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의 종교 인정해야 내 종교 존재 나를 괴롭히는 건 타인 아닌 내 마음 엄마의 기도, 딸의 기도 모처럼 집에서 쉬게 되어 집안일을 하고 있는데 가끔 만나는 친구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만나고 싶다고 해서 그러자고 했다. 어깨가 축 늘어진 친구의 모습은 한눈에 근심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나는 신발도 벗기도 전에 무슨 일이 있냐고 물었다. 친구의 근심은 오래된 것이었다. 친구는 6남매를 두었는데 그중 막내인 딸은 서른이 넘어서 미국에 있는 회사를 다니게 되었다. 좋은 회사를 다니게 된 막내딸은 하루하루를 즐겁고 행복하게 보냈다. 그런데 어느 날 막내딸에게 청천벽력과도 같은 일이 생긴 것이다. 위암이었다. 벌써 1년 전 일이라고 한다. 괴로움과 슬픔으로 가족 모두가 힘든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친
주위에 사경 권하며 전법 철드니 어른들 모두 저세상에 금강경 사경 이야기 나는 올해로 칠순이다. 그동안 부처님의 품속에서 너무나 많은 은혜를 입으며 살아왔다. 무엇으로 보답을 할 수 있을까 고민했다. 나는 20년 전부터 금강경 한글 사경 책을 수 만권 법보시를 해왔다. 하지만 사경본을 낸 일은 한 번도 없었다. 그래서 이번엔 이 사경(寫經)본을 내어 보시하기로 했다. 누구나 따라 쓰면서 좀 더 가까이 금강경을 이해하고 쉽게 받아들이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뜻으로 시작하여 글을 썼다. 한 자 한 자 쓸 때 마다 정성은 물론이고 다른 누군가가 더 큰 신심으로 부처님께 귀의하길 발원했다. 이렇게 하여 천권으로 법보시 하려 했던 일이 동참자가 늘어나면서 4000권을 인쇄 하게 되었다. 이렇게 하여 각자의
장병 위문하러 갔다가 위문받고 공부하고 돌아와 논산 훈련소 군 법당을 다녀와서 논산 훈련소엘 가기로 했다. 내가 만든 공림 공양 모임 회원들이 모여서 가기로 했다. 꼭 한번 가보고 싶었던 곳이어서 밤 내내 설레이기도 했다. 오후 2시에 있을 운문사 수계식에 맞춰 오전 9시에 출발을 했다. 언제나처럼 기도하며 점심도 준비해서 갔다. 나는 16년 전부터 군법당후원회 일을 보고 있다. 그래서 나에겐 이번 방문이 남다르다. 내가 군 법당을 후원하게 된 동기는 내 아들이 군대에 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시 아들은 카이스트 박사 과정에 있었고, 한 달간의 훈련으로 군복무를 대신했다. 아들은 연세대 재학 시절에 불교 동아리 회장을 했었다. 그 동아리 방(법당) 부처님 탱화는 동국대 불교미술학과에 다니는 한
글을 쓴다는 것…‘나’를 쓰는 것 인사는 나와 주변을 유지시키는 것 글을 쓴다는 것 오늘 관음재일이라 절에 다녀오는 길에 전화가 걸려왔다. 아주 오래 전, 아마도 20년도 더 전에 알았던 스님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해도 스님이다. 현대불교 보시다가 나의 글을 보시고 반가워 전화를 하셨다고 했다. 스님은 그동안 어떻게 살았냐며 안부를 물으셨다. 우리 가족들, 아이들 이름까지 우리가 살았던 동네도 모두 잊지 않고 다 외우고 계셨다. 나도 늘 어디에 계시는지 궁금했었는데 스님 목소리를 들으니 너무 반가웠다. 더구나 신문의 내 글을 보시고 연락 주셨다니 신기하기도 했다. 오래전 어느 스님의 말씀이 생각났다. 김해의 어느 비구 스님이 야구를 너무도 좋아해서 야구 경기를 야구장에 직접 가서 한번 보고 싶기도
