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동마침내나무는 계절을 깨닫고그리하여 숲은 게송으로 그득한데부처의 수기는 끝나지 않는가지울 수 없는 글자는석탑 위에 다시 쌓인다그렇게 수없이 부처를 만나온 것을돌고 도는 석탑의 그림자가 만다라였음을탑전에 찬바람이 스친다
나의 이름나의 이름이나 없는 세상에 남게 될 때나의 이름은누군가의 말(言) 속에 남기보다는누군가의 가슴 속에 남기보다는누군가의 발자국 위에 남고 싶다눈 내리는 날,산사로 가는 흰 발자국에 한 번기도하는 맑은 발자국에 한 번풍경소리에 길 잃은 발자국에 한 번
오늘을 맞는다는 것저녁 창을 바라보는 일에도이유 하나쯤은 있는 것인데다한 것들을 스치는 일에는붉어진 눈 한 켤레쯤 있어야 하리‘오늘’은 그런 것이니말없이 살아가는 모든 것들과말없이는 살아가지 못하는 것들이이 아침에 다시 만나는 일에는꽃보다, 하늘보다, 바람보다더 오래된 가슴 하나는 있어야 하리
生이여… 누가 놓고 갔을까이 뜨거운 한숨을이 무거운 시간을작은 촛불 마다켜켜이 생은 쌓이고뜨거운 촛농은 법문처럼 떨어진다두 손을 포개겨우 열 개의 손가락을 만들고두 눈을 감아겨우 촛불을 끄고生이여…
저무는 시간태양은 스러지고흘러가던 시간은잠시 각자의 것뒤돌아본다지나온 시간은 그립고지금 이 자리는 눈물겹다저무는 시간가슴은 스러지고물 위의 법당으로시간은 다시 흘러간다
금당으로 가는 길계절을 오는 것으로만 알았지사는 일도 그랬지다가오는 것들만 보였지언제부턴가 계절은 가는 것이었지사는 일도 변했지지나간 것들이 더 선명해졌지그리고 언제부턴가는계절이 가는 걸 알지 못했지어느 늦은 가을날금당으로 가는 길에서바람에 날리는 마른 낙엽을 만났지하필 금당으로 가는 길에서
아침 공안온 산엔 차가운 안개온 하늘엔 울음 한 점이 순간의 인연은 그것뿐산새의 작은 눈에도 세상은 끝이 없고산새의 작은 날개는 끝없이 하늘을 기다리니어디부터가 절이고어디부터가 나인가어디까지가 어제고어디까지가 오늘인가
계절의 힘피었던 것들은 지기 시작하고이름 있는 것들은 모두 자신의 이름 앞에 선다적적하고, 아프고, 시리고, 미어지고나무가 마른 가지를 드러내고새들은 더 멀리 울어야 하고‘무정’이라 이름 지어진 것들의 이름에도찬바람은 불어서 기어이 길은 또 어려워져만났던 것들이 그 길 위에서 이별을 하고가까이 있는 것들과 멀리 있는 것들 사이에서해는 또 저문다이 별도 어제 보단 작아졌으리하물며 나의 이름쯤이야
그리운 도반바람이 차가워지면가슴은 깊어지기 시작한다눈에 보이는 것마다귀에 들려오는 것마다가슴에 쌓여걸음은 쇠처럼 무겁고입 안엔 단 하나의 이름이 고인다눈에 보이는 것마다귀에 들려오는 것마다그 이름을 거쳐 오고짙어가는 단풍 앞에서방법은 없다
꽃이고 싶다아팠던 날들 생각하면꽃이고 싶다부끄러운 날들 생각하면꽃이고 싶다죄 많은 날들 생각하면꽃이고 싶다그렇게저무는 저녁이면나는 단지 꽃이고 싶다길이 없는 새벽이면나는 오늘뿐인 꽃이고 싶다바람에 돋고 바람에 지는꽃이고 싶다
가을 문턱이제 무엇을 바라보아도그것들은 모두 쉽지가 않다아침 길에 마주친 노인의 먼 시선과다시 시작된 가을의 조짐과향 한 자루에 타고 있는 오늘과석양 끝에 보이는 내일과한 없이 작은 나와창가에 찾아오는 저녁과끝내 알 수 없을 것 같은 삶과이 가을 문턱을 넘어야 하는 모든 것들이
하루가 간다오늘 하루도 지나간다. 길겠구나 싶었는데 어느새 신을 벗고, 몸은 고단하게 내려앉는다. 끼니마다 수저를 들고, 어제 한 근심 다시 펴고, 풍경(風磬)소리 몇 번, 바람소리 몇 번에 하루가 또 간다. 이루지 못한 것들과 그리운 것들이 두 눈을 감게 하고, 반야심경, 화엄경, 금강경도 어쩌지 못한 하루가 또 간다. 한 줄 독경보다 짧은 하루가 또 지나간다. 난리 같았던 이 여름도 다 되어간다.
