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이 필경 ‘무소득’ 있고 없고를 초월해서 불가사의한 일이다 부처님의 설법은 어리석은 중생을 위한 방편 “32상 80종호 갖춰야 중생도 부처 되는 것 아닙니까 어찌 그것이 허망합니까” “무릇 형상 있는 것은 모두가 허망한 것이다 형상이 형상 아님을 보면 곧 여래를 보리라” 교학에서 ‘無學’은 더이상 수행할 것 없고 선에서는 ‘본래무학’ 있음 자각하면 그뿐 ?나[我]도 오히려 얻을 수 없는데, 나 아님[非我]이야 어찌 얻을 수 있겠는가! 부처와 중생을 모두 다 얻을 수 없다.” ?위의 말은 《유마경》의 〈입불이법문품〉에서 인용한 것이다. 〈반야심경〉에서 ‘이무소득고’ 하듯이, 성품의 입장에서는 모든 것이 필경 ‘무소득’이다. 그것은 모습이 있고 없고를 초월해
깨달음은 마음에 달린것 육도만행과 상관없어 육도만행은 교화의 방편???????????????? 피안행 징검다리 놓기위해 선업쌓고 공부하도록 유도 ? 눈을 뜬 뒤 지식 내려놓아야 체득되지 않은 지혜는 알음알이 되어 공부 장애 크게 깨달으면 묵연히 계합 ? 십지·사과 등 성위 도달해도 오도의 근거 지니지 못한다 ? 부처님·나·일체중생 성품 전혀 다르지 않음 깨달으면 진여·법성·해탈·보리·열반 ? 4. 마음과 성품은 다르지 않다 ? 배휴가 물었다. “마음이 본래 부처인데, 육도만행을 다시 닦아야 합니까?” ? 배휴 정승은 “마음 알았으면 그만이지, 왜 또 육도만행을 닦아야 합니까?” 하는 미묘한 갈등이 있었던 것 같다. 알음알이로는 생로병사 같은 인생의 근본문제로
법신은 달이고 보신은 달빛이며 화신은 달 그림자 “보신·화신은 인연따라 만들어진 모습일뿐 법을 설하는자 아니다” 아상과 인상 없으면 본래 그대로 부처다 아상·인상은 본래 없는것 인연따라 나타나는 ‘상’을 끊으려 함은 어리석은 일 ‘본래 없음’ 철저히 자각해야 ? 인연이 다하면, 모든 것은 무상(無常)으로 돌아가고 만다. 일반적으로 몸을 지니며 쓰고 사는 한, 선업을 짓고 좋은 결과로 나투는 것이 좋다. 그래서 악을 멀리하고, 선을 가까이 하라는 것이다. 그렇지만 부처의 입장은 다르다. 부처는 지옥에 있든 천상에 있든 상관없이 늘 여여해서, 한 번도 만들어지고 변해 없어지는 모습을 지닌 적이 없다. 알고 보면 모든 변화하는 모습은 다 허망한 일이다. 그래서 한 생각 돌이켜서,
우는아이 달래기 위해서 나뭇잎 돈이라 눈가림 하듯 말 역시 ‘도’ 깨닫게 하는 장치 이름 붙일 수 없는 것들을 억지로 마음이라 부른다 이 마음이 부처요, 무심이 道 ‘평상심이 도다’ 곧 무심 눈앞에 다 드러나 있으나 한계 그을 수 없는 ‘평상심’ 허공은 마음과 모습같으나 신령스러운 기운이 없다 허공은 법신의 실상 자리와 둘이 아니지만 비유일 뿐 이번 호부터는 〈전심법요〉에 이어 〈완릉록〉을 연재한다. 둘 다 상공 배휴가 묻고 황벽선사가 대답한 기록인 점은 같다. 다만 전자는 당(唐) 842년에 배휴가 종릉의 관찰사로 일할 때 기록한 것이고, 후자는 6년 뒤인 848년 완릉에서 적은 것이다. 완릉은 안휘성의 성도로서, 양자강 남쪽 구릉에 위치한 교통의 요지다. 전편에서는 질문자를 ‘