‘가족’의 범위… 생각하기 나름 자라는 아이 보고 늙는 ‘나’보게 돼 가족 가족이라면 무조건 나와 가장 가까운 사람이라고 생각하겠지만 또 다른 생명도 가족임을 크게 느끼게 되었다. 우리 집에는 기르고 있는 열대어가 있는데, 그 중 ‘구피’라는 작은 물고기를 누가 주어서 작년부터 키워왔다. 나는 옛날 내가 처녀 적에도 집에서 키워본 일이 있어서 그동안 잘 키워왔다. 그런데 몇 차례 새끼를 가진 어미배가 불룩 한 것은 보았는데, 정작 새끼는 보이지 않았다. 아마도 새끼를 낳자마자 다른 물고기들이 어린 새끼를 잡아먹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번에는 어미고기를 작은 어항에 옮겨 따로 있게 해주었다. 아침에 일어나보니 작은 어항엔 새끼 고기가 셀 수조차 없을 만큼 많았다. 놀라운 일이었다. 기
5계만 잘 실천해도… 주고 또 주고 싶은 마음 보며 좋은 인연의 소중함 알 게 돼 수덕사 대중공양 가던 날 2008년 부산불교 신도회에서 1박 2일의 일정으로 수련대회를 간 곳이 공림사(公林寺)였다. 그때 주지 스님이 절 소개를 하시기를 “이곳은 스님들의 수행처로 선(禪)을 하는 곳이어서 일반 기도처와는 다른 곳이고, 수행에만 몰두하고 계시는 스님들이 계신다.”고 했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대중공양을 왔더라도 인연을 밝히지 않아야 하며, 그냥 소리 없이 해야 합니다.”고 했다. 나는 그 말씀이 너무 감동적이었고 멋있게 들렸다. 우리도 이런 소리 없는 대중공양을 해보았으면 하는 마음으로 모임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임의 이름을 ‘공림(功林)공양회’라 지었다. 비록 작은 성금이라도 마음으로
‘63년 전’ 지옥은 우리 스스로 만든 것 죽는 순서 아무도 알 수 없어 이 땅에 다시 전쟁 없기를… 지난 6월 6일 호국영령 추모 법회인 제23회 허공마지 홍법바라밀제가 열린 부산 홍법사에 다녀왔다. 각처에서 모여든 많은 사람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나라와 민족을 위해 목숨을 바친 호국영령들과 순국선열들을 추모하는 천도재를 올렸다. 그 날 행사는 한국전쟁 정전 60주년을 기념하여 유엔 참전용사와 그 가족 열두 분을 초청하여 세계평화를 위해 젊음을 바친 공로에 다시 한 번 고마움을 전하는 아주 뜻 깊은 자리였다. 물론 그들을 위한 행사가 그동안 아주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부처님 도량에서 진행된 행사여서 좋았다. 지금은 팔순을 넘긴 나이임에도 흐트러짐이 없이 군인의 자세를 잃지 않고 있는 그들의 모습
고부갈등… 옛날 말 말한마디로 행복해질 수 있어 ? 며느리 자랑대회 도반들의 모임에서 이런 일이 있었다. 한 사람이 자기 며느리 자랑을 했다. 듣고 있던 또 다른 사람이 자기 며느리 자랑을 했다. 이야기 속에 함께 있다 보니 나 역시도 내 며느리 자랑을 하게 됐다. 나중엔 도반 모두 마치 경쟁이라도 하듯이 서로 며느리 자랑을 하게 됐다. 내용은 조금씩 달랐지만 이야기는 며느리들이 모두 훌륭하다는 얘기다. 사실 우리가 살아온 시대만 하더라도 그렇고 시어머니가 며느리 칭찬을 한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지금 우리 도반들은 며느리와 사이가 좋은 것 같아서 신기하고 흐뭇했다. 우리 도반들이 조금 특별하긴 하지만 일반적으로도 고부간이 예전처럼 힘든 사이기만 하다는 인식은 많이 사라진 시대라고
