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이 남의 흉 볼 사이가 어디 있습니까? 남을 원망할 사이가 어디 있습니까? 지금 나 가기도 바쁜데, 지금 얼마나 남았습니까? 인생을 결정짓는 장본인 질문 스님께서는 ‘내 앞에 닥치는 모든 것이 내 탓이니, 모든 것을 내 안의 근본에 맡기라’ 하십니다. 그렇다면 내 안에 모든 인생의 실마리가 다 내재되어 있다는 말씀인 것 같은데 제 인생을 결정짓는 그 장본인이자 실체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답변 사람은 어디까지나 이 세상에 나올 때에 내가 어디서 어떻게 왔는지 알아야 공부하기가 쉽다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공부라기보다도 인생관에 대해서 말입니다. 우리는 지수화풍을 근원으로 해서, 또는 우리 미생물로 하여금, 그 인연에 따라서, 인과로 인해서 정자와 난자의 뜻을 받아서 살과 몸과 피와 뼈를
남을 원망하고 남을 탓하기 이전에 자기로부터 생겼다는 그 점을 상세히 아실 것 같으면 이 세상이 즐겁기만 할 겁니다. ?(지난 호에 이어서) 질문자3(女) 스님, 저는 제가 체험한 걸 좀 얘기할까 싶어서요. 저희 집 부엌에 개미가 참 많았어요. 그런데 일을 하다 보면 개미가 물에 씻겨 가기도 하고 죽기도 하고 그래서 마음이 참 아프더라고요. 그래서 ‘아휴, 개미야. 부디 네가 살 데서 살아 다오. 여기서 살지 말고 네가 살 곳에서 살아야지 왜 여기서 사느냐.’ 하는 마음으로 언제나 부엌에 들어가서 일을 했었거든요. 그랬는데 제가 가게 가서 일을 하다가 어느 날 저도 모르게 ‘아휴! 개미야.’ 하는 마음이 되더라고요. 그러면서 ‘제발 거기서 나가 줘.’ 하는 마음. 그러니까 무심(無心)에서 그게 일어
벌써 날씨는 가을 날씨로 변했습니다. 우리가 살아나갈 때 쳇바퀴 돌 듯 찰나찰나 변해서 돌아가듯이 말입니다. 지난번에도 얘기했지만 인간이 정신계는 무시하고 물질계만 집착하여 물질 50%만 넣고 굴리려니까 맞지 않습니다. 정신계의 50%와 물질계의 50%가 맞먹어서 같이 작용을 해야만이 100%가 되는 이치입니다. 관하지 않는다. 끊어졌다 하는 생각은 자기의 관념적인 생각이지 포괄적인 생각은 아니야. 그러니까 쉬라 이 소리야, 그냥. 그런데 여러분은 바깥에서 끄달리고, 바깥으로 이름을 찾고, 바깥으로 형상을 찾고, 바깥으로 허공을 보고, 모든 것을 허무하다고 하고 이렇게 나가시니까 50%는 감추어져서 100%가 같이 돌아가지 못하는 이치가 됩니다. 그러니 뭐가 하나라도 걸리지 않고 순수하게 돌아가겠습니
여러분이 진실하게 행하고 부드럽게 말하고 무조건 남을 이익 하게 한다면 무조건 나한테 이익이 옵니다. 어떻게 추석을 받아들여야 하는지 질문 해년마다 지내는 추석이지만 올해 추석에는 정말 많은 것을 느끼고 감사할 수 있었습니다. 무슨 특별한 것은 없지만, 제가 이렇듯 이 마음도리를 만나서 흔들림 없이 한 걸음 한 걸음 걸어갈 수 있음이 감사했고, 저를 이렇게 수승한 공부로 인도해 주신 조상님들께 또한 감사했습니다. 그런데 마음공부를 해 나가는 저희들이 어떻게 추석을 받아들여야 하고 그 뜻을 계승해 나가야 할는지요. 답변 여러분께서 8월 추석을 지내셨습니다. 8월 추석을 지내신 뜻을 우리가 한 번쯤은 음미해 봐야 한다고 봅니다. 어떤 분이든지 밥 먹지 않고 사는 사람 없고, 옷 입지 않고 사는 사람 없
