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 불교 개종하려는 이에게 “신중히 생각해보거라” 말씀 종교는 삶 위한 방편 인식 내 종교 외 다른 종교 존중해야 모든 종교는 자신의 종교가 최고의 진리를 담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런데 왜 불교는 다른 종교에 대하여 그렇게 너그러울 수 있는 것일까요. 불교의 가르침이 최고의 진리이며, 그것이 우리를 최고의 행복으로 인도해줄 수 있다면, 모든 사람을 불교로 개종시켜야 옳은 것 아닌가요? 다른 종교에 빠져 있는 사람들을 하루 빨리 불교로 개종시키는 것이야말로 불교도가 가장 서둘러야 할 일인데, 왜 다른 종교도 용인하는 너그러움을 보이는 것일까요? 혹시 그 너그러움은 잘못된 것이며, 불교에 대한 신앙이 투철하지 못해서 나오는 것 아닐까요? 그런 물음이 제기될 수 있겠습니다. 여기에 대하여는 몇 가
공직자 종교편향 문제 만연 인도 당시의 교훈 되새겨 아쇼카대왕 평화 사상 펼쳐야 공직자란 어떤 뜻인가요? 공적(公的)인 직무에 종사하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공(公)의 반대는 무엇인가요? 사(私), 즉 자기 개인입니다. 그렇다면 개인의 신앙은 공인가요, 사인가요? 우리 현명한 독자 분들에게 새삼 이것을 묻는다는 것 자체가 상당히 모독적인 일이겠지요? 당연히 개인적인 일이지요. 그렇다면 공직자가 자신의 공직을 통해 사적인 자신의 종교에 부당한 이익을 주거나 다른 종교에 부당한 손해를 끼치는 것은 무엇이라고 말해야 할까요? 한마디로 말해서 공과 사를 구분하지 못하는 것이지요. 공과 사를 엄격하게 구분하는 것이 공직자의 가장 기본적인 윤리라고 할 수 있겠는데, 바로 이 가장 기본적인 윤리를 지키지 않는 분이
요괴에게 계속 속는 현장법사 지혜보단 욕망에 기반한 판단 “자비실천도 이치에 따라야” 지난번에 이야기했던 무서운 요괴, 홍해아가 현장법사 일행을 노립니다. 아니 일행이 아니라 현장법사를 노리는 것이지요. 현장법사는 본신이 여러 생에 거쳐 수행을 쌓아온 분이라, 요괴들이 그 고기를 먹기 위해 침을 흘리는 존재지요. 거기다 진원대선이 키우던 인삼과 열매를 얻어먹은 덕분에 더더욱 효능(?)이 강화 되었다네요. 좀 과장해서 말하면 그 고기를 한 점만 먹어도 불로장생한다나요? 그래서 여러 요괴들이 탐을 내고, 홍해아도 호시탐탐 현장법사를 잡아먹으려 노립니다. 그런데 쉽지를 않아요. 하도 요괴한테 당하다 보니 손오공을 중심으로 한 방위체제가 틀이 딱 잡혀 있거든요. 비상 사이렌 웽~ 하고 울리면 순식간에 차량통
홍해아의 삼매진화는 수행의 과보 삼매는 선악 없이 이뤄내는 경지 수행의 위험성을 단적으로 드러내 오계국 국왕의 성대한 작별에 힘을 얻어 앞으로 앞으로! 일행 앞에 또 기막힌 경치에 험준한 산골이 나오네. 경치야 좋지만, 현장법사 지레 겁이 난다. 무슨 요괴가 또 나올까… 그런데 벌써 수상쩍은 기미…. 산마루턱에 붉은 구름이 솟구친다. 손오공 개코, 아니 원숭이 코에 요괴 냄새가 전해온다. 비상, 비상! 손오공의 신호에 저팔계, 사오정, 재빨리 요괴 대응 수비 태세로 전환. 그 숙달된 자세에 현장법사 잡아먹으려 엿보던 요괴, “이거 쉽지 않겠구나”하는 생각이 절로 든다. 여기가 어드메더냐. 산 이름은 호산(號山) 요괴는 어릴 적 이름이 홍해아(紅孩兒) 커서는 성영대왕(成?大
왕이 우물에 박힌 이유 나와 현장법사 일행의 지혜로 해결 도사요괴는 문수보살의 사자 진실한 종교인이라는 분들은 대체로 이성으로 설명할 수 없는 신비한 체험을 하게 마련입니다. 불교계에도 수많은 감동적인 영험담이 있지요? 그러한 영험의 영역이야 말로 종교의 가장 귀중한 영역이기도 합니다. 아무리 절망적인 상황에 빠져 있다고 하더라고 희망을 잃지 않게 하는 것이 바로 종교이지요. 앞이 캄캄한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부처님과 보살님의 큰 가피를 힘입어 새로운 희망을 열어나가는 이야기, 참으로 감동스러운 이야기가 많습니다. 그렇지만 역시 그런 영험에만 주로 의존하는 종교는 건강치 못한 모습을 보이기 쉬운 것도 사실입니다. 기도에 의해 큰 영험을 얻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에 주로 의존하려고 해서는 또 안됩니다.
