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에 얼룩진 산사의 애처로움 이항복은 임진왜란을 겪은 선조 때의 문인이다. 7년에 걸친 전쟁 뒤에 용문사는 상당히 피폐했다. 시의 도입부에는 그러한 정황이 잘 드러나고 있다. 오래된 절에 스님은 몇 명 되지 않고 축대가 허물어져 늙은 나무가 더 애처롭게 보인 것이다. 이어서 요란한 물소리와 고요한 말소리를 대비시켜 시적 긴장을 팽창 시키고, 깊은 산의 적막에 빠져 있는 북쪽과 서쪽의 풍치를 보이며 더욱 애잔한 감상을 드러낸다. 마침내 시인은 구슬픈 노래 소리에 시 한수를 지을 생각마저 놓치고 만다. 구슬픈 노래는 새소리일 수도 있고 사람의 울음일 수도 있겠다. 이항복이 들린 용문사 풍경은 장엄한 도량이 아니라 전쟁에 피폐된 서글픈 풍경으로 객을 맞았다. 그러니 객인들 유장한 시를
천년고찰과 천년 은행나무 정상 해발고도 1157m의 용문산이 품고 있는 용문사는 신라 신덕왕 2년(913)에 대경(大境)대사가 창건한 것으로 전한다. 이 천년고찰은 1100살 은행나무와 함께 널리 알려져 있다. 천연기념물 제30호로 지정된 용문사 은행나무는 마의태자가 망국의 한을 담아 심은 것이라는 설도 있다. 키가 40m로 우리나가 은행나무 가운데 가장 큰 키다. 큰 산과 큰 나무를 배경으로 한 도량은 깊은 역사와 함께 많은 고승들의 흔적이 있기 마련. 용문사도 예외는 아니다. 신라의 대경대사 창건 이후 고려 우왕 4년(1378)에 정지국사 지천이 대장전을 짓고 개성 경천사에 있던 대장경을 이전하여 보관했다. 이 대장경은 원래 강화도 용장사에 있던 것으로 왜구의 노략질에 화를 입을까 염려하여 개성 경천
이근원통 수행 관음신앙의 중심 도량인 낙산사를 주제로 시를 지으려면 관음신앙과 낙산사의 역사에 대한 식견이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저 눈에 보이는 것을 묘사할 뿐 시적인 의미를 얻을 수는 없을 것이다. 물론 시를 읽는 사람도 마찬가지다. 낙산사의 역사와 관음신앙에 관련된 상식이 없으면 시구의 깊은 뜻을 알아 챌 수 없다. 그렇다고 아주 깊은 학문적 식견을 요구하는 것은 아니다. 김부의(金富儀 1079~1136)의 시 ‘낙산사’를 읽으려면 관음신앙과 ‘이근원통(耳根圓通)’ 수행에 대해 알아야 한다. ? 일자등림해안고(一自登臨海岸高) 회두무부구진로(回頭無復舊塵勞) 욕지대성원통리(欲知大聖圓通理) 청취산근격노도(聽取山根激怒濤) ? 처음 오른 바다 언덕 높기도 하여라. 머리 돌리매 다시 묵은
관음신앙의 중심 도량 금강산과 설악산의 절경을 곁에 두고 일망무제의 푸른 동해에 접해 있는 낙산사(洛山寺)는 우리나라 관음신앙의 중심 도량이다. 신라 때 의상대사가 이곳에서 기도하여 관음보살을 친견하고 절을 창건했고 원효대사도 이곳에 와서 관음보살을 친견했으며 범일국사 또한 정취보살을 친견하여 절을 더욱 확장 했다고 전한다. 낙산사의 이름 역시 관세음보살의 상주처인 보타락가산에서 온 적이다. 승경(勝景)으로서의 낙산사를 말할 때는 일출과 월출을 감상하는 풍류를 빼 놓을 수 없다. 낙락장송으로 둘러싸인 절의 고즈넉한 분위기를 사랑한 시인묵객들이 찾아와 시를 짓고 그림을 그렸다. 이식(李植 1584~1647)이 “안견의 수묵화와 임억령의 시, 천년 가람은 두 사람의 시화로 기이해 졌네”
배 타고 남한강 거슬러 올라 요즘 자전거를 타고 서울의 한강을 거쳐 팔당 양평 이천 충주로 달리는 ‘남한강 종주코스’가 인기다. 조선의 선비들은 배를 타고 한강을 거슬러 여강을 거쳐 충주까지 가는 코스를 좋아 했다. 그런 코스를 유람하는 것은 아주 큰 호사였을 것이다. 김창협(金昌協 1651~1708)의 ‘벽사(?寺)’라는 시는 서울에서 배를 타고 신륵사 앞까지 올라가 절 풍경 속에서 나옹 스님과 목은의 자취를 그리고 박은(朴誾)의 시를 찬탄하는 내용으로 엮어진 20행의 칠언고시다. 제목 ‘벽사’는 신륵사의 다른 이름인데, 벽돌로 쌓은 탑이 있기 때문에 지방 사람들이 그렇게 부른 것이다. 시의 후반 10행을 본다. ? 사문노회기소슬(寺門老檜氣蕭瑟) 동대쌍탑고줄올(東臺雙塔高?)
