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의는 불가사의한 전식득지로서 자신의 존재기반 자체를 허망한 상태(변계소집성)로부터 ‘이 뭣고’를 수행함으로써 원성실성으로 변형해 완전한 불지를 이루는 것을 말한다. 우리가 금생에 사지(四智)를 체득해 생사고서 벗어나는 유일한 길잡이가 생활속에서 성취할 수 있는 활구참선법인 간화선 ‘이 뭣고’ 이다.전의(轉依)로 얻은 네 가지 청정한 지혜를 사지라 하는데, 전의는 번뇌에 오염된 여덟가지 마음 작용을 청정한 상태로 변혁시킨다는 뜻이다. 전의는 불가사의한 전식득지(轉識得智)로서 자신의 존재기반 자체를 허망한 상태(변계소집성)로부터 ‘이
“일체 만법이 다 없어진 때란 ‘쌍차’를 말하고 밝고 밝게 항상 있다는 것은 ‘쌍조’를 말하며 전체적으로 크게 죽은 가운데 크게 살아남을 말한다”오매일여(寤寐一如)란 일념불생(一念不生)하고 전후재단(前後裁斷)한 무심(無心)의 경지가 장벽(障壁)과 같다는 뜻이다.즉 한생각도 나지 않고 과거와 미래가 끊어져서 번뇌가 순식간에 쉬고서 혼침과 산란을 끊어 종일토록 분별이 없으니 마치 진흙으로 만들거나 나무로 조각한 사람과 같은 까닭에 장벽과 다름이 없다고 하는 것이며, 이러한 경계가 나타나면 깨침이 멀지 않은 것이다.우리가 ‘이 뭣고’로
남에게 화내거나 부정적 말을 하려할 때, 그것을 즉각 알아차리고 그 한 생각의 뿌리를 ‘이 뭣고’로 잘라 버리는 것이 업장을 소멸시키는 유일한 길이다.인간에게 고통을 가하는 모든 번뇌는 그 원인이 식심(識心)에 있다고 본다. 또한 중생이 괴로움을 겪는 것은 지금 이순간에 머물러 있지 못하고, 과거의 일을 반복해서 떠올려 거기에 매달리고, 아직 오지 않는 미래의 일을 걱정하며 거기에 끄달리기 때문이다. 따라서 해탈에 이르기 위해서는 주관과 객관을 비롯한 일체의 구별과 집착서 벗어나야 한다. 그러려면 무심의 상태에 도달해야 하는데 그것
육근중 두루 통하는 하나의 의식을 택해 감상을 따라 흐르는 식심을 두루 원만한 각성으로 몰입시키면 마침내 정각을 이루리라 했는데, 그 유일한 수행법 역시 ‘이 뭣고’이다. 일체법은 모두 여래장심을 따라 일어나 망념의 분별로 나왔으므로 일심은 법계총상 자체이며, 본래 불생(不生)하여 끝내 한 법도 없다. 그런데 지금 나타난 일체법은 모두가 망념을 따라서 의(意)가 일어나 나왔을 뿐, 일심(一心)의 자체가 일체법으로 나온 것은 아니며, 또한 세간의 일체경계와 차별상은 모두가 중생이 무명망심(無明妄心)을 의지해서 현재에 안주하고 미래의
선가에서 고제는 한 생각 물든 마음이 생기는 것이고, 집제는 한생각 거듭 이어지는 것을, 멸제는 한 생각도 일어나지 않는 것을, 도제는 멸하지 않는 것을 철저히 아는 것이다.〈능엄경〉에 보면 “육문(六門)을 연마해 식음(識陰)(제8아뢰야식)의 마(魔)를 소멸하고 합해 열림을 성취하면, 견(見)과 문(聞)이 한데로 통해 이웃하고 서로 활용함이 청정하며, 시방세계와 심신이 훤히 밝아지니, 이것은 식음이 다함이다. 이 사람은 능히 명탁(命濁)을 초월함이다”라고 설해져 있다. 이는 오온을 ‘이 뭣고’로 비춰 봄으로써 아공(我空)이 되고,
“‘이 뭣고’로 오온을 비춰 봤을 때, 반야지혜가 그 밝음을드러내며, 인간의 생성과 소멸의 모든 과정 또한 텅 빈 공이며, 무명과 고집멸도 또한 그렇다. 그런데 이와 반대로 내 몸을 중심으로나(我)라는 아상(我相)과 나의 것이라는 허망한 집착 때문에 모든 불행 등 고난이 생기게 된다”관자재보살(觀自在菩薩) 행심반야바라밀다시(行深般若波羅密多時) 조견오온개공(照見五蘊皆空) 도일체고액(度一切苦厄). 의 일부인 이 말은 “관자재보살이 깊은 반야바라밀다를 행하실 때 오온이 모두 공함을 비춰보고 고액(苦厄)을 건넜다”는 의미이다.
