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사 “이것도 하나의 문자 인연” 대혜 수행법에 오류 있음 지적 ? 1850년 2월 15일, 강상에 머물던 추사는 초의의 안부가 궁금했던가보다. 세밑에 보낸 초의의 편지를 읽고 또 읽으며, 위안을 삼았던 추사는 벗이 보낸 ‘초의차’를 마시며 추운 겨울을 보냈으리라. 더구나 강상 시절 더욱 불교에 천착한 그는 연경으로부터 〈법원주림〉을 얻은 후, 연이어 〈종경록〉백 권을 입수한 기쁨을 초의에게 전했다. 〈완당전집〉〈여초의〉33신과 〈나가묵연첩〉에서는 화조절(花朝節)에 초의에게 보낸 추사의 편지가 전해지는데, 화조절(花朝節)은 2월 보름을 말한다. “꽃이 피는 시기”라는 뜻인 담긴 이 언구는 옛 사람들의 정서와 문리(文理), 순화된 심성과 격조를 드러낸다. 2월의 봄바람이 살랑대는
추사는 제주 유배에서 풀려나 강상에 머물렀는데, 이곳은 지금의 금호동 일대로 추정된다. 그는 이곳에서 초의가 보내준 차를 마시며, 연경에서 입수된 〈법원주림〉, 〈종경록〉등 불경을 읽었던 것으로 확인된다. 이번 호에 연재할 〈완당전집〉‘여초의’32신은 〈나가묵연첩〉에도 수록된 자료인데, 특이한 것은 ‘여초의’ 32신의 말미 부분인 “新茶何以獨喫於石泉松風之間了~金世臣許一曆亦及”의 내용이 추신의 성격을 지녔다는 점이다. 이러한 사실은 〈나가묵연첩〉에서 확인되었고, 아울러 입춘(立春)에 쓴 편지였음도 밝혀진 것인데, 편지의 내용은 이렇다. ? 곧 읍내 인편으로부터 스님의 편지를 받으니 산중이나 강상은 역시 다른 세상이 아니고, 한 하늘 아래에 침개가 서로 이끄는 사이에 있습니다. (그런데)어찌 지난날엔 여기
초의, 추사 대오일성 염원 ? 추사는 강상(江上)과 복중(腹中)의 오탁 문제에 이어 무은(無隱)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드러냈는데 이는 보기 드문 장문의 편지이다. 지난 호에 이어 〈완당전집〉〈여초의〉3신과 〈완당척독〉에 수록된 추사 편지의 후반부 내용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 무은(無隱)이란 공안은 성인의 도가 방책에 널려 있어 해가 중천에 떠 있는 것과 같으니 어찌 유가(儒家)에서 사(私)가 있고 선가(禪家)에 은(隱)이 있겠습니까. ‘홀로 선 나무에 꽃이 피다(獨樹花發)’란 시인이 경치를 그린 말에 불과한 것이니 성인의 대도와 무슨 관련이 있겠습니까. 진실로 성인의 도를 끌어오고자 한다면 이것을 분명히 해야 할 것입니다. 어떻게 말해야 내가 말을 잘한 것이 될지는 모르겠
“인분도 그윽한 난초 향처럼 여긴다면” ? 추사는 “강상(江上: 오염된 강, 드러난 실체)과 복중(腹中:더러운 인분으로 가득 챈 뱃속, 드러나지 않은 실체)이 같은가요, 다른가요. 만약 다르다면 금강신이 멀리 남산의 율사를 피할 것 같지는 않을 듯하고, 만약 같다면 어찌 나만 복중이 더럽고, 자신은 향기롭다고 하여 (중생심으로 가득한)마음속을 생각하지 않으시고, 나만 다르다고 꾸짖으십니까. 그것이 옳은지 모르겠군요”라는 견해를 보였다. 이에 대한 초의의 답은 〈일지암문집〉 〈답쌍수도인(答雙修道人)〉에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는 벗, 추사에게 지극한 예를 표하여 “멀리서 보내주신 편지를 곁에 두고 때때로 펴 보니 곧 청안을 뵙고 높은 말씀을 듣는 듯합니다(賴手書之遠存 時時披讀 況然 若奉