“때 묻었으면 털고 닦아야” 신수게송은 유위법 입장 무위법 육조게송과는 ‘空을 소화 했나 못했나’ 차이 ? “법이란 본래 법이어서 법없는 법을 법이라 한다” 마을에 살더라도 안목 열렸으면 출가자 같다 ? 육조 “선도 악도 생각말고 부모가 낳기전 본래 면목 나에게 가져와라” 도명 “마치 물을 마셔보고 차고 따뜻함을 스스로 아는 것과 같습니다 ? 육조께서 조사가 되다 ? 배휴가 또 물었다. “육조께서는 경전도 읽을 줄 몰랐는데, 어떻게 법의를 전수받고 조사가 되셨습니까? 신수 상좌께서는 오백 대중의 수좌로서 교수사(敎授師)의 임무를 맡아 32부의 경론을 강의할 수 있었는데, 왜 법의를 전수받지 못하였습니까?” 황벽선사께서 말씀하셨다. “신수스님에게는 마음이 남아있
?'제행무상 이것이 생멸법’ 〈열반경〉의 유명한 사구게 안목에 눈떠 배우고 익히면 방편지가 새로워져서 자신뿐 아니라 타인도 이익 눈 밝은 스승 만나지 못하면 대승의 ‘法藥’ 잘못 먹게 돼 선지식 병에 걸리게 되면 갈피 못잡아 바른길 잃어 마음갖고 禪과 道 배우는 것 불법과 무슨 상관 있겠는가 유위의 생멸법은 불법과 아무런 상관 없다 얻을 법 없는 것이 ‘아뇩보리’ 그대는 보지 못했는가? “제행이 무상하니, 이것이 생멸법이다.[諸行無常 是生滅法]” 하신 말씀을. 그리고 “힘이 다한 화살은 다시 떨어지니, 뜻대로 되지 않을 내생을 초래할 것이다. 어찌 무위의 실상문[無爲實相門]을 한 번에 뛰어넘어 여래지에 곧바로 들어감만 같으리오.”라고도 하셨다. 아쉽게도 그대는 이 정도의
“어떤 것이 속제 입니까” “본래 청정한 것인데 언성 빌려 문답하겠는가 일체 마음 없는 것이 무루지” ‘무루지’ 번뇌 새지 않는 지혜 아라한·벽지불만 되어도 염라대왕이 붙을 수 없다 모든 법 여의기만 하면 비추려 하지 않아도 두루 비추게 된다 이것이 바로 ‘아뇩 보리’다 ? 무위(無爲)의 실상문(實相門) 배휴가 물었다. “어떤 것이 ‘속제[世諦]’입니까?” “갈등을 설해서 무엇 하겠는가? 본래 청정한 것인데, 어찌 언설을 빌려서 문답하겠는가? 다만 일체의 마음이 없는 것을 무루지(無漏智)라 한다. 보통 ‘일체 마음이 없어야 한다.’는 말을 들으면, 사람들은 곧 ‘무념무상 하라.’는 것으로 받아들인다. 하지만 이런 말은 아직도 ‘하라’가 뒤에 붙어 있다. ‘돈오’는 따로 노
본래 성품자리 ‘범·성’ 없어 그 도리 깨달아야 속지 않아 ‘이심전심’이란 말로 표현한 인연의 흐름 마음은 전해 줄 수도 받을 수 있는 것 아니다 “무엇으로 망념을 쫓나” “없애려 하면 그 또한 망념 망념은 본래 뿌리없으나 분별때문에 생긴다” ‘범·성’에 집착 않는다면 망념은 자연히 사라져 “두 팔을 다 버렸으니 반드시 부처를 이루리라” “무시(無始) 이래로 오늘과 다르지 않아, 다른 법이 없다. 그러므로 정등각(正等覺)을 성취했다고 하는 것이다.” ?성취해야 할 정등각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이것이다’ 하는 것을 확인하는 순간, 더 이상 그림자에 나가떨어지지 않는다. 일체 그림자를 만들기는 하지만, 본래 그 자리에는 한 그림자도 만들어진 적이 없는 줄 알기 때문이