참선(參禪)을 흔히 직지인심견성성불(直指人心見性成佛)이라고 한다. “교학에 의지하지 않고 곧바로 마음의 본성을 직관해 부처를 이루게 한다”는 의미이다. 견지망월(見指忘月)이라. 손가락이 가리키는 달은 보지않고 손가락만 보고 달을 봤다고 하듯이, 내안의 부처를 외면한채 본질을 꿰뚫어 보지 못하고 겉모양에 집착해 밖으로 허상을 찾아 해매는 중생들의 마음을 안으로 되돌려 깨침에 이르게 하는 것이 간화선 ‘이 뭣고’ 이다. 화두는 관(觀)하는 것이지 견(見)하는 것이 아니다. 견은 육안과 업식으로 보는 것이고, 관은 심안으로 꿰뚫어 보는
‘엑스터시(ecstasy)’는 자신을 정신적, 육체적으로 속박(束縛)하는 깊은 바다서 허우적 거리는 고통속으로 부터 빠져 나오는 행위를 말한다. 다시말하면 자신이 현재 처한 수동적이고 절망적인 상태서 벗어나 홀로서기 위한 도전이다.일본에 하늘로 날라간 ‘고이’라는 물고기의 신화(神話)가 있다. 잉어과인 이 물고기가 불가능한 도전(挑戰)을 시도하기로 결심한다. 강물을 역(逆)으로 거슬러 올라갈 때까지 올라가 보는 목숨을 건 결단이다. ‘고이’는 매 순간을 집중해 드센 물결을 헤치며 사투(死鬪)를 계속한다. 우리 중생은 지치면 다른 물
백장 선사의 법을 이어받은 신찬 선사는 계현 대사에게 동진 출가 한 후 경학(經學)에만 몰두했다. 참선에는 뜻이 없어 백장 선사를 찾아가 참선 정진 끝에 견성오도(見性悟道)한 후 은사인 계현 스님을 다시 찾아가자, 스승은 “너는 나를 버리고서 여러 해 동안 소식이 없더니 그동안 무슨 소득이 있었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신찬 선사는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인데 얻을 것이 무었이 있겠습니까?” 하니 스승은 그 뜻을 알아 듣지 못했다.그러던 어느날 스승은 신찬 대사에게 목욕물을 데피게 하고 등을 밀어 달라고 하였다.신찬 대사는 스승의
양무제가 일찍이 가사(袈裟)를 입고 〈방광반야경〉을 몸소 강설 했는데, 감응해 하늘서 꽃비가 내리며, 땅이 황금으로 변했고, 도교를 물리치고 천하에 사찰을 개창해 승려를 장려하고탑을 세워 불심천자라 불리웠다. 이렇게 천하제일이라는 아만심으로 가득찬 양무제가 달마선사에게 물었다.나에게 얼마나 많은 공덕이 있습니까? “소무공덕(小無功德), 조그만한 공덕도 없습니다”내가 했다는 아상 속에서 행한 것은 복은 될지언정 공덕은 될 수 없다는 것이며, 본심(本心)은 무심(無心)이고 진공(眞空)이니, 텅빈 무심에서 무주(無住) 무상(無相)으로 보
깨친자는 자유자재하여 중생처럼 업식(業識)에 끄달리지 아니한다.에 온조상서가 규봉 스님에게 “이치를 깨달은 사람은 수명이 다하면 어디에 의탁하는가”하고 물었다. 이에 규봉 스님은 “일체 중생이 모두 신령스럽게 밝은 각성을 갖추고 있어 부처와 다름이 없으므로, 그 바탕이 곧 법신불임을 굳게 믿고 깨달으면 본래 스스로 생(生)이 없는데 무슨 의탁할 때가 있겠는가”하고 답했다.각성은 신령스럽게 밝고 어둡지 않아 항상 분명히 알며, 생불생(生不生) 사불사(死不死)라는 말처럼 태어나도 태어난 것이 아니요, 죽어도 죽은 것이 아니며,