내 마음이 공했는데 강이 어디 있으며 건너갈 거는 어디 있겠습니까? 건너간다는 말을 할 게 어디 있습니까? (지난 호에 이어서) 또 제가 이렇게 지내 오면서 보니까 말입니다, 글쎄 천도가 왜 생겼나 했더니, 천도 말입니다. 부처님께서 한 사람 있으면 한 사람 있는 대로 이 도리를 가르치시고 두 사람 있으면 두 사람 있는 대로 함이 없이 설법을 하셨는데, 49년이라는 건 무슨 어느 날짜가 있는 게 아닙니다. 그냥 여러분이 알아듣기 쉽게 49년이라 합시다. 그렇게 설법을 하고 그렇게 행으로 보여 주셨고, 말로 듣게 해 주셨고 귀가 뚫어져라 하고 가르쳐 주셨는데도 불구하고 그냥 착이 조잘이 조잘이 붙어 가지곤 사대가 흩어져서 원점으로 돌아가니까 영혼들이 뭐라고 그러는 줄 아십니까? “아이구, 아이구! 나는
옳은 게 하나도 없고 그른 게 하나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작으면 작은 대로 쓸모가 있고 크면 큰 대로 쓸모가 있기 때문입니다. 부산지원에서 여러 불자님들과 더불어 큰스님들을 모시고 이렇게 한자리를 하게 된 것을 매우 기쁘게 생각합니다. 여러 스님들께서 이렇게 호응을 해 주신 것에 대해 깊이 감사드립니다. 여기 스님들을 뵙고 보니까 너무 기쁘고 황송하고, 또 노스님을 뵈오니 아버님 같기도 합니다. 하여튼 여러분과 더불어 불법을, 아니 불법이라기보다도 세상 이치를 서로 얘기하면서 이렇게 한자리를 하게 된 것이 정말 기쁩니다. 여러분한테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불교, 불(佛)이라는 그 자체가 무엇인가부터 말씀드려야 되겠습니다. 불이라는 것은 아주 의미가 깊습니다. 여러 가지로 표현이 되지만 전체를 싸고돌면서
내가 이렇게 놓는다고 해서 잘될까, 못될까 이런 건 걱정하지 말아야 이게 진짜 정통으로 놔지는 거죠. 왜 체계를 잡아서 이끌어 주지 않는지 질문 수년 동안 선원을 다니면서 공부를 해 나가고 있는데, 제가 어떤 단계에 있는지, 그리고 제가 어떻게 수행해 나가야 빨리 공부를 성취할 수 있는지 하는 것이 항상 의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유투브를 통해서 다른 스님이나 공부하시는 분들의 동영상을 보다 보니 수행의 단계를 구분해서 증표 같은 것을 주기도 하고, 어떤 단계에는 어떻게 공부해야 한다 하기도 하던데 선원에서는 왜 그렇게 체계를 잡아서 이끌어 주지 않는지요. 답변 내가 말을 하면 여러분이 먹을 것이요, 여러분이 질문을 해도 내가 먹고 없는 것입니다. 함이 없이 하는 도리가 바로 이 도린가 싶습니다. 여
자기한테 가설이 돼 있으니 자기 스위치를 올릴 수 있는 그런 마음 자세를 가지고 우리가 살림을 해 나가면서 도(道)를 구합시다. (지난 호에 이어서) 그래서 부처님께서 “오신통을 다 한다고 하더라도 한단 말을 하지 마라. 천안통을 한다 하더라도 한단 말을 하지 마라. 천이통을 한다 하더라도 한단 말을 하지 마라. 타심통을 한다 하더라도 한단 말을 하지 마라. 숙명통을 한다 하더라도 한단 말을 하지 마라.” 하셨는데 이 뜻이 뭐냐? 듣고, 보고, 남의 속을 잘 알고, 남이 어디서 온 거를 알고, 가고 옴이 없이 가고 온다 하더라도 이건 도가 아니니라 하는 뜻입니다. 컵을 만들어서 컵을 들고 물을 뜨고 이런다 하더라도 이건 도가 아니다 이거예요. 물을 떴다 하더라도 도가 아니다 이거지요. 보세요. 심안