알음알이 바탕으로 살면 생각에 걸려 넘어질 수 밖에 알음알이 깨끗이 비우고 다시 분별 않으면 ‘공여래장’ 의지하거나 집착 없으면 ‘하되 한바 없는’ 무애행이며 일없는 사람 ‘無事人’ “어느 마음이 부처입니까” “네게 몇개의 마음 있느냐” “범부와 성인 경계 없애면 마음밖에 다른 부처 없다” ? 알음알이를 녹이려면 돈오견성을 해야 한다. 일체의 드러난 형상이 본래 환(幻)이라는 것을 배워서 안다 하더라도, 스스로 체득한 경험이 없다면 착각에 불과하다. 평생을 분별하며 살아왔어도, 막상 깨닫는 순간에는 알음알이란 없는 것이다. 이렇게 되었을 때, 비로소 ‘하되 한 바 없이 하고 사는’ 무애행의 힘을 지닐 수 있다. 이것은 막행막식과는 차원이 다른 것이다. 만일 깨달음의 힘을 지니지
“참다운 법이란 없었나요” “묻는 곳에서 전도 되는구나” “대답하신 곳은 어떠십니까” “남의일에 상관할 것 없다” 알음알이 배우는데 뜻을 내면 도에는 도리어 어둡게 된다 대승의 마음은 안팎 중간 등 실로 방위와 처소가 없다 사량 다하면 방위 처소 없어 놓을줄 모르면 허물을 짓는다 눈밝은 사람 만나 최선다해 근본 해결해야 ‘도’알게돼 말에 떨어지다 “스님께서는 제가 한 말씀이라도 드리기만 하면, 어찌해서 바로 ‘말에 떨어진다[話墮]’고 하십니까?”“네 스스로 말을 알아듣지 못한 사람이거늘, 무슨 잘못에 떨어짐이 있겠느냐?” ‘너 스스로 못 알아듣는 것이 허물이지, 그 자리에 무슨 허물이 있겠어?’ 하는 말이다. 말에 떨어지고 안 떨어지고 하는 것은 배휴 자신이 분별하는 것일
‘道’는 깜깜한 밤에 물을 뿌리면 스스로 높고 낮음 따라 가는 것 ‘法’이? 대체 무슨 모양이더냐? 깨닫는 순간 내려 놓으면 그만 ‘내려 놓으라’도 어리석은 말 “이 법은 허공과 같습니까” “허공이 언제 같다거나 다르다고 말하더냐” 공부된 사람과 같이 있으면 법을 설한바 없이 설하고 들은바 없이 듣는 모습이다 수도(修道)란 배휴가 물었다. “도란 무엇이며 어떻게 수행해야 합니까?” 대사께서 대답하셨다. “도가 무엇이기에 수행하려 하느냐?” “제방의 종사가 서로 계승하여 참선하고 도를 배우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둔근기(鈍根機)를 이끌어 주는 말이니 의지할 것이 못된다.” 도를 깨닫고 난 뒤에도, 배휴에게는 아직 근심이 남아있다. 여태까지 닦으려고 노력하다가
‘부처님 설법’ 청정법신 자리서 홀연히 움직임이 벌어지는 것 눈뜬 입장선 일체처 일체시에 부처님께 불공 드릴 줄 안다 일정명(한마음)과 6화합 알음알이로 이해하면 법에 속박돼 계합 못하고 깨달았다는 상에 빠진다 공부될수록 겸손해지게 마련 계합하여 성품을 깨닫는 사람은 즉시 부처에 이른다 충만한 법계 살림살이가 부처님의 설법을 대변하고 있다. 진정한 부처님의 설법이라고 하는 것은 청정한 법신자리에서 홀연히 움직임이 벌어지는 것이어서, 눈뜬 입장에서는 따로 설법이라고 할 것이 없다. 하지만 어리석은 사람은 말로 설해야 설법인 줄 알기에, 따로 모습을 빌려서 설법하는 모양을 쓰기도 한다. 아무리 그림자를 없애주기 위해서 입을 열지라도, 결국 그것이 또 다른 그림자를 일으키는 것임을
