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 부처님 앞으로 가라.” “예에에……?” “그 험한 난리 속에서도 너희 여섯 형제가 털끝 하나 다치지 않고 무사할 수 있었던 것은 다 부처님의 가피 덕분이었다. 장남은 좀 그러니 차남인 네가 가는 게 좋겠다.” , , 의 작가 조정래는 스님이 될 뻔했다. 고등학생 조정래는 처음으로 아버지에게 저항했다. 스님이 되고 싶지 않다고. 글을 쓰고 싶다고. 조정래(1943~)는 선암사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조종현은 선암사의 부주지(철운ㆍ鐵雲)였고, 시조시인이었다. 비구였던 철운 스님은 일제의 종교황국화 정책에 의해 대처승이 됐고 조정래는 태어났다. 그는 “그러니까 저는 일제의 은혜(?)로 풍경 소리와 목탁 소리를 태교 삼아 태어난 목숨입니다.”고 했다. 비에 젖은 승선교가 안개에
몇 해 전, 부산 불광사의 ‘10보 1배 순례단’을 따라 봉정암에 올랐었다. 부처님 사리가 모셔져 있어서 누구나 한 번 쯤은 가보고 싶어 하는 도량이지만 쉽게 가지지 않은 도량이기도 하다. 얼떨결에 따라 나선 좋은 기회였다. 길이 시작됐다. 설악산 해발 1224m. 백담사에서 출발한 순례단은 오세암에서 하룻밤을 묵고 다음날 아침에 본격적인 10보 1배를 시작했다. 봉정암까지는 4km. 걸어서만 가기에도 쉽지 않은 길이었다. 마지막 관문인 ‘깔딱고개.’ 마음과 몸이 서로를 버리고 싶어 하기 시작했다. 거칠게 숨을 토해내며 있는 힘을 다해 바위를 기어오르자 마침내 봉정암이 눈앞에 나타났다. 울었다. 모두는 해발 1224m에서 기다리고 있던 ‘나’를 만나고 있었다.
풍경소리 하나 없는 송광사. 비가 내리고. 텅 빈 마당엔 비에 젖은 백일홍이 저녁을 기다리고 있었다. 목어를 스쳐간 바람이 서쪽 해를 따라가고, 짙어가는 저녁 끝에서 법고소리가 들려왔다. “지심귀명례…” 법당은 대중의 숨소리로 뜨거웠고, 오늘을 기다렸던 눈빛들이 간절하게 부처님을 부르고 있었다. 두근거리던 법고소리가 대중의 가슴 속에서 다시 두근거렸고, 목어를 스쳐간 바람은 돌아오지 않았다. “지심귀명례…”
왕십리에 자리했던 신라 고찰 청련사(안정사, 주지 백우)는 6월 20일 경기 양주시 장흥에 새 도량을 마련하고 중창불사 낙성대법회를 봉행했다. 장흥 개명산 기슭 3만9000여 평 부지에 새로 자리한 청련사는 왕십리 청련사의 불상ㆍ탱화를 비롯해 대웅전 기둥까지 그대로 옮겨왔다. 행사에는 태고종 종정 혜초 스님, 승정원ㆍ원로원 스님들, 각 교구 종무원장과 종단기관장,양주시장 및 국회의원과 신도 등1000여 사부대중이 동참했다. 혜초 종정스님은 “ 방편품 10가지 선근공덕 중 불사공덕이 가장 수승하다. 오늘 안정사가 장흥골의 큰 복전이 됐으니 이 복전에 선근씨를 심어 작복수행을 해야 할 것”이라며 “동참 대중 모두는 이런 청정도량에서 번뇌 망상을 일으키지 말고 두루 견성성불 하라”고 법문했다.