내가 이 세상에 났으니까 상대와 내가 부딪치지 그렇지 않으면 부딪칠 리가 있나? 내가 나왔으니까 이렇게 부닥침이 있으니 내 탓이지. 비가 오는데도 불구하고 여러분께서 이렇게 한자리를 해 주시는 것을 보니 한 번 더 깊이 생각해 보게 됩니다. 비가 오거나 그러면 여러분이 안 오실 줄 알았더니 ‘가죽 속에 물이 들어갈 리가 있느냐.’ 하고, 하하하, 이렇게 오신 것을 생각하면 감개무량합니다. 정말 여러분의 마음은 산천초목과 더불어 우주 전체를 한마음으로 둥글릴 수 있는 그런 능력들을 다 가지신 것 같습니다. 참 감개무량합니다. 옛날에 이런 얘기가 있었죠. 비하고는 관계없는 말이지마는, 어떤 집에 초상이 났는데 그 집에 사람이 많이 드나들면 “저 집 사람은 틀림없이 천당에 갔어.” 하고요, 사람이 드나들지
과거에 입력된 것을 현실에 입력을 다시 한다면 과거의 업장이 다 무너져서 안팎을 잘 검토하고 파악할 수 있기에 실천을 해 나갈 수 있는 자유인이 된다. 마음을 밝히는 칠석, 은혜를 갚는 백중 질문 저는 지금까지 불법에 인연이 없어서인지는 몰라도 절에 다닐 생각을 못 하고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며칠 전 출근 할 때 선원 앞을 지나다가 선원 벽에 걸려 있는 현수막에 “마음을 밝히는 칠석, 은혜를 갚는 백중”이라고 쓰인 문구를 보고 의문이 생겨 질문을 드립니다. 그것을 보면서 교과서에서나 볼 수 있었던 전통 풍습인 칠석이나 백중이 그토록 큰 의미가 있는 것인가 하는 의문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한번 참석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어떤 마음가짐으로 임해야 하는지요. 답변 칠성이라는 거는 내 몸
작년 씨를 올봄에 심으니 싹이 돼서 열매가 열려서 지금 수박이 디룽디룽 매달려 있는데 말입니다, 그 수박씨를 어디 가서 찾아야 되겠습니까? (지난 호에 이어서) 하늘을 받칠 수 있고 땅을 디딜 수가 있으니까 부처님 발은 평발이라고 했습니다. 왜 평발이라고 한 줄 아십니까? 너무 말이 할 게 많아서 그냥 뒤뚱뒤뚱 이렇게 뛰어갑니다, 지금. 왜 평발이라고 했습니까? 여기에 앉아 계신 분들이 높은 일이든 작은 일이든 큰 일이든 다 제가끔 높습니다. 제가끔 옳습니다, 또. 안 그렇습니까? 농사짓는 사람한테, 농사를 전공하던 사람에게 펜대를 쥐고 사무실에 가서 일하라면 일할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러니까 농사짓는 데서는 농사짓는 사람이 으뜸이요, 회사 하는 사람은 회사 하는 데서 으뜸이요,
각자 여러분이 이 세상에 나지 않았다면 이 세상이 벌어질 일도 없고 인과 법칙도 없을 거고 상대성 원리도 없을 거고 계발도 창조도 없을 겁니다. 아마도 일 년이 넘은 것 같습니다. 이 지원의 여러분이 딴 데보다 수백 배가 작다 하더라도 작은 게 아니라, 한 사람이라도 자기 주처를 알아서 길을 걸을 때에 그건 한 우주를 산 거와 같습니다. 항상 얘기하듯 불교라는 자체는 영원하며 진리인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의 근본은 불이요, 정신세계와 물질세계가 같이 응용하고 상응하고 작용하는, 그 모든 통신하는 것이 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사생의 원리도 일체 만법의 기준이 되며 모든 마음들이, 전구는 다 다르지만 저 전력은 한 전력에 의해서 불이 들어오듯이, 모습은 다를지언정 그 생명의 근원은 똑같습니다. 그