가섭존자가 부처님 만난 후 깨달음을 분명히 보고 법을 부촉 받은것 ‘염화미소’ 부처님께서 꽃을 드니 가섭이 미소 지은 것에 천착하면 군더더기 불과 부처와 우리가 다름없음을 철두철미하게 알때 마음전해 받은 것 허공에 도장 찍으면 남지않듯 새가 종일 날아도 흔적없듯 ‘확철대오’내려 놓으면 그만 구름이 허공 떠날 수 없듯 법신은 홀연히 일어나 천차만별로 움직인다 그런데 이 버림에는 세 등급이 있다. ‘큰 버림[大捨]’은 안팎의 몸과 마음을 다 버려 허공과 같아져서 어디에도 집착하지 않은 다음에, 곳에 따라 중생에게 응하되 제도하는 주체도 제도될 대상도 모두 잊어버리는 것이다. ‘중간 버림[中捨]’은 한편으로 도를 행하고 덕을 펴면서 한편으로는 대가를 놓아버리고 바라는 마음이
가까이 있다고 하지만 가까움이 없는 가까움이다 멀다면 우주보다 멀고 가깝다면 눈보다도 가깝다 마음에서 깨닫지 못하고 교법에서 깨닫는다면 마음을 가벼이 여기고 가르침만 중히 여겨 ‘흙덩이나 쫓는 개’ 꼴 된다 꼭지가 말라 비틀어지면 살짝 건드려도 툭 떨어지나 완전히 익지 않은 상태에서 억지로 따면 꼭지 덜 떨어져 계속 흔적을 남기고 다닌다 보살은 마음이 허공과 같아서 자기가 지은 복덕마저도 탐착하지 않는다 ‘보배의 장소[寶所]’에는 부처도 없고 중생도 없으며 주관도 없고 객관도 없는데, 어느 곳에 성(城)이 있겠느냐? 만약 “이곳이 이미 화성(化城)이라면, 어느 곳이 보배의 장소인가?” 하고 묻는다면, 보배의 장소는 가리킬 수 없다. 가리킨다면 곧 방위와 처소가 있게
? ? ? 경계를 만나면 마음이 있고 경계가 없으면 마음도 없다 ‘있다·없다’ 양변을 여의면 곧 법이 드러난다 ? 중생은 인연따라 무명을 두텁게 한다 ‘적적성성’‘견문각지’는 하근기 위한 비유 설법 ? ‘일어나고 사라짐’ 관찰하는 관법이 공부인줄 알고 거기에 머물면 대승에 눈뜨기 어렵다 ? ? 이것은 마치 허공에 수없이 진귀한 보배가 장엄될지라도, 마침내 유지될 수 없는 것과 같다. 불성도 허공과 같아서 비록 무량한 공덕과 지혜로써 장엄된다 하더라도, 끝내 머무를 수 없는 것이다. 다만 본성에 미혹하여 더더욱 보지 못할 뿐이다. 본래 청정한 부처에게 한 물건도 덧붙이지 말아야 하는 것은 마치 아무리 귀한 보배구슬일지라도 허공에는 머무르게 할 수가 없는 것과 같다. 보배구슬
허상을 버려야 실상 드러나는것 아니다 허상 그대로가 실상임을 알아야 한다 ? 경계도 마음도 따로 내려 놓으려 하면 허물이 된다 ? 지혜는 번뇌 없애기 위해 잠시 빌려온 ‘약’ ? 일체의 마음이 없으니 일체 법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본래 청정한 부처위에 한 물건도 덧붙이지 말라 ? 만약 결정코 허공이 있다고 한다면, 허공은 법신이 아니다. 또한 결정코 법신이 있다고 한다면, 법신은 허공이 아니다. 허공이라는 알음알이를 내지 말라. 허공이 곧 법신이다. 법신이라는 알음알이를 내지 말라. 법신이 곧 허공이다. 허공과 법신이 서로 모양이 다르지 않다. 부처와 중생도 서로 모양이 다르지 않다. 생사와 열반도 서로 모양이 다르지 않다. 번뇌와 보리도 서로 모양이 다르지 않