장수 죽림정사(조실 도문)는 6월 19일 용성 진종(백용성) 조사 탄신 제147회 봉찬법회를 봉행했다. 이날 법회는 조사전인 용성교육관에 봉안된 7여래불 69조사 7대사의 다례재 봉행 후 용성 조사의 탄신을 기리고 그동안의 백용성조사유훈실현불사 경과를 보고하는 순서로 진행됐다. 도문 스님은 “백용성 조사가 147년 전에 이 자리에 나툰 것은 상구보리하고 하화중생하는 부처님 가르침을 온 누리에 전파해 인류를 무명의 어둠 속에서 구원하고자 함이었다”며 “용성 조사의 대각 사상을 깊이 새기고 받들어 온겨례 전인류 만중생이 깨달음으로 나아가자”고 설했다. 행사에는 원두ㆍ법륜ㆍ환희ㆍ원명ㆍ혜력ㆍ법산 스님과 장수군 지역유지, 동국대 김광식 교수, 백용성조사유훈실현후원회 한명옥 회장, 법사단, 고문진, 회
“이 소하고 나하고 같이 죽을 거다.” “소하고? 소가 먼저 죽으면 어떡할 거예요? 장사 치러 줍니까?” “치러 줘야지. 내가 상주질 할 건데.”
그 때, 간절히 부처님처럼 살고 싶은 스님들이 있었다. 그래서 스님들은 함께 모여 원을 세웠다. ‘부처님 법대로 살자’고. 부처님처럼 산다는 것이 머리를 깎고 법명을 받는 것으로 다 되는 것은 아니었다. 얼마 전, 하안거 하루 전 날 문경 봉암사를 찾았다. 봉암사는 도량에 들어서는 순간, 아니 일주문을 바라보는 순간 다른 산문과는 다른 느낌을 받는다. 나무 한 그루도 부처님 법대로 서 있는 듯하고, 새들도 그냥 날아가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멀리 희양산에 하얀 뭉게구름도 그렇게 걸려 있었다. 길을 걷던 스님 두 분이 평상에 앉아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햇살은 밀짚모자 위에 그렇게 떨어지고, 바람은 그렇게 나뭇가지를 흔들고 지나가고 있었다.
월정사의 전나무 숲길을 걸었다. 한 발 두 발 숲으로 들어갈수록 숲은 숲에 깃든 모든 것들을 내주었다. 숲은 늘 그랬다. 누구에게나 아낌없이 내주었다. 숲이 만든 바람과 햇살을 내주고, 걷고 있는 고독과 일일이 눈을 맞추고, 그 고독이 놓고 간 고백들을 영원한 침묵으로 지켜줬다. 분명 자연이 사는 모습은 우리가 사는 모습과는 다르다는 생각을 하며 숲길을 걸었다. 스님들이 숲길에서 인사를 나누며 지나갔다. 지나온 서로의 발자국을 밟으며 다시 숲길을 걸어갔다. 어쩌다 숲길을 걸으면 그 시간은 왠지 특별하다. 그것은 평소에 쓰지 않던 ‘마음’을 꺼내보기 때문일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길은 그랬다. 마음을 가지고 걷는 사람에게만 ‘길’이었다.
“부석사, 아무나 그곳에 가게하고 싶지 않았다” “왜 그때 부석사가 떠올랐는지. 부석사의 당간지주 앞에서
일반인을 위한 1주일 과정의 참선 입문 프로그램이 공주 전통불교문화원에서 상설 운영된다. 공주 전통불교문화원(본부장 혜오)은 6월 8일 기자간담회를 열고 “개원 1주년을 맞아 조계종단 최초로 6박 7일 과정의 참선 입문프로그램을 마련해 운영한다”고 밝혔다. 7월 10일부터 토요일 오후 입재해 금요일 오전 회향하는 참선 입문프로그램에는 조계종 원로의원 고우 스님, 수덕사 방장 설정 스님, 충주 석종사 선원장 혜국 스님이 번갈아 증명법사를 맡아 법문과 화두점검을 해준다. 특강 강사로는 前 조계종 기본선원장 영진 스님, 선원수좌회 학술위원장 월암 스님, 안국선원장 수불 스님, 서강대 박영재ㆍ서명원 교수, 변희욱 박사 등이 참여한다. 행사가이드로는 조계종 불학연구소장 원철 스님, 해남 미황사 주지
연밭엔 아직 꽃이 없었다. 연잎들만 바람에 넘어지고 있었다. 굵은 빗소리가 바람에 일렁이는 연잎을 따라 다녔고 연밭은 파도치는 바다 같았다. 몇 해 전, 백련을 보러 김제 청운사에 갔었다. 꽃은 아직 일러서 작은 연못에 몇 송이가 전부였다. 처마 밑에 앉아 스님이 주신 차 한 잔을 들고 해가 나기만 기다렸다. 빗소리에 졸았던지 쪼그리고 앉아 꿈을 꾸었다. 연꽃이 다 필 때까지 기다린다고 연밭 옆에다 집을 하나 짓다가 깨었다. 비는 계속 내리고 있었다. 스님이 백련으로 만든 된장이라며 하나 주셔서 차에 싣고 절을 나섰다. 멀리 연밭의 연잎들이 바람에 넘어지고 있었다. 굵은 빗소리가 파도소리처럼 들려왔다. 연밭 옆에 집 하나 지어놓고 왔다.