좋은 풍경은 시심을 돋우지만 풍경만으로 시가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 풍경에 인연된 이야기가 녹아 있어야 한다. 시 속의 이야기는 어떤 사실을 전하기도 하지만 묘한 상징이 되어 풍부한 상상력을 자극하기도 한다. 풍경과 이야기가 잘 정제된 시는 맛이 잘 든 술과도 같다고나 할까? ? 세속 일을 떨치고 싶은 마음 신륵사의 경우 누구나 홀딱 반할 절경과 천년 고찰에 담긴 이야기가 있으니 시 창작 공간으로서의 조건을 잘 갖추었다고 할 수 있다. ? 장암평첩가반각(長巖平?可盤脚) 청풍은행고림유(靑楓銀杏高林幽) 부시징담백척강(俯視澄潭百尺?) 청소획연경양후(淸嘯劃然驚陽侯) ? 긴 바위가 평평하여 앉아서 쉴 만한데 푸른 단풍 은빛 은행에 숲은 그윽하여라. 맑은 못물 굽어보니 백 척이 넘을 듯해
나옹 스님의 열반도량 남한강의 유려한 흐름, 그 여정의 절정은 여강(驪江)에 있다. 태백 검룡소에서 발원한 남한강이 여주 지경에서는 여강이란 이름으로 불린다. 그 승경(勝景)의 백미는 봉미산 아래 신륵사(神勒寺) 일대다. 낮은 산은 절을 품었고 절은 유유히 흐르는 강물을 품고 있다. 고즈넉한 산사의 풍경은 동쪽 언덕 높은 전탑(塼塔 보물 제226호)과 팔각정자 강월헌(江月軒)으로 인해 완성된다. 신륵사는 고려 말의 고승 나옹혜근(懶翁慧勤 1320~1376)이 열반한 곳이다. 신륵사에는 나옹 스님의 부도와 탑비가 있다. 또 동쪽 전탑 아래 강을 연접한 커다란 바위 위에 작은 3층 석탑이 있는데 나옹 스님을 화장한 곳임을 기리기 위해 세운 것이라 한다. 산과 강이 멀지 않고 그 사이에 소담하게 자리한 절
관촉사를 대표하는 ‘은진미륵’ 즉 석조미륵보살입상은 고려 말의 목은 이색이 시로 읊은 이후 조선의 선비들에게도 시의 테마가 되곤 했다. ? 같은 불상 다른 느낌, 무상 속의 절 조선 중기의 선비 성현(成俔 1439~1504)의 문집 〈허백당시집(虛白堂詩集)〉 제2권에 수록된 ‘관촉사’라는 제목의 시를 보자. ? 노방유고찰(路傍有古刹) 초초과웅강(超超跨雄岡) 정중장륙신(庭中丈六身) 외아용원창(嵬峨聳圓蒼) 석유호사자(昔有好事者) 구차백척장(?此百尺長) 항하억만계(恒河億萬界) 변화수능량(變化誰能量) 관이시혜로(灌以施慧露) 촉이명호광(燭以明毫光) 사제사황홀(沙梯?惚) 후인안족상(後人安足詳) 당시루전성(當時樓全盛) 금벽다휘황(金碧多輝煌) 지금취매몰(至今就埋沒) 유유담경당(惟有談經堂
다산 정약용의 아버지 정재원의 시는 백련사의 외양을 아주 잘 드러내고 있다. ‘금릉의 옛 절 쓸쓸하여 고요하다’는 표현에서 조선 후기 백련사의 사세를 짐작할 수 있다. 한 때 백련결사로 수행의 일가를 이루었던 옛 절이 ‘억불숭유’의 시절 인연 속에 초라하게 명맥을 잇고 있는 모습이 그려지는 것이다. ?혜장 스님과 다산의 만남 강진은 다산의 유배지다. 다산은 유배지에서 학문과 문학을 더욱 연마했기에 500여 권에 이르는 방대한 저술을 남겼다. 그의 유배생활에 신선한 활력소가 되었던 공간이 바로 백련사다. 백련사의 스님 혜장(惠藏)과의 만남은 그에게 새로운 세계를 열어주는 계기가 되었다. 불교에 대한 시각의 변화와 다도(茶道)를 통한 심신의 안정이 그의 학자적 정신을 고양시켰던 것이다. 1801년 강진으로