왕실의 비극 보고 민족애 느껴 영화 ‘길 위에서’ 보고 출가발심 추억 대마도의 덕혜옹주 기념비 얼마 전 여중 동창회에서 대마도에 여행을 갔다. 배를 타고 가는 여행은 자주 있는 일은 아니었다. 그런데 그곳을 다녀온 사람들의 말은 모두가 그곳에 볼거리가 아무것도 없고 다만 쇼핑하기 위해 가는 코스라고 했다. 한 번 다녀왔던 사람은 볼거리가 없을지 모르지만 처음 가는 사람들은 여전히 궁금한 것 아닐까. 생각했다. 대마도는 부산에서 배를 타고 한 시간이면 도착하는 아주 가까운 곳이었다. 그곳에도 꽃이 피고 나무가 봄을 맞이하고 있었다. 이튿날 처음으로 간 곳이 李씨 王家의 덕혜옹주 결혼 기념비가 있는 곳이었다. 비문에는 “조선국 제26대 고종의 왕녀 덕혜옹주는 1931년5월 종무지공과 결혼하여 동년 11
지인 귀의에 ‘불성’ 다시 새겨 돌아볼 것 있을 때 보람 느껴 뜻밖의 교화 친구의 남편 배선생이 있다. 친구는 결혼하기 전부터 친구이지만 그의 남편은 결혼 후에 알게 된 사람이다. 큰 몸집에 거친 말투로 국회에 근무한 사람이었다. 그는 친구의 남편이지만 내가 절에 다니는 것을 못마땅하고 나를 곱게 대하지 않았다. 친구는 서울에서 직장을 다녔는데, 어느 날 부산으로 직장을 옮기게 되었다. 서울의 집을 정리하는 동안 친구는 아이들과 서울에 있어야 했고, 배 선생은 우리 집에서 잠깐 지내게 되었다. 그는 말이 매우 거친 사람이었다. 걸핏하면 내가 절에 돈이나 갖다 바친다며 시비를 걸었으며, 부처님이나 스님에 대해 막말을 서슴지 않았다. 그래서 친구의 남편이었지만 우리는 매우 사이가 좋지 않았다. 내가 심하게
연등은 겉 모양보다 ‘정성’ 풍족하다고 ‘소중함’ 모르면 안돼 망가진 연등 36년 전 1월에 ‘연꽃모임’이란 모임을 창립했다. 그때는 젊은 여자가 절에 가는 사람이 드문 때였다. 나는 26살에 결혼하여 신혼일 때부터 매일 집에서 백팔 배를 하고 경을 읽으며 사경도 했었다. 이유는 날마다 절에 갈 수가 없어서였다. 네 아이의 엄마가 된 후로는 아이들에게 벌을 줄 때도 백팔 배를 시켰다. 아이들이 처음엔 서로 ‘너 때문’이라고 원망을 하다가도 절을 하기 시작하면 조용해지곤 했다. 그리고 절을 마치고나면 밝은 얼굴로 달려와 안기곤 했었다. 먹기 전에는 언제나 3배를 하고 부처님께 공양 올리고 먹게 했다. 그래서 집안 한 쪽에 부처님을 모시고 있었음이 얼마나 큰 위안이 되었는지 모른다. 76년, 처음으
한 사람 맑은 생각이 만 사람 맑게해 시대 변했어도 엄마의 ‘사랑’은 영원 사라진 옛 집을 생각하며 우리 아파트에서 내려다보이는 이웃마을은 오래 전부터 재개발 지역이라고 소문이 나서 늘 시끄러웠다. ‘재개발’이라는 게 시작하기까지도 그렇고, 시작을 하고나서도 그렇고 모든 게 쉽지 않은 일이다. 아무튼 얼마 후 재개발이 시작되었다. 그곳엔 예전에 내가 살던 집도 있다. 그 집엔 부처님을 모셨었다. 매일 기도도하고 많은 스님들과 도반들이 모여 법회도 열고 했던 곳이다. 추억이 많은 집이다. 어느 날, 외출하려 나와 보니 드디어 그 집이 철거되고 있었다. 반쯤 헐려나간 집을 바라보고 있으니 만감이 교차했다. 하루 종일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저녁에 집에 돌아와 보니 집은 완전히 사라지고 없었다. 내가 심