대한불교본조계종(종정 석회암)은 6월 4일 서울 W컨벤션센터에서 제5기 소임자 임명장 수여 및 국운융성발원법회를 봉행했다. 행사에서 회암 스님은 중앙종회의장 대호 스님, 승정원장 현산 스님, 법규원장 혜산 스님, 고시원장 혜공 스님, 교육원장 혜견 스님, 중앙선원장 제묵 스님, 감찰원장 덕인 스님, 문화원장 법성 스님, 법사단장 월성 스님 등 제5기 소임자에게 임명장을 전달했다. 이어 국운융성발원법회에서는 천안함 사건 등 국가적 난국과 지방선거로 혼탁해진 국운을 정화하고 승화하기 위한 국운융성발원문이 채택됐다.
가평 감로사(주지 지성)는 6월 15일 오전 11시 가평 감로사에서 충담 스님(태고종 승정) 열반 제12주년 추모재와 학술발표회를 봉행한다. 추모재에 앞서 열리는 학술발표회에서는 최성렬 조선대 교수가 주제논문 ‘충담 스님의 소신공양과 불자의 자세’를 발표한다. 주지 지성 스님은 “한국불교사상 최초로 중생의 이익과 안락을 위해 소신공양으로 화중생연을 피운 충담 스님의 높은 뜻을 기리고 실천을 다짐하는 회상의 자리가 될 수 있도록 많은 사부대중의 참여를 바란다”고 말했다. 충담 스님은 분단조국 통일, 생로병사 중생제도, 불교계 화합흥륭 등 3대 원력을 세우고 1998년 6월 27일 감로사 미륵부처님 전에서 소신공양했다. (031)584-0117
초여름 햇살이 따갑던 어느 날, 함양 벽송사. 선방 처마 밑으로 딱새 한 마리가 날아들었다. 딱새는 금방 잡은 먹이를 입에 물고서 다시 이리저리 날아다니며 주위를 살폈다. 처마에서 나무로, 나무에서 지붕으로, 지붕에서 다시 처마 밑으로. 입 안의 먹이는 새끼들 것이었고, 둥지가 알려질 것을 염려해 곧장 둥지로 들어가지 못한 것이었다. 마침내 의심을 떨친 어미 새가 처마 밑에 숨어있는 둥지로 날아들었다. 새끼들은 제 얼굴보다도 크게 입을 벌리며 아우성이었다. 먹이는 그 중 한 마리의 새끼만이 받아먹었다. 어미 새는 어디론가 또 날아갔고, 시끄럽던 둥지는 선방처럼 고요해졌다. 고요한 선방, 고요한 둥지. 딱새의 시절도 치열하기는 한 가지였다.
경기도 안양시 서광사(주지 일광)가 부처님오신날을 맞아 경기 지역의 어려운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전달하고 지속적인 인재불사에 진력할 것을 다짐했다. 서광사는 안양, 과천 교육청 관내에 속한 70개 학교로부터 어려운 환경에도 불구하고 모범을 보인 학생들을 각 1명씩 추천받아 70명 학생들에게 1400만원의 장학금을 전달했다. 일광 스님은 “부처님오신날을 맞아 불교인재양성과 청소년 포교에 도움이 되고자 이번 행사를 마련했다. 앞으로도 인재불사를 지속적으로 진행할 계획”이라며 “이 장학금이 수혜학생들이 미래의 꿈을 키울 수 있는 희망의 씨앗이 됐으면 한다”고 말했다. (031)471-3684
억울하게 옥에 갇힌 예순 넷의 화가는 차가운 감방에서 간장을 찍어 화장지에 그림을 그린다. 한국 근현대미술사에 굵은 이름을 새기고 우리의 그림을 세계에 알린 그는 프랑스 파리에 잠들어 있다. 어린 시절 덕숭산과 수덕사의 풍경을 그리며 화가의 꿈을 꾸었던 고암(顧菴) 이응노(1904~1989)다.