동백과 다산의 얼이 스민 고찰 “전라도 강진현(康津縣) 남쪽에 산이 있어 우람차게 일어나 맑게 빼어나고 우뚝하여 바다 기슭에 접하여 그쳤으니, 이름은 만덕산(萬德山)이요, 산의 남쪽에 사찰이 있어 통창하고 광활하여 한 바다를 굽어보니, 이름은 백련사(白蓮社)다. 세상에 전하는 바에 의하면 신라시대에 창설되고 고려 원묘(圓妙)국사가 중수하였으며, 11대를 전하여 무외(無畏)국사에 이르도록 항상 법화도량(法華道場)이 되어 동방의 명찰이라 일컬었다.” 고려말에서 조선 초기를 살다간 윤회(尹淮 1380~1436)가 쓴 ‘만덕산백련사중창기(萬德山白蓮社重創記)’의 도입부다. 서거정 등이 편찬한 〈동문선〉 제81권에 실려 있다. 이 중창기가 말해주는 것처럼 강진 백련사(白蓮寺)는 신라 고찰이고 고려의 원묘국사가 백련
아름 난 절과 길의 조화 조선 후기의 ‘강화학파’를 계승한 학자 이긍익(李肯翊 1736~1806)은 고증(考證)을 역사의 생명으로 여겼다. 그의 대표적인 저술 도 객관성과 공정성 등을 중시하며 지은 책이다. 별집 제16권 ‘산천의 형승’ 부분에 오대산을 소개하는 대목이 있다. ‘강릉부의 서쪽 1백 40리의 거리에 있다. 동쪽에는 만월봉(滿月峯), 남쪽에는 기린봉(麒麟峯), 서쪽에는 장령봉(長嶺峯), 북쪽에는 상왕봉(象王峯), 중앙에는 지로봉(智?峯) 등 다섯 봉우리가 둘러섰는데 각 봉의 대(臺)마다 각각 한 암자가 있다. 산 아래에 월정사(月精寺)가 있고 절 곁에는 사고(史庫)가 있다. 또 금강연이라는 못이 있는데 사면이 모두 반석이며, 폭포가 10척(尺)을
명산 중의 명산 오대산 ‘국내의 명산 중에서 가장 좋은 곳이고 불법(佛法)이 길이 번창할 곳이다.’ 일연 스님은 〈삼국유사〉에 오대산 월정사를 이렇게 표현했다. 신라의 자장율사(慈藏律師)가 643년(선덕왕 12)에 창건한 월정사는 우리나라 문수신앙의 성지(聖地)이기도 하다. 많은 고승대덕들이 머물며 수행과 전법을 이어 온 월정사는 한국전쟁으로 가장 크게 훼손 되었다. 1.4후퇴 때 아군에 의해 10여동의 건물이 전소되었고 양양의 선림원지에서 발굴된 신라시대 범종마저 불타버렸다. 이 종은 신라 성덕대왕신종보다 주조연대가 앞선 것이어서 매우 귀중한 성보였기에 안타까움이 더한다. 전쟁으로 인해 폐허가 된 월정사는 1964년 탄허(呑虛 1913~1983)스님이 적광전을 중건하면서 중창이 시작되어 오늘날까지 불
‘안수정등’의 가르침 비승비속으로 전국을 떠돌던 김시습이 금산사에서 하룻밤 묵으며 남긴 시를 차운한 윤증(尹拯 1629~1714)작품이 돋보인다. 윤증은 우암 송시열의 제자였으나 후에 그와 학문과 정치적으로 대립한 소론의 영수였다. 학문도 깊었지만 효행의 실천이 남달랐던 그의 문집 〈명재유고〉 1권에 금산사와 관련한 시가 보인다. 먼저 김시습의 시를 차운한 작품을 보자. 제목은 ‘금산사(金山寺)에 노닐며 김열경(金悅卿)의 시에 차운하다[遊金山寺 次金悅卿韻]이다. ? 부세수여차지관(浮世誰如此地寬) 세심태경도청단(細尋苔徑度淸湍) 소번자문수등정(疎煩自問垂藤井) 선승선등노회단(選勝先登老檜壇) 답장증하추색힐(沓蒸霞秋色?) 만임비우간성한(滿林飛雨澗聲寒) 청풍홀억동봉자(淸風忽憶東峯子) 삼창유편야이란(三