삶과 죽음의 문제가 화두 사후세계 단정짓지 말아야 무지로 인한 두려움 떨쳐야 전번에 약속한 귀신 이야기, 어떻게 시작해 볼까요? 흠…, 우선 나칠계님처럼 귀신을 무서워하는 분들이 많은 것 같은데, 도대체 귀신은 정말 있는 것일까요? 아니면 사람의 상상력이 만들어 낸 것일까요? 자, 여러분들께 한번 질문을 던져 보기로 하지요? 귀신이 있다고 믿으시는 분? 흠, 반 넘는 분들이 손을 드시네요. 그럼 없다고 믿으시는 분? 역시 꽤 많은 분들이 손을…. 그렇다면 대체적으로 보아 있다고 믿으시는 분과 없다고 믿으시는 분이 반반 쯤 된다고 보아야 할까요? 어 그런데 나칠계님, 갑자기 다 지난 마당에 힘차게 손을 드시는 것은? 있다고 믿느냐 없다고 믿느냐의 문제가 아니라고요? 그럼 무슨 문제인가요? 헉! 귀신을
대찰 보림사의 타락상 묘사 고발 일환으로 서유기 작성 “대표자 위계에 종교위상 달려” 금각, 은각대왕을 물리쳤네. ‘이름 따먹기’ 정병의 관문을 넘어섰네. 손오공, 이제는 이름에 대한 집착도 넘어섰는가?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데 이제 남길 것도 없어졌는가? 아아,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이름은 실제의 그림자에 불과할 뿐이니 실제도 헛된 것이어늘 하물며 이름이랴! 갈 길을 그저 갈뿐, 무엇을 남기려 하랴. 서역에의 길은 아직도 멀어라. 떠나 온 땅에 그리움도 깊어라. 이 때 마침 떡하니 커다란 사찰이 나타나네. 보림사라 하는 절이로다. 그런데 주지 스님 심보가 고약하여 일행의 행색을 보고 푸대접하다 손오공의 행패에 기겁을 하여
호로병서 벗어나는 손오공 이름의 분별서 벗어나 자신에 대한 믿음이 중요 힘 이야기를 했으니 좀 더 해보기로 하지요. 힘이라는 것은 언제나 그 보다 더 큰 힘이 있다는 점에서, 힘의 추구는 끝이 없다는 결론이 나오지요. 그러니까 그러한 조금 더 크게, 조금 더 세게…하는 길에는 완성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불교 수행처럼 궁극적 완성을 추구하는 길과 힘을 추구하는 길은 애당초 전혀 방향이 다르다는 것을 분명히 해야 하겠지요. 그걸 좀 어려운 말로 하면 불교의 궁극적 목표라고 할 수 있는 ‘열반’ 이나 ‘해탈’은 무위법(無爲法)이라 말하고 상대적 크기가 있고, 또 변화하는 모든 것들은 유위법이라 하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유위법의 세계에는 차별이 있을 뿐 완성이 없습니다. 그런데 가끔 우리 현실을 보면 어떤
참된 출가자 탄생… 세상에 큰 빛 전하다 한 사람의 스님이 나오기 위해선 얼마나 많은 복연이 겹쳐야 하는가? 한 사람의 스님이 나오면 또한 얼마나 많은 복연이 이어지는가? 현장법사야말로 그런 대표적인 예~ 그분 한분의 위대한 복연으로 불법이 크게 흥하니 우리가 지금까지 그 복연 속에 있구나. 그렇다면 그분 나오기까지의 인연도 당연히 범상치 않겠지? 그분께서 금선자란 수행자로서 오랜 기간 수행을 해 온 몸이라는 것은 이미 말했던가? 그 수행의 인연이 어떻게 금생에 이어졌던가? 때는 당(唐)왕조 태종 년간 나라에 인재를 뽑기 위해 큰 과거를 시행하는데 거기에 장원으로 급제한 인물 있다. 그 이름 진악(陳?), 자(字)는 광예(光?)라 당시 승상벼슬을 하던 은개산의 따님 은교 아가씨와 인연이 있어 화촉동