이론으로 팔만대장경을 달달달달 외우고 위로 꿰고 옆으로 꿴다 하더라도 목마를 때 시원한 물 한 그릇 마시는 것만 못합니다. 대승이 옳은지 소승이 옳은지 질문 대승불교 교단과 소승불교 교단 사이에는 교리의 면에 있어서는 일맥상통하는 바가 있다 하더라도, 동일한 불제자로서 수행의 기준이 다르고 수행의 목적이 다름으로 인하여, 각 교단의 정당함을 주장하기 위하여 상대방을 배척하며 이단시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이러한 차이점을 마음공부를 해 나가는 저희들의 입장에서 어떻게 보아야 하는지 가르침 부탁드리겠습니다. 답변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올바른 길이 무엇인가. 비유해서 한마디 하겠습니다. 오조 홍인 선사가 『금강경』 강의를 하시니까 육조 스님께서 그 대답으로 이렇게 말했죠. “불성이 스스로 청정함을 어찌 알았
? 여러분이?여기?법당에?들어오면?법당에?부처가?있는?것이고 여러분이?법당에?안?들어왔으면?안?들어온?대로 거기?있는?자리에?부처가?있는?것입니다. (지난?호에?이어서) 이렇듯이?사람도?오늘?이렇게?사람으로?있다가?내일?어떻게?될지,?어떠한?모습으로?이?세상에?나올지?그것도?모르는?겁니다.?영이란?본래?체가?없는?거라,?즉?말하자면?원자에서?입자가?수만?개로?퍼지듯이,?또?하나로?뭉쳐지듯이,?벌어지고?뭉쳐지고?이렇게?작용을?무수히?하면서?지금?우주?전체가?돌아가고?있듯이?그런?거란?말입니다.?한마디?더?하자면,?아까도?암흑?얘기?했지만,?그렇게?진화돼서?해?나온?그?과정을?증명하려면?모두?여러분의?몸속을?보십시오.?그게?증명할?수?있는?겁니다.?그리고?악업?선업이라는?건
이 세상만사가 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고정됨이 없이 돌아가기 때문에 “색은 공이요 공은 색이니라.” 했던 겁니다. 모건힐지원에서 여러분과 같이 이렇게 2년 만에 다시 만나 뵙게 돼서 감사합니다. 이렇게 평상시에 생활을 하면서도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어디서 왔는지, 지금 무엇을 하며 어디로 가는지 그것을 모두 생각해 봐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처님 말씀도 그렇고, 사대 성인들이 전부 말하기를 “너부터 알아라.” 했습니다. “너부터 믿고 너부터 알고 너부터 진화시켜서 즉, 창조를 해라.” 하는 이런 가르침을 주셨는데 그것은 실천궁행하는 데 목적이 있습니다. 우리가 실천궁행을 할 수가 없다면 물질세계의 50%에만 극매게 되는데, 정신계의 50%와 물질계의 50%를 같이 상응하면서 같이 작용하
짧으면 짧은 대로 네가 짧아져라. 길면 긴 대로 네가 길어져라. 둥글면 둥근 대로 네가 둥글어져라. (지난 호에 이어서) 질문자1(남) 질문이라고 하기보다는 스님의 법을 청하겠습니다. 큰스님 말이 안 들리는데요. 질문자1(남) 불교의 사상을 흔히 공의 사상이라고 합니다. 공이라 하면 ‘사람의 마음을 비워라.’ 하는 공도 있고, ‘우주 공간’이라고 하는 공도 있습니다. 공의 크기를 말하면 ‘너무 커서 밖이 없고 작게 말하면 너무 작아서 안이 없다.’고도 합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공 말고 또 하늘이라는 걸 알고 있습니다. 하늘을 숭배하고 하늘을 믿으며 하늘을 종교로 삼는 그런 단체도 있습니다. 그러면 불교에서 말하는 공과 하늘이 차이점이 있다면 어떠한 차이가 있느냐? 동일한 거냐? 이 법을 설해