신령한 풍경 속에서 찾는 ‘묘한 경지’ 금산사를 읊은 고려 선비의 시로는 이곡(利穀 1298~1351)의 작품이 전한다. 이곡은 고려 말의 문신으로 원나라에서 벼슬을 오래 했다. 관료로서의 인격도 곧아 한 시대의 존경을 받았고 문학적 재능도 뛰어났다. 그가 지은 〈죽부인전〉은 대나무를 의인화 한 것으로 가전체 문학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목은 이색의 아버지다. 그의 문집 〈가정집〉 제20권에 ‘금산사(金山寺)의 벽 위에 있는 시에 차운하다’라는 시가 실려 있다. ? 춘도청구일욕중(春到靑丘日欲中) 승유요급미농공(勝遊要及未農功) 위심해상봉래경(爲尋海上蓬萊境) 인방인간도사궁(因訪人間覩史宮) 위구첨아마북두(危構?牙磨北斗) 법음탁설어동풍(法音鐸舌語東風) 갱사장구궁유절(更思杖?窮幽絶) 만학연하로역궁(滿
개산 1300년 넘은 법상도량 전북 김제 금산사는 모악산(母岳山 794m)을 병풍처럼 배경삼아 자리한 고찰이다. 1635년에 지어진 〈금산사사적〉에는 이 절이 서기 600년(백제 법왕2)에 지어진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반면 1492년에 씌어진 〈금산사5층석탑중창기〉에는 과거불인 가섭불 때의 절터를 중흥시켰다고 하여 이 절이 불연(佛緣) 깊은 곳임을 강조하고 있다. 금산사는 진표율사(眞表律師 ?~?)에 의해 신라 경덕왕 때인 762년에서 766년 사이에 중창되며 법상종의 근본도량으로 자리 잡았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후 많은 보수와 중건을 하며 오늘에 이르러 지금은 조계종 제17교구 본사다. 미륵전(국보 제26호)을 비롯한 많은 국보와 보물을 간직하고 있으며 근래 개산 1300주년을 기념하는 각종
부목화상과의 깊은 교유 이색의 문집에는 송광사 부목화상(夫目和尙)과의 교유시가 5편 가량 수록되어 있다. 부목화상의 전기는 미상이지만 당시 영향력 있는 스님이었고 이색과는 상당한 교분이 있었음을 시를 통해 알 수 있다. 송광산초체(松廣山?遞) 명전대길상(名傳大吉祥) 장신능간고(長身能幹蠱) 대후위반향(大后爲頒香) 주실청풍탑(籌室淸風榻) 납의명월랑(衲衣明月廊) 삼생습기탁(三生習氣濁) 회수경창망(回首更蒼茫) ? 송광산은 아스라이 멀리 있어 이름은 대길상이라 전해 오는데 큰 체구는 선대 사업을 잘 이행하고 태후께서는 위하여 향을 내리었네. 주실엔 청풍의 선탑이 놓여 있고 납의는 밝은 달 아래 복도를 거닐리. 나는 삼생의 습기가 혼탁한지라 머리 돌리니 다시 아득하기만 하네. -이색