이름에 답하는 순간 빨려들어가 명예·공명심에 대한 주의 표현 인격 완성에 집중하는 것이 ‘불교’ 앞에서 서유기 이야기와는 상관없는 사설이 왜 그리 많았냐구 불만을 가지시는 분들이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그렇지만 원래 서유기가 그렇게 슬쩍 천기를 누설하는 그런 책입니다. 손오공 입을 빌어, 또는 보살님 입을 빌어 천고의 비밀 한 자락을 내비치곤 하거든요. 금각, 은각 대왕 만나기 전에도 그런 대목이 있어서 그걸 보고 삼쾌선생이 흥이 났던 것이지요. 잠깐 소개해볼까요? 금각, 은각이 살고 있는 험한 산을 마주하곤 현장법사, 한숨이 터집니다. 사나운 짐승이나 요괴가 나올까 두려움에 떠는 거지요. 그 심정은 이렇게 표현됩니다. “가도 가도 안개만 더욱더 두텁게 끼니, 언제나 이내몸 편안할 수 있으려나” 손
태산에 깔려 위기에 처한 손오공 연화동에 끌려간 현장법사 일행 죽음 아는 것은 삶을 잘 아는 것 “지금 이순간 매진하면 생사 초월” 쉼 없이 나가는 길, 불퇴전의 길…. 공자님이 말씀하셨던가? 죽은 뒤에야 끝나는 길이라고…. 아니 죽은 뒤에도 끝나지 않아! 세세생생 가야 할 길이지! 손오공 일행은 그 길을 가고 있는 것~다섯이 한마음 되고, 손오공이 앞장서서 여의봉 뽐내어 앞길을 연다. 그 앞길을 턱하니 가로막는 험한 산 있네. 이름하여 평정산(平頂山)이라 현장법사 벌써 걱정이 앞선다. 그런데 정말 이 산은 정말로 보통 아닌 요괴가 사는 산…. 앞에 많은 비보통(非普通) 요괴들이 나왔지만 이 산 요괴는 정말 슈퍼 울트라 비보통이란다. 일행을 뒷전에서 옹호하던 신관이 나무꾼으로 등장하여 미리
업은 행위의 방향성을 의미 지속적인 행위가 결과 낳아 선업에 대한 자아성찰도 필요 짜가도사와 삼쾌도사의 대결, 계속됩니다. 짜가도사가 가정폭력에 시달리는 부인에게 전생의 업보를 이야기하며 겁을 주고 있는 대목에서 삼쾌선생이 분장한 삼쾌도사가 등장했지요? 자, 그럼 어찌 전개되는지 보겠습니다. 짜가도사 : 당신 뭐하는 사람이야? 이 거룩한 도사의 권위를 무시하는 만행을 저지르고 있다는 것을 모르는 것인가? 삼쾌도사 : 거 동업자끼리 그러지 맙시다. 그리고, 뭐 거룩한 권위 운운하는데, 무슨 도사 증명서 같은 거 있어? 아니면 도력 측정기 같은 거라도 있으면 몰라…. 〈짜가도사,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하지만 대응할 말이 없다〉 삼쾌도사 : 계속 전생의 업보 이야기하는데, 난 그런 귀에 걸면 귀걸이,