이 한 철 사는 동안에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서, 과거에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서 현실이 주어졌고 현실에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서 미래가 주어집니다. L.A. 사는 여러분과 같이 한자리 한 것을 참 기쁘게 생각합니다. 이 모든 여러분의 마음이 한마음이 돼서 이렇게 서로 같이 하시니 참 기쁩니다. 진리가 하나이지 둘은 아니니까요. 그런데 우리 이 불교라는 것은 어느 한군데 국한돼 있는 게 아니라 진리인 까닭에 불(佛)은 일체 만물의 생명이 불이요 교(敎)는 우리가, 일체 만물이 살고 있는 바로 이 삶의 터전입니다. 여러분이 사시면서 느끼고 알고 배우고 이렇게 하시는 게 그대로, 그대로 교예요. 영원한 자기의 각자 불성 역시 생명의 근원, 불이라고 하죠. 그렇다면 이 불교 안에서 여러분이 다 살지 불교를
아무리 급한 일이라도 내 주인공에 다 맡겨 놓고 ‘당신밖에 할 수 없어!’ 하고선 가볍게 뛰어 보세요. 그러면 그것은 그대로 부드럽게 돌아갈 거예요. 음식물을 섭취할 때의 마음 자세 질문 마음공부를 해 나가다 보니 세상 만물에는 다 생명이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육식은 자주 하지 않지만 식물을 섭취할 때도 ‘분명 이것도 생명이 있는 것이지만 내가 먹고 살기 위해서는 이 생명들을 취할 수밖에 없지 않나.’ 이런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이런 논리로 그들을 내 몸속에 무조건 집어넣어도 되는 것인지 의문이 듭니다. 과연 어떤 마음으로 음식을 섭취해야 하는지요. 답변 우리가 식사를 할 때도 수많은 밥과 반찬, 또 간식으로 실과들, 또 어떤 땐 육식을 이렇게 먹습니다. 그것들도 생명이 있고 피가
싹은 제 뿌리로 인해서 사는 거니깐 그 싹이 제 뿌리를 믿고 제 뿌리에 모든 걸 맡겨 놨을 때 바로 그 몸속에서 모든 의식들이 작용을 해 줍니다. (지난 호에 이어서) 여러분이 대충 공부하는 그 과정에도 그러한 일이 그렇게 많으니 실수하지 말고 속지 말라 이런 겁니다. 그건 그렇고, 이 지금 어떠한 감응이 돼서 이렇게, 지금 뜻으로 이렇게 감응이 되는 사람이 있고, 뜻으로 확실히 감응이 돼서 이렇게 왕래하는 사람이 있고, 어떤 사람은 그냥 그렇게 그대로 지금 기르고 가는 사람이 있고, 여기 (대중 스님 쪽을 가리키시며) 많이 있죠. 그러니까 우리 조그만 스님네들이, 조그맣다고 조그만 게 아니라 내가 (가슴을 가리키시고) 먼저 나서 있으니까 조그맣다고 하겠죠? 조그만 거 하나도 없습니다. 여러분이
우리 모두가 도반으로서 할 일이 무엇인가. 꼭 생명을 걸고, 죽는다 산다 하는 걸 떠나서 그걸 걸고 아예 들어갈 줄 알아야 된다 이겁니다. 우리가 부처님의 탄생일을 앞두고 이렇게 함께 한자리를 하면서, 여러분과 저와 도반으로서 이렇게 함께 갈 수 있는 마음들이 갸륵하고 정말 감사합니다. 오늘 스승의 날이라고 하지만 우리는 전체 한마음으로써 스승에 대한 그 감사함을, 우리는 올렸습니다. 여러분이 나의 고깃덩어리에게 감사함을 느끼진 않으셨겠죠? 모두 여러분의 마음이, 일체제불의 마음이, 우주 전체가 더불어 같이 한마음으로서, 더불어 너는 나를 보고 스승으로 삼고, 나는 너를 보고 스승으로 삼아 모두가 한마음으로서 둘이 아니게 감사함을 모두 올렸습니다. 이것은 역대로부터 오늘날의 스승의 감사함에 이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