돌담풍경꽃은 피고 지는 때가 있고햇살은 들고 나는 때가 있고뙤약볕에도 돌담은 그늘을 드리우니풍경은 늘 여법하다많은 눈길에도 꽃은 달라진 것이 없고지나는 바람에도 풀들은 자리를 옮기지 않으니말없이 살아도 법도가 우리보다 나은 것을언젠가는 닮을 수 있을까돌담이 드리우는 그늘을변함없이 살다가는 꽃송이와 풀잎들을…
고해(苦海)오늘, 누군가는 떠났고누군가는 또 남았다떠난 이는 모든 것을 해결했고오늘은 또 숙제로 남는다소겁 속의 하루사겁 속의 하루그 기막힌 순간에풀들은 하염없이 돋고바위틈으로 냇물은 흐른다한 곳에 있지 못하는 것들만이떠나고, 남고시간을 세고
무정의 시간에서수많은 별들을 지나온 햇살과수많은 계절을 지나온 풀들이먼저 시간이 되고먼저 길이 되어간다우리의 시간이란 그렇게그들의 여부에 달렸으니우리의 길이란 것 또한 그렇게반 발짝도 그들의 앞에 설 수 없음이니이 아침에 근심이 있고 없고는이미 이 시간의 사안이 아님을풀들이 햇살 쪽으로 기우는 것도이미 부처님이 말씀하셨으니북치고 종치고 눈을 감아도내 것은 내 것네 것은 네 것일 뿐
나무 아래서여름햇살 아래나뭇잎 짙어간다나뭇잎이 짙어가는 것은세월 또 흘러가는 것을뻔한 나뭇잎은 신기하고세월은 보이지 않으니그 많은 후회의 빌미가다른 게 아니었네한 시절 나무였던 나무이제는 ‘生’과 무관하고분명한 이름 아래 서있던 석조들이제는 역사와 무관한데그 ‘무관’ 위에 앉아서짙어가는 나무만 보일 뿐매일 보는 산 아래가 궁금할 뿐그 많은 후회를 어찌하려고
저녁 하늘저녁 하늘에두견새 운다바람 같은 그 소리에지나온 날들 날아든다한 소절도 안 되는 그 소리에부처도 있고 나도 있다저녁 하늘에두견새 운다산새 소리 한 소절이가슴을 허문다천언만자가 저 한 소절을어찌 적을 것인가
대답 없는 이름먼 곳에서또 이름 하나 태운다어제까지 생생했던 이름뜨거운 불 속으로 사라진다오는 것도 한 순간사라지는 것도 한 순간그 한 순간과 한 순간 사이를설명할 길이 이곳엔 없어그렇게들 가는가먼 곳에서또 이름 하나 태운다타버린 이름돌 위에 남고불러도 대답은 없다움이 된다.
마음누군가 건네는 차 한 잔에말라붙은 마음 다시 숨을 쉬고초면의 얼굴이 주고 간 다정함에젖었던 마음 다시 펄럭여본다때로는,내가 너에게 해줄 수 없고네가 나에게 해줄 수 없는 것들이너와 나의 바깥에 있었다어쩌다 찾은 산사의 적막적막 너머에서 들려오는 풍경(諷經)소리이름 모를 이들이 쌓아 놓은 적석탑문 밖에 걸린 연등의 그림자문 밖에 걸린 것이 연등뿐일까매일매일 문 밖에 마음 걸어놓고 산다
4월달라진 바람이 몇 번조용히 비가 몇 번그래서 달라진 아침이 몇 번빈 하늘에 내가 몇 번꽃이 핀 자리엔 옛날이 몇 번검버섯 핀 석탑 위로 풍경소리 몇 번그리고 부끄러운 날들이 몇 번그렇게 4월이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