이웃을 돕는 것이 나를 돕는 것 겉보다 속을 중시하는 세상 돼야 지난 2011년 일본에서 큰 지진이 일어났을 때다. 뉴스를 접하고 ‘너·나’를 떠나 같은 인류로서 마음이 아팠다. 또한 자연의 힘이 그토록 위대한 것임을 새삼 느꼈다. 그 위대한 자연 앞에서 인간은 너무나 약한 존재였다. 많은 사람들이 삶의 터전을 잃고 가족을 잃고 괴로워하는 모습은 안타까웠다. 그런데 그토록 어려운 상황에서도 그들은 냉정함을 잃지 않았다. 뉴스를 통해 들려오는 그들의 침착하고 질서 있는 모습에 나는 또 한 번 놀랐다. 황망한 슬픔 앞에서도 주변을 생각하며 행동하는 침착한 그들의 모습은 본받아야 할 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우리나라가 그와 같은 재앙을 겪었다면 우리는 과연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슬픔은
새 인연은 ‘새로운 나’ 만드는 일 만나고 보내고 하는 것이 ‘삶’ 새 인연 내가 40대 초반이었을 때 이야기다. 나는 그 당시에 어디를 가든 항상 작설차를 우려 보온병에 담아 들고 다녔다. 그날도 차를 준비 해 갔다. 함께 공부하는 사람들과 나눴다. 그 중 30대의 남자 한 분이 있었는데 그날 나의 차로 인해 인연이 시작 되었다. 나는 그를 ‘마 선생’이라고 불렀다. 그는 내가 준비해간 차의 맛이 마음에 들었던지 여러 곳을 다니면서 차를 구해 우려 보았지만 그 날의 차 맛과 같은 차를 찾지 못했다고 한다. 그래서 할 수 없이 나를 찾아와서 차를 구해 달라고 했다. 나는 곧 녹차를 주문했고, 며칠 후에 마 선생에게 차를 갖다 주러 갔다. 그 당시 나는 해마다 초파일이면 부부동반으로 회원들과 해인사에
시간은 금, 남은 시간 ‘보은’에 쓸 것 한반도에서 ‘전쟁’ 다시는 안돼 매 순간 열심히 살아야 ? 전쟁이라니 요즘 한반도는 ‘전쟁’이란 말로 시끄럽다. 아니 이미 우리는 전쟁을 치르고 있는 지도 모를 일이다. 총성이 들리지 않았을 뿐, 남북이 서로 주고받은 일련의 입장들은 서로의 살점을 찢어내는 전쟁을 벌인 것이나 다름없다. 폭탄이 터지고 사람이 죽고 해야 꼭 전쟁은 아니다. 서로를 아프게 하고 주변을 걱정스럽게 하고 있으니 사실상 ‘전쟁’이다. 어떻게 해서 찾은 평화며, 어떻게 해서 다시 일으킨 나라인가. 지금의 평화와 발전이 있기까지 우리는 안타까운 전쟁의 역사를 안고 살아야 했다. 말하기조차 조심스럽고 미안해야 하는 역사와 ‘오늘’이다. 이렇듯 어느 나라, 누구의 땅보다 소중한 이 나라에
‘까치집의 닭’ 우리의 삶 보는 듯 편리한 세상이 다 좋다고 못해 ?세상에 이런 일이 어느 날 텔레비전 에서 ‘세상에 이런 일이’ 라는 프로를 보았다. 정말, 세상에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싶었다. 어느 시골 마을에 닭 세 마리가 다른 닭들과 어울리지도 않고 높은 나무 가지위에서 지내고 있었다. 먹이를 구할 때만 잠깐 잠깐 내려 왔다가는 다시 나무위로 올라갔다. 사람도 오르기 어려운 그 높은 나무 위에서 살면서 알도 낳고 했다. 닭 주인은 곡예를 하듯 나무 위로 올라가 알을 꺼내 와야 했다. 그 닭이 그렇게 살게 된 연유는 그 닭이 새끼 병아리였을 때, 11 마리의 병아리가 살았는데 모두 다른 짐승들에게 다 잡아먹히고 자신과 두 마리만 살아남았다. 이때 놀란 병아리가 점점 자라면서 조금 더