천차만별 경계 보이는 파도 法海의 근본은 절대평등 팔만 사천 법문은 교화 방편 본래 일체의 법이 없다 ? 구하고 머물고 집착하는 것 사라지면 여여부동한 모습 ‘하되 함이 없이’ 집착 말라 ?묘법 몰랐을때 비밀 같으나 알고나면 묘할 것 없다 부처님 법신은 허공과 같아 구름만 일어났다 사라진다 ? 성문은 아직 닦아야 할 무엇이 있는 줄 알고 계속 수행의 힘을 빌리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노력을 하거나 않거나에 관계없이, 또 굉장한 업을 지녔든 업을 지니지 않았든, 그 본바탕 성품은 둘이 있을 수 없다. 다만 업식의 작용에 따라 변한 모습을 이런저런 인연으로 쓸 뿐이다. 이것을 알면 내려놓으면 되는데, 성문은 수행을 통해 업식을 없애야 한다고 생각한다. 본래 마음자리를 증득하여 얻은 힘을 통
? “몸과 마음에는 주재하는 ‘나’없다” 몸은 ‘지수화풍’ 임시로 화합 그안에 ‘나’라는 근거 없는데 무엇이 나를 움직이게 하나 ?시작도 끝도없는 근본자리 입놀리지 말고 얘기해봐라 입을써도 쓴바 없음을 알면 남한테 그 소식 전할 수 있다 ?‘성문·연각’깨달음 혼자즐겨 남을 제도하는데 한계있어 불보살 가까이해 지혜 얻길 일체를 여읠 줄 아는 사람이 곧 부처 ? 여읠 것도, 취할 것도 없는 것이 마음자리다. 그런데 거기에 업식이 붙어서, 때가 묻었다고 하는 것이다. 때가 묻었다는 것도 착각이다. 본래 때 묻은 적이 없는데, 그림자가 자기도 모르는 순간 만들어지면서 그 속에서 버무려지는 것을 반복하는 윤회의 삶을 짓고 살아온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는 한 번도 윤회를 한 적이 없다
? ?마음으로 마음을 찾으면? 천만겁 지나도 얻지 못한다 밖으로 찾아 다니는 수행은 당장 무심함만 못하다 한번 눈을 떴더라도 이치를 수용 못하면 갈팡질팡하는 이들도 있다 망념 있고 없고에 관계없이 망념 일으키게 하는 근본 모습을 볼 수 있다면 망상에 끄달리지 않고 그냥 흘려 보낼 수 있다 ? 세상 사람들은 모든 부처님께서 마음법[心法]을 전했다는 말을 듣고, 마음 위에 따로 깨닫고 취할 만한 법이 있다고 여긴다. 그리하여 마음을 가지고 법을 찾으면서, 마음이 곧 법이고 법이 곧 마음인 줄 알지 못한다. 마음을 가지고 다시 마음을 찾아서는 안 된다. 그래서는 천만 겁이 지나더라도 끝내 얻을 날은 오지 않을 것이다. 이것이 마음인 줄 알면 한결 쉬울 텐데, 마음이 무엇인지 모르
?성품은 늘거나 줄지 않으나 인연따라 천차만별 모습 끊임없이 나투면서도 본래면목은 여여부동 본원청정심은 법계 평등하여 상이없고 항상 밝아 두루비춘다 ‘견문각지’ 마음 삼으면 그것에 덮여 본체 못본다 ‘견문각지’ 텅 비워 버리면 즉시 마음길이 끊어져 종횡자재 도량 아님이 없다 ? ? ? 원래 자기 부처를 깨달을 뿐, 그 위에 다시 보탤 것이 없다. 성품은 늘거나 줄거나 하는 모습이 아니다. 성품이 변화해서 부처도 되고 보살도 되고 성문ㆍ연각ㆍ벽지불도 된다. 모양이 있는 것도 되고, 모양이 없는 것도 된다. 천차만별의 모습으로 일체처일체시에 끝없이 나투면서도, 나투되 나툰 바 없이 늘 여여부동한 본래면목을 잃지 않고 있다. 그것을 자각하는 순간, 내려놓으면 그만이다. 다만, 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