요괴 정체는 하늘 선관(仙官) 상계의 업으로 하계서 요괴돼 불교의 지혜가 업을 끊음을 상징 “전생의 업 타령 말고 선업쌓아야” 저팔계의 격장지계(激將之計)가 성공한 것인가? 단지 그것만은 아니로다. 손오공 마음에 선근 뿌리를 내렸으니 어찌 쉽게 구도의 길을 팽개칠까. 한번 스승은 영원한 어버이라(一日爲師終身爲父), 스승의 위기를 구하러 급히 달려온다. 황포요괴는 아직도 궁궐에서 술에 취해 있고, 사오정은 요괴 소굴에 잡혀 있구나. 손오공 우선 요괴 소굴에 들려 사오정 구하고 요괴 부인노릇하고 있는 공주 달래어 요괴의 자식들로 궁궐에 있는 요괴를 끌어낸다. (잔인한 장면, 심의 삭제) 놀랜 요괴 바람처럼 소굴로 달려오고, 손오공은 공주로 변신하여 요괴를 맞는다. “여보, 저팔계라는 놈이 아이들을
올바르지 않은 삶, 그 자체가 ‘불행’ 근심·걱정 덜기 위한 ‘염’수행 중요 서원 바탕 둔 정진이 필요한 때 전 회에 말한 뻔한 전개…. 그럼 그 전개가 과연 얼마나 뻔한지 나가 볼까요? 요괴의 부인인 백화수공주 도움으로 요괴의 소굴을 벗어나고, 그 부탁으로 보상국이라는 나라에 가서 공주의 편지를 전하니, 국왕이 요괴를 토벌하겠다고 나서지요. 거기에 저팔계가 만용을 부립니다. 이 저팔계는 정말 곳곳에서 말썽을 피우지요? 욕망에 게으름에, 거기다 영웅심과 공명심은 또 얼마나 많아요? 그래서 정말 밉상인데, 이 미운 화상을 보고 있자면 조금 정드는 건 또 뭘까요? 우리의 속된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기 때문이 아닐까 싶네요. 저팔계가 사건 일으키는 대목마다, “아, 저게 내 모습 아닐까?”하는 반성이 들면서
황포요괴 술수에 변해 보상국서 처형 기다려 거룩함 속에 타락 묘사 덜떨어진 지혜지만 지혜가 앞장서던 길과 계율 잘 안 지키는 욕망에 따라가는 길이 같을 수가 있나. 손오공 쫓아낸 현장법사 일행, 제 발로 요괴 소굴에 떨어진다. 아무리 눈이 어둡기로 그럴 수가 있냐구? 당연히 있지! 이야기를 들어 봐! 너무 긴 이야기가 될 것 같아, 삼쾌선생이 요약 압축 실력을 좀 발휘해야 할 듯~ 저팔계 먹을 거 찾는다고 나서서 농땡이, 낮잠 쿨쿨~ 그 저팔계 찾아 나선 사오정 이리저리~ 둘레둘레~ 혼자 기다리던 현장법사, 이리 저리 산보삼아 걷다가 거룩한 불탑을 보았네. 환희심 내어 찾아들고 보니 황포(黃袍)요괴라는 흉악한 요괴의 소굴~ 당연히 덜커덕 잡혀 다음 끼 식사거리로 대기~ 그런데 황포요괴, 요괴
현장법사와 손오공 갈등 생겨 가짜 손오공 나타나 다툼 발생 서원 없다면 욕망의 힘 줄여야 이번에는 서유기의 독특한 ‘손오공 축출사건’을 좀 제대로 다루어보기로 했죠? 단순한 자기의 분열과는 다른, 서유기의 자기 분열사태를 좀 자세히 들여다보겠습니다. 우선 현장법사는 자비심은 충만하지만 사태의 진상을 보는 눈은 부족하군요. 요괴가 분장하고 나온 것을 전혀 분별하지 못합니다. 그 반면 손오공은 요괴의 간사한 수법은 한 눈에 꿰뚫어 보지만 자비심은 부족합니다. 여기서 갈등이 빚어지는군요. 손오공의 성급한 손은 단매에 요괴를 때려죽여버리고, 눈 밝지 못한 현장법사는 이를 용서하지 못하네요. 그래서 손오공 머리테 조이는 긴고주를 막 외워대고…. 이런 일이 세 번 벌어지고, 결국 요괴를 잡지만 손오공이 쫓겨나지
