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귀포시 호근동 봉림사(주지 일경)는 하논 분화구 내 중턱에 위치한 사찰이다. 하논은 ‘많다’의 제주어로 큰 논, 넓은 논을 의미한다. 밭농사가 주를 이뤘던 제주에서 사계절 마르지 않는 논에서 쌀농사를 짓던 곳이다.그 물줄기가 바로 봉림사 일대에서 흐르는 속칭 ‘원샘동네’라 불리는 물이다. 봉림사 대웅전과 감로당 사이에 맑은 용천수가 흐르는데 그 맛이 감로수나 진배없다. 주민들은 ‘무슨 일이든 정성을 다할 때만 물이 넘친다’고 얘기할 정도로 이 용천수는 신성시 되고 있다.1929년 혜봉 스님 창건… 4·3 당시 토벌대 의해 전소불상
한라산 기슭을 관통하는 제1산록도로 인근의 광령 소재 수덕암(修德庵)은 1948년 4·3이 발발하며 1949년 2월 관음사가 토벌대에 의해 전소되던 시기에 함께 불태워졌다고 한다.수덕암을 창건한 마용기 스님은 후손들 2대가 부처님의 법을 잇고 있지만 당을 연구하는 학자들에게 마용기 스님은 ‘법사’ 혹은 ‘산신령’ 등으로 불리는 등 제주도민들에게는 신화같은 존재다. 아마도 풍수에 능통했을 뿐 아니라 키가 육척이며, 기골이 장대하고 힘이 장사였다는 이미지가 크게 작용했던 것으로 보인다.마용기 스님 창건한 수덕암 4.3당시 법당 전소텃밭
청수리 가마봉은 남쪽의 큰 봉우리 등성이가 서북쪽으로 휘돌아 상봉, 중봉, 하봉이 ‘ㄷ’자 모양의 가마를 닮았다하여 가마오름이라 붙여졌다. 이 형세가 가마(釜)와 같다는 데서 가메 오름 또는 가마 오름이라 부른다. 그 가마봉 상봉 북녘 기슭에 자리했다하여 부악사(釜岳寺)라 불렸다.부악사는 지난 1933년 갑술년에 김경호 스님에 의해 창건됐다. 당시 한경면에는 지난 1932년 제주불교 중흥조 안봉려관 스님에 의해 고산 월성사가 창건됐고, 1934년 양경수 거사의 부지를 시주받아 김화표 스님이 1934년 판포 통천사를 창건하면서 이 지
1970년 말에서 1980년대 초 만하더라도 도내 사찰은 기와를 얹은 전통양식보다 슬레이트 지붕이 많았다. 그만큼 제주 지역 사찰 환경이 열악했다는 것을 방증한다.하지만 한국불교 태고종 제주 남원읍 선광사(주지 수열)는 이야기가 다르다. 1984년 당시만 하더라도 장엄한 대작불사를 이룩하게 된다. 대웅전과 사천왕문, 범종루, 전통한옥 양식인 요사와 정재소가 함께 신축되고 도내 사찰 최초로 사천왕상과 2.5m 크기의 동으로 조성된 석가모니불을 새롭게 봉안하는 등 제주지역에서 보기 드물 정도의 사찰 면모를 갖추면서 그 위상을 높여나간다
‘The 아름다운 사람’을 만나다 ⑬ 사람은 살다보면 언젠가 죽음을 맞이하게 되고 죽기 전 잠시나마 인생을 정리하는 시간을 갖기를 바란다. 하지만 대부분 인생의 정리작업이 쉽지가 않다.불교호스피스협회 진말숙 봉사자는 말기 암환자들의 마지막 인생을 정리하는 일을 도와주는 도우미다. 호스피스 활동을 통해 그녀는 또 다른 삶을 살고 있다.12년 전 울산 정토마을에서 불교호스피스 교육을 받은 이후로 그녀는 울산대 9병동 봉사팀에서 매일 봉사를 하고 있다.“항상 ‘봉사 해보고 싶다’는 문장이 마음 깊숙이 있었어요. 마침 정토마을 불교호스피스
‘The 아름다운 사람’을 만나다 ⑫ 장선정 씨의 하루는 고단하다. 오랜 암투병 끝에 치매까지 생긴 시아버지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호스피스 병동에서 봉사를 마치고 나오는 그녀의 얼굴에는 미소가 끊이지 않는다.2009년 서울대 병원에서 그녀는 시아버지가 전립선암이란 소식을 들었다. 1년이 지난 2010년 시아버지는 다시 대장으로 암이 전이됐고, 수술을 해야 했다.1998년부터 대구 영남대 병원에서 환자를 돌보는 보현회에서 활동해 온 그녀는 사경을 헤메는 시아버지의 모습을 보며 죽음 앞에서 존재의 가치를 다시 살피는 일에 뛰어 들고