추사편지 70통…초의 편지는 어디있나 ?제주에서 해배된 후, 추사는 강상(江上)에 머물렀다. 〈완당전집〉〈여초의〉3신과 〈완당척독〉에 수록된 추사의 편지는 초의의 서신을 연이어 받고, 그 기쁨을 “두 장의 편지가 와서 모두 펼치니 두 배로 위로가 된다” 하였고, 이어 “하물며 돌아온 후 첫 편지이니 어찌 기쁘고 후련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이 편지의 내용은 초의의 〈일지암문집〉 〈답쌍수도인(答雙修道人)〉과 상통하는 의론이 있어서 살펴보니 바로 초의의 편지가 추사의 〈여초의〉3신의 답신이었음이 확인된다. 아울러 “쌍수도인을 해양(海陽)에서 작별한지 벌써 7개월이 지났다”고 한 초의의 증언은 해양이 바로 전남이고, “작별한지 7개월이 지났다”는 것으로 보아 추사가 제주
초의는 어떤 견지처 드러냈을까 ? 추사는 제주 시절 백파의 선리를 비판하고, 초의의 선리를 옹호하는 글을 남겼다. 다양한 불서를 참구했던 그가 의문에 봉착하면 자주 초의에게 묻곤 하였는데, 이러한 사실은 그의 편지에서 확인된다. 최근에 발굴된 〈벽해타운첩〉에는 초의의 선리 참구가 잘못되었음을 비판하는 내용이 있어 소개하고자 한다. 이 편지는 〈완당척독〉에 이미 수록된 것이지만 〈완당전집〉〈여초의〉에는 누락되었던 자료이다. 특히 〈벽해타운첩〉을 장황(표구)하면서 〈완당전집〉〈여초의〉6신의 일부의 내용인 “寔不勝牽想遙誦 居士間蒙恩飭 還處舊第 重理簪? 感靡極 雖須彌爲墨 無以盡此 鐵禪諸名宿 俱吉祥自在否 無以?具 須轉及此”이 합첩(合帖)되었기에 중복된 부분은 생략하고, 나머지 부분의 편지를
초의·추사·소치…아름다운 학연 소치의 작품 향상에 삶의 희열 느껴 초의와 추사, 그리고 소치 허련(1808~1893)의 학연은 세상에 아름다운 인연으로 회자된다. 그가 대둔사 한산전으로 초의를 찾아간 것은 1835년의 일이다. 초의는 그를 위해 방을 마련해 주었다. 소치는 이곳에서 초의에게 불화를 훈습 받는 한편 공재 윤두서 집안의 가장본을 빌려다가 임모하는 등, 지금까지 그가 경험하지 못했던 그림의 세계에 집중하였다. 1838년 초의는 금강산을 유람한 후, 돌아가는 길에 소치가 임모한 그림을 추사에게 보여 주었다. 한눈에 소치의 재주를 알아본 추사는 급히 초의에게 “허 소치의 그림 솜씨는 과연 기이한 재주입니다. 어찌 손을 잡고 오지 않으셨습니까. 보고 들은 것이 낙서(駱西:
불교관한 의문들 초의에게 일일이 물어 초의도 신변 대소사 추사에게 물어 신관호의 편액 글씨 추사에게 점검 ? 추사는 제주 유배지에서 일취월장된 불교의 식견이나 의문이 일어나면 일일이 초의에게 물었다. 청에서 간행된 신간 불서가 제주로 도착하면 어김없이 초의에게 알려 함께 증험하자는 청을 보내기도 하였다. 초의 또한 그랬다. 자신의 신변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일들을 언제나 추사에게 상의하곤 하였는데. 이러한 사실은 추사의 편지에서도 종종 확인된다. 〈완당전집〉〈여초의〉24신과 〈벽해타운첩〉에 함께 수록된 이 편지는 초의가 대광명전을 신축한 후, “대광명전”이란 편액 글씨를 신관호(1810~1884:후일 신헌으로 개명)에게 부탁하였고, 이 편액 글씨를 추사에게 보내 하나하나 점검했
