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선종의 4조가 된 도신 대사(道信:580~651)는 어려서부터 불교의 해탈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출가하여 사미가 된 후 14살 때 환공산(?公山)에 머물던 승찬 대사를 찾아가 절을 하고 물었다. “원하옵건대 스님께서 자비를 베푸시어 해탈법문을 들려주시기 바랍니다.” 이에 승찬 대사가 되물었다. “누가 너를 속박하였는가?” “아무도 속박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어째서 해탈을 구하는가?” 이 말 끝에 도신 대사는 크게 깨닫고 9년 동안 승찬 대사를 시봉했다. 훗날 이 문답이 ‘도신해탈’이라는 공안 중 하나로 채택되기도 했다. 중국 선종사에서 많은 대중이 모여 회상(會上)을 차리게 된 것은 4조 도신 대사 때부터다. 만년에 그가 파두산(破頭山, 쌍봉산)에 30여 년간 주석할 때 문하의 제
눈이?모양을?볼?때,?귀가?소리를?들을?때,?코가?냄새를?맡을?때,?혀가?맛을?볼?때,?몸이?촉감을?느낄?때,?무엇을?생각할?때는?욕계와?색계입니다.?있음과?없음,?좋아하고?싫어하는?등의?일체분별을?일으키지?않는?사람은?욕계,?색계를?벗어나?무색계의?보살지에?도달한?사람입니다.?그렇다면?우리들은?어떻게?해야?이런?분별에서?벗어날?수?있을까요? 부처님께서는?한?마음의?뜻을?나타내시고자?49년간?팔만사천?법문을?하셨습니다.?이는?우리들에게?팔만사천?분별망념이?있기?때문이었습니다.?그런?“팔만사천?분별망념이?본래?있는?것이?아니다”고?말씀하신?것이?팔만사천?법문입니다. 팔만사천?법문을?또한?달을?가리키는?손가락으로?비유한?것은?팔만사천?분별망념을?제거하기?위한?도구와?표식이기?때문입니다.?문자와?손가락
불교계는 달라져야 한국불교는 달라져야 한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경전 속에만 담겨있을 뿐 살아 움직이는 일상생활에서 멀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부처님의 진리는 열려 있으나 사찰은 닫혀있다. 법당 문은 열려 있으나 승려의 의식구조는 막혀 있다. 불교TV의 화면에는 온통 전설 따라 삼천리 같은 영험 설화가 법복을 걸친 스님의 입에서 흘러나오고 사찰을 알리는 홍보 선전물이 마치 구걸하듯 신도들에게 권선문으로 다가온다. 조계종출판사에서 매년 발행되는 사찰 달력 뒷장에 원진살, 상충살, 들삼재, 날삼재가 빼곡하게 박혀있음에 한국불교의 현주소를 보는듯해 안타까움이 그지없다. 사찰에 따라 다르기는 하나 영가천도에 500만 원, 1000만 원 이상을 요구하는 사찰이 부지기수요, 대학입시 합격기도 동참금도 해마다 높아지고
원앙부인은 만삭의 몸을 이끌고 새벽부터 밤까지 쉴 새 없이 일했습니다.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모진 학대를 당하는 속에서도, 왕생게를 외우는 염불의 힘으로 스스로를 유지하여, 무사히 아들을 낳게 됩니다. 아이의 모습은 어쩜 이렇게도 단정하고 예쁠까요. 아이를 본 자현장자는 “이 아이는 7·8살만 되어도 내 집에 종으로 있을 관상이 아니다”라고 중얼거립니다. 아니나 다를까, 아이가 사리분별력이 생기자 다부지게 묻습니다. “다른 애들은 모두 아버지가 있는데 왜 나는 없습니까?” 자초지종을 다 들은 아들 안락국은 “나를 이제 놓아 주소서. 아버지를 찾아 가겠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장자 집서 일하던 만삭의 원앙부인 학대에도 염불의 힘으로 아들 출산 영민한 안락국, 부친 찾기위해 도주 무사히 빠져나와보니 江 앞
내가 가끔 일본에 오는 한국인 친구들과 즐기는 것이 나라(奈良), 교토(京都) 등 간사이(關西) 지역을 함께 답사하는 것이다. 그 중에서도, 나라 아스카에서의 답사가 최고라고 생각된다. 아스카는 오사카에서 전차를 타고 가도 멀지는 않지만, 차창 밖 풍경은 오사카와 완전히 다르다. 높은 빌딩도 없거니와 큰 아파트도 없어 그야말로 산과 논밭이 펼쳐진 시골 풍경이다. 순간 여기가 옛날 나라의 중심지였단 사실을 믿을 수가 없다. 그래도 자전거 타고 여기저기 다니다보면 고분(古墳)이나 사찰을 통해 아스카가 원래 번영했고 깊은 역사가 있는 곳이라는 것을 금세 깨닫게 된다. 한반도 도래인 아스카에 정착 불교 건축·기와·온돌 등 전래해 아스카데라, 백제 도래인 참여 한국 부여와 분위기 비슷 ‘친근’
사람은?佛性?담긴?귀한?법기 나쁜?말·행동,?그릇?더럽혀 사춘기?불완전한?정체성?딛고 꾸준히?十善?정진하면?해탈? ‘나는?다른?사람과?달라’,?‘친구들?중에?내가?가장?불행해’?등?자신이?남들보다?특별하다거나?자신이?세상에서?가장?불행하다고?생각하는‘중?2병’은?사춘기를?겪는?청소년들의?불안한?심리상태를?보여주는?신조어입니다.?곰곰이?생각해보면?저?역시?중학교를?다닐?무렵에는?그랬던?것?같아요.?정체성의?혼란을?겪으며,?가시?박힌?말을?함부로?내뱉고,?괜한?신경질로?부모님?마음을?아프게?했으니까요.?자신을?보호하려는?방어?본능이?‘주변?사람에?대한?경계’라는?까칠한?행동으로?표출된?거죠. ?얼마?전,?짐정리를?하다가?옛?일기장을?찾아냈어요.?어느?봄날,?시험?결과가?만족스럽지?않았던?모양이에
제한없이 사랑하는 것이 행복의 최고의 방법 조건없이 믿어주는 것이 상대방을 변하게 하는 최고의 방법 상관없이 용서하는 것이 자신의 상처를 치유하는 최고의 방법 판단없이 들어주는 것이 상대방의 아픔을 치유하는 최고의 방법 ?