제주 구좌읍 하도리 금붕사 창건주 이성봉 스님은 1948년 4·3이 발발한 후 고향인 하도리 창흥동으로 피신하게 된다. 낮에는 절에 가서 불공을 드리고, 저녁에는 속가인 창흥동으로 내려간 것이다.겨울로 접어들 무렵, 1948년 음력 10월 21일 스님은 법당에서 사시예불을 드리는데 밖에서 요란한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를 쫓아 뛰쳐나갔던 스님의 눈앞에 목동이 바람처럼 지나갔다. 그 뒤로 총을 든 군인들이 헐레벌떡 뒤쫓아 왔다. 숨을 들이킬 사이도 없이 군인들은 스님에게 “이 앞을 지나간 목동을 못 봤냐”고 다짜고짜 물었다.당시 주지
제주 4·3사건이 올해로 70주년을 맞았다. 1948년 4월 3일에 발생한 소요사태를 비롯해 1954년 9월 21일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력충돌과 진압 과정에서 적지 않은 주민들이 희생됐다. 약 7년여 기간동안 비공식적으로 3만여 제주 주민이 희생됐고, 강경진압에 의해 제주 중산간 마을의 가옥 95%가 전소됐다.이런 겁화를 불교도 피해가지 못했다. 스님 16명이 죽거나 도일(渡日)·행방불명됐고, 37곳의 사찰이 피해를 입었다. 완전 전소된 곳도 18곳에 달한다. 대부분의 피해 스님들은 사찰 경내에서 총살 당했고, 고문으로 인한 후
한국불교호스피스협회 ‘The 아름다운 사람’을 만나다⑪ 2005년 5월 관음사 환희복지대학에서 아이들을 대상으로 호스피스 활동을 하는 다른 불자를 본 오문옥 씨의 가슴은 격하게 뛰기 시작했다.부산 홍제사에 다니던 그는 아이들이 고등학교에 다니고 있어 학업 성취를 위한 기도에만 관심이 있었다. 어린 아이들이 죽음을 앞두고 마음을 다스리는 것을 보고 그녀는 호스피스야 말로 불제자로서 이어가야 할 수행이자 삶이라고 생각했다.환희복지대 호스피스과정 14기로 호스피스 교육을 받은지 3개월 만에 오 씨는 부산의료원 호스피스팀으로 활동하게 됐다
한국불교호스피스협회 ‘The 아름다운 사람’을 만나다 ⑩ 백련이라는 법명을 쓰는 송지환(53) 씨는 10년간 호스피스 봉사를 해 왔다. 현재는 울산대학교병원 93병동에서 봉사활동을 하고 있다. 송 씨는 2008년 여름 정토마을 능행 스님이 주최하는 아미타호스피스 27기 교육을 수료하고 1주일간 실습을 마치고 바로 봉사현장에 뛰어들었다.“환자를 만나면 먼저 발마사지를 해드립니다. 금강경 ‘세족이부좌이좌(洗足已敷座而坐)’를 떠올리며 부처님 발을 씻어드린다는 마음으로 임합니다. 발을 만져보면서 굳은살과 상처, 발톱의 두께 등을 통해 그분
5월 26일 원적에 든 설악산 신흥사 조실 무산 대종사의 다비식이 5월 30일 금강산 건봉사에서 봉행됐다. 불이 들어간다. 열반(涅槃)이다. 불생불멸, 육신은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가고 한 시절에 남긴 그의 말과 글은 흰 연기 되어 날아간다. 그의 설법이 무엇이든 불꽃을 보는 동안은 우리는 슬프리라. 수백의 만장이 무슨 소용이며, 수백의 조사가 무슨 소용일까. 진정한 무애로 돌아간 그 이름이야 그 사연을 보았겠지만 한 걸음을 사이에 두고도 볼 수 없는 우리는 그저 그의 이름을 불러볼 뿐.
무산 대종사의 삶을 겉으로만 보면 파격적인 것처럼 느껴져 마치 기인인 듯한 생각이 들 수 있을 겁니다. 그래서 일부사람들은 무산 대종사를 비판하기도 하지만 그의 진면목은 감춰져 있습니다.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뜨거운 인간애를 실천한 이 시대의 선지식이라고 할 수 있죠.”고성 화암사 회주 정휴 스님은 평생 지음(知音)이자 도반인 무산 대종사의 진면목을 이 같이 강조했다. 정휴 스님은 무산 대종사 원적 후 호상차지(護喪次知)를 맡아 다비식까지 모든 장례를 총괄했다. 스님은 인간 조오현을 ‘탈권위적인 사람’이라고 밝히며 사람들을 감동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