1848년 12월 추사 유배 해제 이듬해 2월 소완도의 초의 찾아가 추사의 해배가 알려진 것은 1848년 12월 6일이지만 제주에서 이 소식을 들은 것은 이 해 12월 19일쯤이라 짐작된다. 을유(1849)년 2월 28일, 이진에서 용산 본가로 보낸 추사의 편지는 선문대학 박물관 소장본인데, 이는 그가 해배 소식을 듣고 행장을 꾸려 제주를 출발한 후, 이진(梨津: 현재 전남 해남군 북평리)에 도착했던 여정이 상세히 드러난 자료이다. 그는 이 편지에서 “나는 2월 15일에야 포구로 내려왔다. 중략… 포구로 내려온 지 열흘 만인 26일에야 동풍을 만났는데, 돛을 한번 올려 천리 길을 편히 건넜다. 중략… 소완도 앞에 이르자 모두 돛을 내리고, 잠시 머물렀다. 새벽에 또 동풍이 일자 정오
추사 찾아 제주 온 스님들 이야기 언급 추사의 정신적 의지처는 불교와 차 불경 보며 의문 나면 초의에게 질문 추사가 정치적 어려움을 겪던 시절, 그를 물심양면으로 도와준 이는 초의였다. 그는 추사에게 차와 종이, 약재뿐 아니라 열악한 풍토를 견디게 한 장류를 보내 벗의 심신을 위로하였다. 특히 제주 시절, 추사는 뭍과 제주를 오가는 자신의 지기들 편의를 초의에게 부탁하곤 했는데, 이러한 사실은 국립중앙박물관 소장본인 〈나가묵연첩〉에 수록된 이 편지에서도 확인된다. 실제 이 편지는 간지를 표기하지 않아 그 연대를 확인할 수는 없다. 다만 ‘초의중전(草衣重展)’이라 시작되는 편지는 별도로 보낸 추신과 합본된 것이다. 우선 피봉이 ‘초의대사 선전(草衣大師 禪展)’이라 쓴 편지부터
추사 ‘선언’, 초의에게나 씀직한 언어 ‘륵구’ 후미운…1830년 이후 편지 추정 〈주상운타첩〉에 수록된 이 추사 편지는 그의 문집이나 또 다른 추사의 간찰제첩본에도 소개된 적이 없는 자료이다. 간지가 없어 그 연대를 알 수는 없지만 이 편지의 말미에 륵구(具)라는 륵 관련 후미운(後尾韻)이 있어서 그 시기를 대략 짐작할 수 있겠다. 이와 관련하여 추사의 명호를 연구한 최준호선생의 〈추사, 명호처럼 살다〉를 살펴보니 륵구(具)란 “형식만 갖추어 글월을 씁니다”로 해석하였고, 초의를 비롯한 편지를 받는 사람들은 추사의 편지임을 알았다는 것이다. 필자가 추사의 편지를 연재하면서 어렴풋이 짐작한 것은 륵구란 후미운이 있는 편지는 대부분 추사의 제주 유배 시절이나 이들이 활발했던 교유 시기
주자 친필 ‘수’ 표류로 분실 소치의 안목 높아짐에 자부심 조선 후기 남종화의 우뚝한 거인, 소치 허련(1809~1893)은 시·서·화에 능했던 인물이다. 그는 초의와의 첫 인연을 “을미년(1835) 대둔사 한산전으로 초의스님을 찾아 갔다. (나를) 따뜻하게 대해 주었고, 방을 빌려주어 머물게”했다고 〈몽연록〉에 기록했다. 이후 소치는 초의의 문하에서 불화를 공부하는 한편 스승 초의의 소개로 해남 윤씨 가장본인 공재화첩과 〈고씨화보〉를 자유롭게 열람하는 등, 그의 예술적 안목은 날로 높아졌다. 1938년 초의는 금강산을 유람하고, 이듬해 추사에게 소치가 임모한 그림을 보여 주었다. 한 눈에 소치의 재주를 알아본 추사는 “허군의 그림 격조는 거듭 볼수록 더욱 묘해 이미 격을 이루었