갈등과 선택은 인생의 필수과정 자기집착서 벗어난 바른 선택 필수 자기자신의 친구가 되는 성찰 중요 자기와 자기가 서로 다툰다! 이거 정말 큰 문제죠. 그게 극단으로까지 치달으면 정신분열로 가는 건가요? 그런 정신과적인 문제가 아니더라도, 우리 마음속에서 자기와 자기가 서로 다투는 경우는 많이 있습니다. 내적인 갈등이라고 부르는 경우지요. 내적인 갈등을 격지 않는 사람 누가 있겠습니까? 그런 내적인 갈등 가운데 가장 흔하게 오는 경우가, 두 가지 욕구가 충돌하는 경우지요. 이것도 하고 싶고 저것도 하고 싶고……. 다중의 욕구가 충돌하면……. 굉장히 심각할 것 같지만 실은 그렇게 심각하지 않습니다. 여러 욕구 가운데 하나를 포기하면 되는 것이니까요. 여러분들도 이런 내적인 갈등은 흔히 겪으시죠? 그리고
주체의식과 지혜와의 충돌 묘사 탐욕 상징, 저팔계의 부추김 이어져 내적 갈등 극복은 통일된 인격 형성 인삼과를 복용한 현장법사, 정신도 맑아지고 몸도 튼튼해지고 기운이 팔팔하다. 그 기운이 구도심으로 뻗쳐 열심히 경 구하러 가는 길을 재촉한다. 그렇지만 인도 가는 길 또한 만만치 않아라. 경치도 좋지만 험하기도 한 산이 또 가로막는다. 허위허위 오르다보니 팔팔한 기운에 걸맞게 배도 또한 빨리 고파진다. 현장법사, 손오공을 채근한다. “오공아, 오공아! 빨리 어디 가서 먹을 것을 좀 구해오너라.” 손오공 근두운 타고 하늘 높이 올라 사방을 둘러보고 멀리 복숭아나무에 잘 익은 복숭아 달린 것 찾아내곤 그거 따다 드리겠다고 찾아 간다. “산이 높으면 반드시 요괴가 있고 골짜기가 험준하면 도깨비가 생긴다
불교의 처음과 끝은 자비심 불자 자비증장 기회 가져야 “자비행은 전법행으로 이어져” 전 회의 이야기를 좀 더 이어나가 볼까요? 무한한 시간과 공간 속에서 ‘푸른 바다의 좁쌀 한 톨’(滄海一粟) 같고, ‘번갯불이나 부싯돌이 부딪쳐 나는 반짝임’(電光石火)처럼 짧은 우리 삶은 어떤 의미를 가질까요? 또 그런 커다란 관점에서 우리 삶의 모습을 살펴본다는 것은 또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갑자기 장자(莊子)의 이야기가 생각나네요. 장자 책의 첫머리가 어떻게 시작하는지 아시나요? 북쪽 바다에 큰 물고기가 있답니다. 그 이름이 곤(鯤)이지요. 그 곤의 크기는 몇 천리나 되는지 모른다네요. 그 물고기가 변하여 붕(鵬)이라는 새가 되죠. 그 새의 크기도 어마어마. 몇 천리가 되는지 역시 모른답니다. 이 붕새가 남쪽 바
시공간, 체험따라 의미 틀려 삶의 고(苦), 다르게 보면 삶의 목표로 다시 다가와 초연한 사고와 수행 자세 필요 인삼과 나무를 뿌리째 뽑아 놓은 현장법사 일행, 붙잡혀 갇히게 되지만 손오공 신통한 술법이 이때 빛을 발한다. 살며시 빠져나와 열심히 도망친다. 청풍 명월 두 사람 한 달 동안 잠들게 만들어 놓고……. 그러는 사이 하늘 세계 강의차 방문했던 진원대선 돌아오고 인삼과 뿌리째 뽑힌 걸 알게 되고 현장법사 일행 도망친 것도 알게 되고 휘익~ 구름을 타고 현장법사 일행을 추격해서 ‘게 섰거라!’ 그런다고 서냐! 그렇지만 진원대선 신통한 술법이 있다. 수리건곤(袖裏乾坤)이라, 소맷자락 속의 세상이란 뜻인가? 휘익~ 소맷자락 한번 쓸어내면 한꺼번에 소맷자락 속으로 휘리릭~ 빨려 들어가 버린다네. 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