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택(揀擇)이란 좋은 것은 받아들이고 싫은 것은 피하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좋고 싫은 것이 한 생각일 뿐, 그 생각이 없으면 자연히 따라서 모두 없어지는 것이다.중국 수대(隨代) 선승인 삼조(三祖) 승찬 대사는 젊은 시절 풍질 문등병에 걸려 천형(天刑)으로 믿었으며, 그 죄를 참회키 위해 이조(二祖) 혜가(慧可)를 찾아갔다.“제자의 몸이 풍질에 걸렸습니다. 청하건데 저의 죄를 참회시켜 주십시오”대사가 말했다. “죄를 찾아온다면 자네를 참회시켜 주겠네”승찬이 묵묵히 있다가, “죄를 찾아도 찾을 수가 없습니다” 대사왈 “내가 그대의
"망념인 한 생각이 일어나면 즉시 알아차리고그생각이 제 8아뢰야식에 저장된 전생 업식을 재연못하도록 그 한 생각의 뿌리를 ‘이뭣고’로 잘라내고사(邪)가 아닌 반야지혜를 살려 쓰는 것이 참 수행"참선(參禪)은 무슨 생각이 일어나건 그 한 생각을 발판으로 해서 ‘이 뭣고’로 돌아 오는 것이다. 육조 스님의 일행삼매에 “일상시(日常時)에 가거나 머물거나 않거나 언제 어디서나 항상 직심을 행해야 한다. 마음에 아첨하고 굽은 생각을 갖고 입으로만 법의 곧음을 말하지 말라, 오직 직심으로 행동해 모든 법에 집착하지 않는 것을 일행삼매(一行三昧
“나는 산과 물을 벗삼아 오고 가는 사람들을 건네주며 대자연과 함께 노니는 것이 형님의 삼공지위(三公地位)와 바꿀 것 없는 내 복이라 생각해 찾지 않았습니다”당나라 때 배휴, 배탁이란 등이 붙어나온 쌍둥이가 있었는데, 부모님이 일찍 돌아가시고 생활이 어려워지자, 외삼촌 집에 의탁하며 살고 있던 중 한 스님과 외삼촌과의 대화를 우연히 듣게 되었다. 이 아이들이 이 집서 같이 살면, 이 집안도 망하게 된다는 내용이었다. 그러자 이들은 외삼촌에게 하직 인사를 하고 집을 나와 떠돌다가 산중 암자서 부목일을 하며 지냈다. 그러던 중, 아침에
임제의현(臨濟義玄) 선사가 황벽 스님의 문중에서 수행할 때 그 행(行)이 순수하고 깊이가 있으므로 윗 수좌인 목주 스님이 물었다."그대는 여기에 와 있는 지가 얼마나 되는가?”“3년이 됩니다.”“지금까지 조실(祖室)스님에게 법을 청한 적이 있는가?”“아직 묻지도 않았지만 무엇을 물어야 할지도 모릅니다.”“그대는 어찌 조실스님께 불법의 대의(大義)를 묻지 않는가?”이에 임제 스님은 바로가서 물었다.그가 묻는 소리가 채 끝나기도 전에 황벽 스님은 바로 몽둥이로 후려갈기니 왜 맞는지도 모르고 기어 나왔다.목주 스님이 다시 물었다.“문답은
“모든 존재는 서로 상호의존성으로 고정불변의 자성이 없으므로, 연기공이며, 무상과 연기를 보면 법을 보고 여래를 본다고 하며, 대승불교의 공사상(空思想)에서는 ‘중도’라고 한다”‘차유고피유(此有故彼有) 차무고피무(此無故披無) 차생고피생(此生故皮生) 차멸고피멸(此滅故彼滅)’이라는 말이 있다.모든 존재는 이것이 있으면 저것이 있고, 이것이 생하면 저것이 생하고, 이것이 멸하면 저것이 멸하듯, 존재하는 모든 것은 상관관계 속에서 생하고 멸하니 둘이지만 결국은 서로가 하나라는 의미이다. 이 원리를 연기법이라 하고, 이는 인연생기(因緣生起)
“단원공제소유(但願空諸所有) 신물실제소무(愼物實諸所無) 호주세간(好住世間) 개여영향(皆如影響)”이라. 이를 설명하면 “다만 있는 것 비우기를 바랄지언정 없는 것들을 함부로 채우지마라”이다. 이는 그 유명한 방거사의 임종게이다.하루는 방거사가 큰 신심과 용기를 내어 석두 선사를 친견하고, 불여만법위여자(不與萬法爲如子) 시심마인(是甚人) 잇고? 라 물었다.해석하면 “만 가지 진리의 법으로 더불어 벗을 삼지 아니하는 자, 이 누구입니까?” 하고 물으니, 석두 선사가 그 즉시 방거사의 입을 틀어 막아 버렸다. 여기서 방거사는 홀연히 진리의