“너무 기이해 총림에 들려 줄만 합니다” 제주시절 불교에 심취 불서 탐미 ? 이 번 호에 소개할 추사의 편지는 원래 〈완당전집〉〈여초의〉 26신에 포함된 것이지만 국립중앙박물관 소장본인 〈나가묵연첩〉을 통해 〈여초의〉26신과 이 편지는 별도의 편지였음이 확인된다. 이는 바로 〈여초의〉26신의 피봉과 이 편지의 피봉이 다르다는 사실에서 드러나는데, 〈나가묵연첩〉의 〈여초의〉26신의 피봉엔 수신자가 “자우산인선전(紫芋山人禪展)”이라 하였다. 자우는 초의의 호이니 자우산인은 초의를 말한다. 또 이 편지의 피봉에는 “초의대사추전(草衣大師追展)”, “초의존자선궤 나수서감(草衣尊者禪 那?書)”이라 한 것으로 보아 이 편지는 〈여초의〉26신을 보낸 직후, 혹은 다른 편지를 보낸 후, 이어
금강산 유람 무산된 초의를 달래 추사가 벼슬했던 시기에 쓴 편지 〈주상운타첩〉에 실린 추사의 편지 〈주상운타첩〉에 수록된 추사의 편지는 지금까지 드러나지 않았던 자료이다. 그가 이 편지를 쓴 시점을 추정할 수 있는 단서는 “8월 7일 병륵”과 “석장으로 포정문을 크게 두드리며 초의가 왔다고 한다면”이다. 포정문은 조선시대에 감사가 집무하던 포정사의 정문을 말한 것이므로, 대략 이 편지는 추사가 벼슬을 했던 시기에 쓴 것이라 추정된다. 아울러 초의가 여행을 준비한 후, 함께 동행을 바라는 편지를 보냈다는 점에서 대략 1838년 이전 8월7일에 쓴 것이라 짐작된다. 한편 추사는 연이어 보낸 초의의 편지에 답을 못했던 탓이 자신의 병이 심해졌기 때문이라니 그 사연을 들어 보자. 그 사이 병이 심해짐으로 인
“마음이 어찌 둘이 있겠습니까” 답신못한 추사 변명 ‘불이선’ 드러내 ? 무더운 여름, 추사가 초의에게 보낸 두 자루의 부채는 백선(白扇)이었는지, 아니면 담박한 글귀를 적은 부채였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추사의 말처럼 “붉은 해가 이마 위를 맷돌질하는” 염복을 잘 견딜 수 있기를 기원한 그의 마음이 담긴 선물이었음이 분명하다. 당시 그는 초의가 보낸 차도 이미 떨어져 습하고 무더운 여름을 견딜 수 있는 차의 공덕이 절실하게 필요했던 것. 이는 그가 자신을 안정시켜주는 초의차를 걸명(乞茗)하면서 스스로 “싫증나지 않는 요구”였음을 고백한 이유이다. 따라서 늘 초의에게 “큰 시주”를 기대한 자신의 속내를 드러낸 이 편지는
“하늘에서 꽃비내리듯 환희” 답신 연이어 보낸 초의의 편지는 적막한 추사의 적거지를 “마치 하늘에서 꽃비가 어지럽게 떨어진 것처럼 어디든지 환희의 인연이 자자”하게 하였다. 공양이 청정하여 가는 곳마다 자재한 초의의 수행처와 자신의 거처를 “게 굴이나 우렁이 사는 집의 열뇌업”에 비유한 추사의 해학이 돋보인다. 특히 초의는 〈〈진묵대사유적고〉〉의 편찬 과정에서 마지막 퇴고를 추사에게 보내 그의 조언을 구했음이 확인된다. 〈〈완당전집〉〉〈여초의〉 28신과 〈나가묵연첩〉에 수록된 이 편지는 〈나가묵연첩〉에 6월 12일이라는 간지가 있다. ? 스님의 편지 세 편이 이어 도착하니 적막했던 이곳에 마치 하늘에서 꽃비가 어지럽게 떨어진 것처럼 어디든지 환희의 인연이 자자합니다. 포갈과 향·등