‘4’자를 죽을‘사’ 아닌 사랑‘사’로 모든 인연들에게 보답해야 세상의 선입견 엘리베이터를 탔다. 왜 4층만 영어의 F로 표기했을까? 우리 절 2월 방생법회를 떠날 때도 언제나 4호차 대신 5호차로 표시한다. 여기에 이유를 묻지 않아도 나는 그 뜻을 알고 있다. 그러나 나는 그게 못마땅하다. 왜 하필이면 꼭 죽을 ‘사(死)’자로만 해석 하는지. 우리 한글로는 그 4를 사랑으로 표현 하면 될 텐데 말이다. 그래서 한글로 숫자를 바꿔 생각 해 보았다. 1은 일하는 마음으로, 2는 이해하는 마음으로, 3은 세 번 생각하는 마음으로, 4는 사랑하는 마음으로, 5는 오래오래 기억하는 일로, 6은 육바라밀의 마음으로, 7은 7×7의 49의 의미를 느끼며 8은 언제나 팔팔한 건강을, 9는 도를 구하는 마음으로
약속은 빈말이라도 책임져야 자기와의 약속은 더욱 소중하다 외손주와 미국 다녀온 사연 나는 약속은 꼭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7년 전 어느 날 외손주와 이야기를 하다가 무심히 “우리 미국 여행갈까?” 라고 말했다. 생각 없이 그냥 한 말이었다. 그러나 그 말을 한 후의 상황에 달라졌다. “할머니 우리 언제 미국 갈 거예요?” 아이는 기대에 찬 목소리로 재촉했다. 나는 부산에 살고 손주는 서울에 살고 지금은 중학교 3학년이지만 그 당시는 초등학교 2학년 9살이었다. 나는 고민이 되었지만 거짓말쟁이 할머니가 될까봐 “그래 약속을 했으니 가는 거야. 떠날 준비를 하자구나.” 그해 8월에 손자와 단둘이 그 먼 미국엘 갔다. 아무도 아는 이 없는 그곳엔 오직 한사람 거해 스님이 계셨다. 하
형편 어려운 이웃 만나면 더 ‘겸손’ 늘 어딘가에 나보다 큰 마음 있어 ‘마음’ 잘 가꾸는 것이 지혜로운 삶 일타 스님과의 추억 1-빈부의 구별 일타 스님께서 부산 영도 백련암에 보살계를 설하려 오셨을 때다. 법문을 마치고 스님을 우리 집으로 모시기로 했다. 택시로 스님을 모시고 오는 길이었는데, 계속 누군가 우리 차를 따라오고 있었다. 설마 했는데 그 차는 우리 집까지 따라왔다.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함께 자리를 하게 됐고, 다닥다닥 붙어 앉은 채로 스님의 법문을 들었다. 우리 차를 따라온 낯선 보살도 함께 있었다. 나는 주인인 관계로 손님 대접하느라 법문도제대로 듣지 못하고 분주하기만 했다. 꾀 늦은 시간까지 행복한 법회를 마치고 헤어질 때였다. 그 낯선 보살이 스님을 모시고 가겠다며 기다
주위를 바라보는 것도 ‘신행’ 들으려 할 때 들리는 ‘법문’ 나의 작은 존재가 세상의 시작 육교 위에 핀 쑥 시간이란 것이 눈에 보이진 않지만 시간은 늘 흘러가고 있다. 새해인사를 나눈 지가 어제 같은데 벌써 3월이다. 며칠 전이었다. 저녁 시간에 전철에서 내려 육교를 건너는데 육교 위에서 할머니 한 분이 바구니에 무언가를 올려놓고 팔고 있었다. 할머니와 바구니에 눈이 가서 발길을 멈췄다. 그리고 왠지 그냥 지나쳐 갈 수가 없었다. 무엇이 되었든 팔아드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바구니에 무엇이 들어있나 들여다보았다. 쑥이었다. 이 추운 날씨에 벌써 쑥이라니 3월이긴 해도 아직은 추운데. 내가 느끼는 계절만 계절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고, 어김없이 흘러가고 있는 계절을 생각하니 사람처럼 게으른 게 없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