인류의 역사속에 이어진 수많은 전쟁과 혼란의 시초는 무명의 한 생각서 시작됐다. 사회적인 지위, 권력, 명예 등도 역시 허상(虛像)에 불과하다. 이 때문에 ‘내가 누구인가?’ 하는 근원적 문제를 뒤로하고 전도돼 생사윤회를 하는 것이다. 불지견(佛智見)이라는 말이 있다. 오온에 대해 있는 그대로 알고 보는 지혜가 생겨나서 오온이 청정했을 때 다시는 윤회하지 않음을 생활속에서 ‘이 뭣고’ 수행으로 깨닫고, 더 이상 번뇌가 일어나지 않는 단계를 말하며, 사물의 이치를 빨리 깨달을 수 있고 분별할 수 있는 능력을 함께 이르는 말이다.우리의
“불성, 불법, 부처, 천지만물을 비롯해 나(我) 또한 본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일체유심조’이기 때문에 동시에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이며, 그래서 마음 작용인 ‘일체유심조’이다. 이 사실을 그대로 깨닫는 것이 바로 견성이다”화엄경 사구게에 심여공화사(心如工畵師) 능화제세간(能畵諸世間) 오온실종생(五蘊實從生) 무법이불조(無法而不造)라는 말이 있다.이는 “마음은 그림을 그리는 화가와 같아서, 능히 세상사를 다 그려내며, 오온이 다 마음으로부터 나온 것이어서 그 무엇도 만들어 내지 않은 것이 없다”는 말이다. ‘부처, 참나’는
전의는 불가사의한 전식득지로서 자신의 존재기반 자체를 허망한 상태(변계소집성)로부터 ‘이 뭣고’를 수행함으로써 원성실성으로 변형해 완전한 불지를 이루는 것을 말한다. 우리가 금생에 사지(四智)를 체득해 생사고서 벗어나는 유일한 길잡이가 생활속에서 성취할 수 있는 활구참선법인 간화선 ‘이 뭣고’ 이다.전의(轉依)로 얻은 네 가지 청정한 지혜를 사지라 하는데, 전의는 번뇌에 오염된 여덟가지 마음 작용을 청정한 상태로 변혁시킨다는 뜻이다. 전의는 불가사의한 전식득지(轉識得智)로서 자신의 존재기반 자체를 허망한 상태(변계소집성)로부터 ‘이
“일체 만법이 다 없어진 때란 ‘쌍차’를 말하고 밝고 밝게 항상 있다는 것은 ‘쌍조’를 말하며 전체적으로 크게 죽은 가운데 크게 살아남을 말한다”오매일여(寤寐一如)란 일념불생(一念不生)하고 전후재단(前後裁斷)한 무심(無心)의 경지가 장벽(障壁)과 같다는 뜻이다.즉 한생각도 나지 않고 과거와 미래가 끊어져서 번뇌가 순식간에 쉬고서 혼침과 산란을 끊어 종일토록 분별이 없으니 마치 진흙으로 만들거나 나무로 조각한 사람과 같은 까닭에 장벽과 다름이 없다고 하는 것이며, 이러한 경계가 나타나면 깨침이 멀지 않은 것이다.우리가 ‘이 뭣고’로
남에게 화내거나 부정적 말을 하려할 때, 그것을 즉각 알아차리고 그 한 생각의 뿌리를 ‘이 뭣고’로 잘라 버리는 것이 업장을 소멸시키는 유일한 길이다.인간에게 고통을 가하는 모든 번뇌는 그 원인이 식심(識心)에 있다고 본다. 또한 중생이 괴로움을 겪는 것은 지금 이순간에 머물러 있지 못하고, 과거의 일을 반복해서 떠올려 거기에 매달리고, 아직 오지 않는 미래의 일을 걱정하며 거기에 끄달리기 때문이다. 따라서 해탈에 이르기 위해서는 주관과 객관을 비롯한 일체의 구별과 집착서 벗어나야 한다. 그러려면 무심의 상태에 도달해야 하는데 그것
육근중 두루 통하는 하나의 의식을 택해 감상을 따라 흐르는 식심을 두루 원만한 각성으로 몰입시키면 마침내 정각을 이루리라 했는데, 그 유일한 수행법 역시 ‘이 뭣고’이다. 일체법은 모두 여래장심을 따라 일어나 망념의 분별로 나왔으므로 일심은 법계총상 자체이며, 본래 불생(不生)하여 끝내 한 법도 없다. 그런데 지금 나타난 일체법은 모두가 망념을 따라서 의(意)가 일어나 나왔을 뿐, 일심(一心)의 자체가 일체법으로 나온 것은 아니며, 또한 세간의 일체경계와 차별상은 모두가 중생이 무명망심(無明妄心)을 의지해서 현재에 안주하고 미래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