?“스님의 편지와 茶는 감로 병든 위 낫게 하니 감동 사무쳐” 초의 제자에게도 글씨 보답 약속 1842년 겨울, 전주 봉서사에서 김기종에게 진묵대사(1562~1633)의 내력을 들은 초의는 그 자료를 수습하여, 1847년 〈진묵조사유적고〉를 편찬한다. 조선의 효자로 칭송된 김기종은 추사와 교유했던 인물이다. 추사는 1855년 김복규와 그 아들 김기종의 효자 정려비(旌閭碑)를 썼는데, 초의는 추사의 소개로, 김기종과 교유했다. 〈〈완당전집〉〉〈여초의〉29신및 〈영해타운첩〉, 〈나가묵연첩〉에 수록된 이 편지는 초의가 〈진묵조사유적고〉를 편찬할 당시 정황을 드러낸 자료인데, 진묵의 행적을 제공하고, 이 유적고의 체재 및 서문을 일일이 고증한 것도 추사였음이 확인된다. 그의 병이 이미
추사는 한양으로 돌아가는 구 제주 판관으로 부터 초의의 편지를 받았다. 그가 말하는 구 판관은 아마도 제주 목사로 재임했던 이원조가 아닐까 생각된다. 〈벽해타운첩〉으로 인해 알려진 이 편지는 초의가 제주에서 뭍으로 돌아간 후인 1844년 가을에 보낸 편지라 짐작된다. 이는 그가 초의의 편지를 받은 지 며칠도 되지 않아 받은 편지였다는 고백에서 드러난다. “(그대가 계신) 두륜산의 푸른 나무들이 (그대의) 참선하는 자리 사이로 떨어져 있을 것이니 지척 간의 상황인 듯”하다는 추사의 표현은 자신과 초의 사이의 거리가 이리 가까움을 말하는 것이고, 한편으론 최근에 받은 소식임을 이리 표현한 듯하다. 아울러 초의가 보내준 차품과 포장에서 지인의 따뜻한 정을 가슴으로 느낀 추사는 그 감동의 여운이 “오래도록 이어진
“茶, 서늘한 가을에 보내 주세요” 산이화 다시보내 달라 간절히 부탁 ? 〈벽해타운첩〉에 수록된 이 편지는 지금껏 알려지지 않았던 귀한 자료이다. 이 편지에는 초의가 추사에게 보낸 차의 포장법과 추사의 차에 대한 식견을 한눈에 간파할 수 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특히 제주시절, 추사가 초의에게 보낸 편지에는 차를 청하는 걸명(乞茗)이 가장 많았다. 하지만 실제 그에게 보낸 초의차의 포장법이 어떠한지를 구체적으로 드러난 사례는 그리 흔한 것은 아니다. 따라서 이 편지에 “(차는)항아리에 넣어 견고하게 싸서 보내십시오”라는 구체적 언급은 매우 중요한 정보를 제공한 셈이다. 아울러 차의 이론에 해박했고, 체득을 통해 얻어진 추사의 식견은 “차를 만든 다음 반드시 덥고 습한 여름에 보내
추사의 고백…두 벗의 지향점 시사 ? 초의가 제주를 떠난 후에도 코와 입이 풍화로 고통을 당했던 추사였다. 1844년 3월 20일, 본가에 보낸 그의 편지에는 “나는 혀가 헐고 코에 난 혹으로 여전히 고생하면서 (이 병은) 5~6개월을 끌고 있다. 설령 약으로는 치료할 수가 없다하더라도 어찌 이처럼 지루하게 고통을 견뎌야한단 말인가(吾瘡鼻 尙此作苦 彌延五六朔 雖係醫藥之無以爲之 而寧有如許支離難堪者耶)”라 한 것으로 보아 병마로 힘들었던 그의 고통을 짐작할 수 있다. 체념한 듯하지만 병을 치료하기 위한 그의 노력은 초의에게 산이화를 부탁한 것에서 드러난다. 1844년 5월 15일, 초의가 보낸 편지와 산이화를 받고, 그 감동을 숨기지 않았던 추사의 편지는 《벽해타운첩》에 수록되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