특유의 전설이 있다. 그가 전생에 산중에서 소나무를 심으며 수행했던 재송도인(裁松道人)의 후신이었다는 설화다. 소나무를 심으며 살던 그는 늘그막에 도신 대사를 찾아가 출가를 하고 싶다고 말한다. 재송도인은 도신 대사를 두 차례를 찾아갔는데 처음에 찾아갔을 때는
중국 선종의 4조가 된 도신 대사(道信:580~651)는 어려서부터 불교의 해탈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출가하여 사미가 된 후 14살 때 환공산(?公山)에 머물던 승찬 대사를 찾아가 절을 하고 물었다. “원하옵건대 스님께서 자비를 베푸시어 해탈법문을 들려주시기 바랍니다.” 이에 승찬 대사가 되물었다. “누가 너를 속박하였는가?” “아무도 속박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어째서 해탈을 구하는가?” 이 말 끝에 도신 대사는 크게 깨닫고 9년 동안 승찬 대사를 시봉했다. 훗날 이 문답이 ‘도신해탈’이라는 공안 중 하나로 채택되기도 했다. 중국 선종사에서 많은 대중이 모여 회상(會上)을 차리게 된 것은 4조 도신 대사 때부터다. 만년에 그가 파두산(破頭山, 쌍봉산)에 30여 년간 주석할 때 문하의 제
중국 선종의 시조를 보리달마(菩提達磨:Bodhi- dharma)라 한다. 선종의 전등 계보로 치면 인도로부터는 28대 조사이며, 중국에 와서 새로운 선법을 창안하였기 때문에 중국 선종에서는 달마를 초조로 삼게 되었다. 달마의 생몰연대와 중국도래 시기에 대해서는 몇 가지 이설이 있으나 양(梁)나라 무제(武帝) 때 중국으로 왔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다. 달마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는 문헌에 따라 차이가 있어 그의 출신지를 파사국(波斯國), 향지국(香至國), 바라문국(바婆羅門國), 남천축국(南天竺國) 등이라고 하며 후대에 성립된 자료에는 그가 향지국의 셋째 왕자였다고 한다. 인도에서 제 27조인 반야다라(般若多羅)의 법을 전해 받은 후 중국으로 온 것으로 되어 있다. 〈보림전〉에는 달마가 중국에 온 해를 5
연꽃을 드니 빙그레 웃었다. 석가모니 부처님과 가섭존자 사이에 있었던 일화에서 나온 말 중 염화미소(拈花微笑)라는 사자성어가 있다. 영산회상(靈山會上)에서 부처님이 모여 있는 대중 앞에서 설법을 하시려다 말씀을 하시지 않고 연꽃을 한 송이 들어 보이셨다는 것이다. 부처님 말씀을 들으려고 귀를 기울이던 대중이 무슨 영문인지 몰라 어리둥절했는데 유독 가섭이 홀로 빙그레 미소를 짓고 있었다는 것이다. 가섭의 미소 짓고 있는 모습을 본 부처님이 이렇게 말씀을 하신다. “내게 바른 법을 꿰뚫어 보는 눈, 열반의 현묘한 마음, 겉모습을 벗어난 진실한 모습, 미묘한 법문이 있다. 문자에 의존하지 않고 교설 밖으로 별도로 전하니 이것을 마하가섭에게 부촉하노라.”(吾有正法眼藏 涅槃妙心 實相無相 微妙法門 不立文字 敎外別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