생종하처래 (生從何處來) 사향하처거(死向何處去) 생야일편부운기(生也一片浮雲起) 사야일편부운멸(死也一片浮雲滅) 부운자체본부실(浮雲自體本無實) 생사거래역여연 生死去來亦如然) 독유일물상독로(獨有一物常獨露) 담연불수어생사(湛然不隨於生死) 환회득담연저(還會得湛然這) 일물마(一物?)라 했다. 이 말은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것이 인생이다. 태어남은 어디서 왔으며 죽은 후에는 어디로 가는가? 태어남은 한조각 뜬구름이 일어나는 것이요, 죽음이란 그 뜬 구름이 사라지는 것안데, 뜬구름 자체는 실체가 없는 무상한 것이요, 오가는 생사 역시
생사어시(生死於是) 시무생사(是無生死)라, 죽고 사는 것은 마음에서 나왔으니 시심마의 시(是)에는 생사가 없는 것이다. 가고 옴이 없는 생사가 일여(一如)한 본성(本性)에 주(住)함이 여래(如來)의 참모습이며 망상(妄想)을 벗어난 우리의 본래 자성(自性)자리 이다. 〈신심명〉에 보면 한 생각 일으키면 전부 망상(妄想)이고, 일심불생(一心不生)이면 만법무구(萬法無垢)요 무구무법(無垢無法)이면 불생불심(不生不心)이라는 말이 나온다. 한 생각도 난 바가 없으면 만법(萬法)에 허물이 없고, 마음이 오염서 벗어나면 법도 없고, 난 바가 없으
오조홍인(五祖弘忍) 대사는 “내가 너희들에게 이르노라, 세상 사람들은 죽고 사는 일이 큰일 인데, 너희들은 종일토록 단지 복전을 구하고 생사 고해를 벗어나려 하지 않는구나. 자기의 성품이 미혹하다면 어찌 복으로 생사를 벗어날 수 있을까. 너희들은 각기 스스로의 지혜를 모아 자기 본마음의 반야성품을 취해 게송을 지으라 하시고, 큰 뜻을 깨친 자에게는 나의 가사와 법을 부촉해 육대 조사가 되게 하리라”고 했다. 이에 신수(神秀) 대사가 밤중에 게송을 지어 남쪽 복도 벽 위에 붙여 놓았다.“우리 몸은 보리의 나무요 마음은 밝은 거울과 같
보제존자께서 말하시길 염기염멸(念起念滅) 위지생사(謂之生死) 당생사지제(當生死之際) 수진역재기화두(須盡力提起話頭)라 했다. 그 의미를 살펴보면 “생각이 일어나고 생각이 멸함을 생사라 부르니, 모름지기 모든 힘을 다해야 화두(이 뭣고)를 든다”는 말이다. 화두순일(話頭純一) 기멸즉진(起滅卽盡) 기멸즉진처(起滅卽盡處)는 말도 있다. 즉 “화두(이 뭣고)가 순일해지면 일어나고 멸하는 것이 곧 다한다”는 뜻이다.생각이 일어나고 멸함이 곧 다한 곳을 이르되 이를 고요함(寂)이라 하니. 위지적(謂之寂) 적중무화두(寂中無話頭) 위지무기(謂之無記