결사정신 이어 온 승보종찰 열여섯 명의 국사(國師)를 배출한 승보종찰(僧寶宗刹) 송광사의 연원은 신라 말로 거슬러 올라간다. 〈송광사사적비〉와 〈보조국사비명〉 등에 나오는 바에 의하면 신라 말 혜린선사(慧璘禪師)가 터를 잡고 길상사(吉祥寺)를 창건하고 산 이름을 송광산이라 했다. 이후 길상사는 스러져 폐허가 되다시피 했었다. 고려 말 보조국사 지눌(知訥 1158~1210) 스님이 정혜결사(定慧結社)를 결성하여 길상사를 수행 도량으로 삼으면서 새로운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이후 고려 희종으로부터 절 이름을 ‘수선사(修禪社)’ 산 이름을 ‘조계산(曹溪山)’이라는 친필 사액을 받았다. 송광사는 퇴폐해 가는 고려 불교에 새로운 수행의 바람을 일으키며 정혜결사의 정신을 이어 오는 동안 우뚝한 걸승들을 배출하고 시
승가대사의 행적 담긴 고찰 승가사(僧伽寺)는 삼각산 비봉 아래 위치하는 고찰이다. 권 64에 전하는 이예(李預 )의 ‘삼각산중수승가굴기(三角山重修僧伽?記)’를 통해 그 창건 연원을 보자.? 최치원(崔致遠) 공의 문집을 보면, “옛날 신라 시대에서 낭적사(狼迹寺)의 중 수태(秀台)가 대사의 거룩한 행적을 익히 듣고, 삼각산(三角山) 남쪽에 좋은 장소를 골라 바위를 뚫어 굴을 만들고, 돌을 조각하여 얼굴을 묘사하니 대사의 얼굴이 더욱 우리나라에 비치었다. 국가에 천지의 재변이 있을 때나 수재나 한재 등 모든 의심스러운 일이 있을 때에, 기도를 올려 이를 물리치면 그 자리에서 응답을 받지 않은 적이 없었다. 여기서 말하는 대사란 승가대사(僧伽大師 627~708)를 말한다. 기문을 쓴 고려의 문신 이
불국을 향한 민중의 바람 경주 불국사(佛國寺)는 근래까지 만해도 학생들 수학여행의 1번지였고 신혼여행 효도관광의 필수코스로 기억되는 곳이다. 해외여행이 대중화된 요즘에도 불국사는 우리 국민에게 중요한 관광코스이고 외국여행객들에게도 매우 기억의 남는 여행지로 각인되고 있다. 고도 경주라는 지리적 특성과 주변의 풍부한 역사유적이 불국사를 수학여행 뿐 아니라 한국관광의 1번지로 손색없게 하고 있는 것이다. 〈삼국유사〉에는 불국사가 신라 경덕왕 10년(751) 김대성(金大城)에 의해 창건되었다고 전하고 있다. 절이 유난히 많았던 신라의 도읍 경주에서도 대표적인 사찰로 위용을 떨쳐 온 불국사는 숱한 병화(兵火)를 입으면서 오늘까지 그 맥을 지켜오고 있다. 불국사가 종교적 측면에서의 가치와 더
하룻밤 절집에 함께 자면서 일찍부터 시재(詩才)를 드러내 주목 받았던 백광훈은 진사나 참봉쯤의 벼슬을 살기는 했지만, 출세의 길에 들지 않고 강호로 몸을 피해 자오(自娛)의 삶을 누렸다. 당대의 명유(名儒) 문객과 두루 교유하기도 하며 문장을 떨쳐 8문장의 하나로 꼽히기도 했고, 글씨를 잘 써 영화체(永和體)에 일가를 이루기도 했다. 1578년 8월 11일 삼당시인이 봉은사에 모여 하룻밤을 함께 지냈다. 북쪽으로 떠나는 이달을 전송하는 송별모임이었다. 세 시인은 시풍을 함께 나누는 글벗이기도 했고 맑은 기상과 가난이라는 재산도 공유하고 있었다. 그들은 봉은사를 자주 찾았고 동호 인근의 한강 풍경을 함께 감상하기도 했다. 세상에서 그들을 삼당시인이라 불러주지 않아도 이미 그들은 지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