어느 해 봄, 부산 범어사였다. 담장 너머로 보이는 나뭇가지에 초록물이 올라오기 시작했는데 나란히 서있는 가지 하나는 아직 잎을 틔우지 못하고 있었다. 나무도 생각이 많은 걸까, 생각했다. 저녁놀이 발갛게 금정산을 물들이고 지나갈 때 어디선가 까치들이 날아와 앉았다. 잠시 날아갔던 나무의 ‘생각’들이 다시 날아와 앉는 것처럼 보였다. 이 생각 저 생각에 나무가 무거워 보였다. 종루에서 종이 울렸고 날아든 종소리에 까치들은 모두 날아갔다. 다시 종루에서 종소리가 들려왔다. 이번엔 나뭇가지에 종소리가 걸려있었다. 생각이 많은 것은 나였다.
태양의 길었던 여로의 끝은 4월의 작은 연못이었다. 마주친 행자의 눈빛처럼 연못은 그 아득한 태양을 찰나에 받아내고 있었고, 간밤에 물고기가 뒤척이던 자리엔 가지를 떠난 꽃잎들이 내려앉았다. 4월은 겨울을 잊은 연못 위에서 그렇게 반짝이고 있었다. 시선 하나가 연잎 위에서 한참을 머물다 떠났고, 적적해진 연잎 위로 또 다른 시선이 와서 머문다. 언젠가 만나야 할 인연이 이제 한 생을 줄이고 지나간다. 어디서 무엇이 되어 만날까. 봄은 겨울이 떠나간 자리에 와있고, 인연은 인연이 떠나간 자리에 와 있었다. 붉은 물고기 하나가 연못 속에서 봄을 탄다.
등이 걸리기 시작했다. 법당에, 마당에, 거리에. 밤이 되면 어둠이 등불에 물들고, 등을 켠 이름들은 부처님을 기다린다. 곧 부처님오신날이다. 부처님 시절, 가난했던 여인 난타는 하루 종일 모은 돈 한 푼으로 기름을 사서 부처님께 등을 올린다. 밤이 되자 난타의 등도 다른 등과 함께 어둠을 밝혔다. 밤이 깊어 아난이 모든 등의 불을 껐지만 아무리 힘껏 불어도 난타의 등은 꺼지지 않았다. 홀로 남은 난타의 등은 새벽까지도 꺼지지 않았다. 부처님이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착한 마음씨와 지극정성으로 밝힌 등이다. 누구도 끌 수 없을 것이다. 지금은 비록 가난한 모습의 여인이지만 훗날 수미등광여래가 될 것이다.” 이제 등을 다는 것이 어렵지 않은 시절, 어둠 속에서 빛나고 있는 수많은 등들이 모두 난타의 등이
태고종단 최초 등록 사찰로 80여 년을 중생과 애환을 함께했던 왕십리 승가사가 서울 면목동으로 이전 개원했다. 기존의 승가사 건물은 충담 스님의 열반지인 가평 호명산 감로사로 지난해 옮겨졌다. 태고종 승가사(주지 지성ㆍ호명산 감로사 주지)는 5월 6일 서울 면목동 승가사 서울포교원에서 이전 개원법회를 봉행했다. 태고종 승정 인곡 스님은 법어에서 “승가사에는 고조ㆍ증조할머니 등 5~6대를 걸쳐 다니는 신도들이 많은 것으로 알고 있다. 승가사 부처님이 호명산으로 가시면 부처님 뵙고 싶어 어찌할고 하며 눈물 흘렸던 할머니와 신도님들 이제 가까운 곳에 부처님을 모시었으니 언제라도 오시어 수행정진하시기 바란다”고 말했다. 주지 지성 스님은 “오랜 세월 중생의 아픔을 보듬은 승가사를 감로사로 합병한 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