달마스님께서는 외식제연(外息諸緣) 내심무천(內心無喘) 심여장벽(心如障壁) 가이입도(可以入道)라고 하셨다, 즉 “밖으로는 여러 반연(攀緣)을 끊고, 안으로는 부단한 욕심으로 헐떡거리지 않고, 마음이 철석같은 흔들림이 없어야 도에 이른다”는 말이다.‘반연심’이란 반연하는 마음을 의미한다. 반연은 인연과 연관이 있다. 원인이 조건 즉 연(緣)을 만나는 것을 반연한다고 하며, 그래야 과보를 낳게 된다. 마치 씨앗이 물, 온도, 영양분을 만나야 잘 자라서 열매를 맺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이것을 의식 작용서 살펴보면 마음이 외부 경계에 반응하
마음(心)이란 곧 성품이며, 깨달음이며, 부처이다. 마음이란 형상과 방향과 장소가 없으므로 마침내 얻을 수 없는 것이며, 청정한 그대로 법계(法界)에 두루하여 가는 것도 오는것도 아니며, 본래 완성된 청정한 법신부처이다.그러나 우리가 마음이라고 알고 쓰고 있는 식심(識心)은 밖으로는 육진경계에 끌려가서 타향살이를 하고, 안으로는 끌어 당겨서 객진번뇌와 동거하며 생로병사의 중생 삶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누구냐? 물음의 답은 마음이니, 말은 마음을 따라서 일어 나므로 마음은 이 말의 머리고, 생각은 마음으로부터 일어나므로 마음은
‘비여암중보(比如暗中寶) 무등불가견(無燈不可見) 불법무인설(佛法無人說) 수혜막능료(受惠莫能了)’이라는 말이 있다. 말의 의미를 풀어보면 “등불이 없으면 어둠 속에 보배를 볼 수 없고, 불법이 아무리 심오한 진리를 담았다 하더라도, 전법하는 사람이 없다면 어찌 배우고 깨쳐서 불도를 이룰 수 있을까”라는 뜻이다. 즉 전법의 중요성을 다시금 일깨워 주는 말이다. 〈금강경 지경공덕분 제십오〉에 보면 이런 말이 나온다. “어떤 선남자 선여인이 아침, 점심, 또한 저녁 때에도 매일 목숨 받쳐 한량 없는 백천만억겁을 보시하더라도 만일 어떤사람이
부처님께서 아난존자에게 참선에 대해 말하시기를 “설사 역천만겁 동안 나의 깊고 묘한 법문을 다 외운다 하여도 단 하루동안 도(道)를 닦아 마음을 밝힘만 못하느니라. 내가 아난과 같이 멀고 먼 전생부터 같이 도에 들어 왔다. 그러나 아난은 항상 글을 좋아해 글 배우는데 힘써 왔기 때문에 이제 까지 성불하지 못했지만, 나는 반대로 참선에만 힘써 도를 닦았기 때문에 벌써 성불하였다”고 하셨다. 간화선 ‘이 뭣고’는 밖으로 상(相)에 매여있는 중생들을 내안의 공성(空性), 불성(佛性)으로 회귀(回歸)시키는 일대사 인연(因緣)인 것이다. 아
중국 선종의 초조 달마대사가 150세 나이로 중국으로 건너와서 불교에 대혁명을 일으켰는데, 경(經) 염불(念佛), 송주(誦呪)등을 다 부인(否認)하고 관심일법(觀心一法) 총섭제행(總攝諸行) 직지인심(直指人心) 견성성불(見性成佛)을 했다. 즉 “마음을 관하는 한 가지 공부에 모든 법이 다 들어있으니, 곧 바로 진심을 관해 자기 성품을 보고 깨달아 생사가 없는 부처가 되게 한다”는 의미이다. 여기서 진심을 관하는 일법이 일체 수행법의 근본이며, 그 관하는 반야지혜(般若智慧)가 바로 ‘이 뭣고’인 것이다.육진경계(六塵境界)를 딱 하나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