정유년(丁酉年), 붉은 닭의 해도 벌써 보름이 흘렀다. 닭은 12지신 가운데서 유일하게 날개가 있지만 날지 못한다. 작은 땅벌도 날개를 윙윙거리며 공중을 날아다니고, 사람들이 혐오하는 박쥐도 날개를 활짝 펼쳐 하늘을 나는데 멋진 날개를 지닌 닭은 날지 못한다. 생물은 물에서 뭍으로 그리고 날개를 얻어 하늘로 비상(飛翔)하는 것이 순리이다. 그러나 닭은 날개가 퇴화하여 날지 못하고 다리만 튼튼해져서 땅을 종종거리며 머리를 숙여 먹이를 찾는다. 온갖 동물들이 등장하는 을 살펴봐도 봉황이 닭의 화려한 꼬리를 닮았을 뿐 닭은 언급되지 않는다. 백악기 후기에 몽골에서 살았던 길리미무스라는 공룡이 깃털은 없으나 닭을 닮았다고 한다. 아마도 닭이 공룡에게 제 목의 신축성을 자랑한 탓에 공룡이 그 장점
“티베트의 망캉 터미널은 버스와 트럭이 함께 사용하는데 정기노선버스는 일주일에 세 번이고 트럭은 목재며 시멘트 등을 싣고 줄곧 드나듭니다. 이틀 째 온수는커녕 찬물도 나오지 않는 터미널 2층의 낡은 게스트하우스에서 썰렁하게 몸살을 앓은 후 터미널 인근의 국수와 찐빵을 파는 가게의 늙은 아줌마와 타협이 어렵게 이루어져 코리안 누들(신라면) 5개 값을 선 지불 후 아궁이에 불을 지펴 한 솥의 뜨신 물로 가려진 곳을 찾아 늙은 아줌마가 곁눈질을 하든 말든 홀라당 벗고 땀 지린, 곰팡이로 찌든 몸뚱이를 번개처럼 빠르게 씻었습니다. 적은 물이었지만 그래도 신체의 중요 부분은 깔끔, 말끔은 아니더라도 치약을 비누삼아 씻었습니다. 대충 빠른 목욕을 끝낸 후 국수집 햇살이 드는 창가에 앉아 날아갈듯 가뿐하게 졸고 있는데
길 위에서 길이 어디냐고 묻는다. 그렇게 평생을 살아오고 있다. 길이 어디예요? 길 위에서 길이 어디에 있느냐고? 그래서 행장을 꾸렸다. 그동안 참 많이도 걸었다. 많은 곳을 다녔다. 아니, 더 정확한 표현은 방황이었다. 방랑이나 산책과 같은 단어는 하나의 사치였다. 아, 길은 어디에 있는가. 1988년 시작한 붓다로드 순례 그 길서 우리 미술을 다시 봤다 佛道는 깨달음이자 아름다움의 길 “覺者의 참 모습 무엇인가” 화두로 오늘도 ‘길에서 길이 어디냐’ 묻는다 어떤 분이 ‘저기를 봐’ 했다. 좀 더 가면 길이 보인다고. 그래서 나선 길이 실크로드라고 불리는 대장정의 길이었다. 처음에는 글자 그대로 ‘비단길’인줄 알았다. 정말 비단이 깔린 아름다운 길인 줄 알았다. 하지만 그 길은 나서면
참선수행도 하고 염불수행도 하면 마치 뿔 달린 호랑이 같아, 현세에 사람들의 스승이 되고 장래에 부처나 조사가 될 것이다. 참선수행은 없더라도 염불수행만 있으면 만 사람이 닦아 만 사람이 모두 가나니, 단지 가서 아미타불을 뵙기만 한다면 어찌 깨닫지 못할까 근심 걱정 하리오. 참선수행만 있고 염불수행이 없으면 열 사람 중 아홉은 길에서 자빠지나니, 저승 경지가 눈앞에 나타나면 눈 깜짝할 사이 그만 휩쓸려 가버리리. 참선수행도 없고 염불수행도 없으면 쇠 침대 위에서 구리 기둥 껴안는 격이니, 억 만겁이 지나고 천만 생을 거치도록 믿고 의지할 사람 몸 하나 얻지 못하리. 참선·염불 같이 닦으면 스승 되어 윤회 벗어나 관음보살 친견 후 변재 얻고 하루 10만 번 염불 참선 보다는 염불이 가장 간단하고
스쳐간 일언(一言)에 하루가 다 가는 사이. 문 밖은 설법으로 가득하다. 강에는 강물이 흐르고, 물새는 물 위를 날아오른다. 쉬운 듯 흘러가는 강물은 어제와 다른 것임을, 어제와 다른 것은 쉽지 않은 일인 것을. 기어이 강물을 차고 날아오르는 물새의 날갯짓은 경이로운 일임을, 그 경이로움이 다름 아닌 ‘삶’이라는 것을. 쉬운 것은 어디에도 없고, 삶은 늘 경이로움인 것을. 스쳐간 일언에 여전히 답은 없고, 문 밖은 여전히 여법하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