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세 초시에 장원, 명성 크게 떨쳐 집무실에 ‘不易心’ 편액 걸어놔 혼란의 변고로 유배생활 보냈지만 다시 벼슬길 올라 보국충정 실천 교유한 승려만 60명, 근체시 능해? 동악 이안눌(東岳 李安訥, 1571~1637)은 어린 나이에 분전(墳典), 즉 고전(古典)을 두루 섭렵하여 신동(神童)이라 칭송된 인물로 수많은 승려들과 교유하였다. 그의 자(字)는 자민(子敏)이며, 별호(別號)는 동악(東岳)이다. 저서로 〈동악집〉을 남겼다. 그의 인물 됨됨과 학문적 성취는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에 “일찍이 선조께서 주감(胄監)에게 제생(諸生) 중에 후일 대제학이 될 만한 사람에 대해 묻자 공의 이름을 들어 대답하였다”는 사실에서 드러난다. 하지만 세상만사는 그저 순조롭기만 한 것은 아니다. 일품(
어려서부터 文才 기질 드러내 사찰 순례·승려 교유 빈번 스님들에게 증표로 詩 써주며 산사 풍광 아름답게 표현해 백주 이명한(白洲 李明漢, 1595~1645)은 조선의 문장가 이정구(李廷龜, 1564~1635)의 아들로, 그 또한 시문으로 세상에 이름을 떨쳤다. 이미 어려서부터 문재(文才)를 드러냈던 그는 16세에 진사시에 합격한 후, 1616년에 전시(殿試) 을과(乙科)에 급제하여 승문원에 들어갔다. 그가 전적(田籍)이란 6품 벼슬에 오른 것은 주청사(奏請使)로 공을 세운 아버지 이정구의 공로 때문이었다. 이후 공조좌랑에 제수되었고 대사헌ㆍ도승지ㆍ대제학ㆍ이조판서 등 여러 관직을 역임했지만 그가 살았던 시대는 내외로 어려움을 겪던 시기이다. 특히 병자호란 때에 척화파로 지명된 그는 최명길, 김상헌,
? ? ? ▲ 도판 전서의 대가 신익성의 글씨. 산인 수능이 동회로 나를 찾아왔는데 수능 승려의 행동거지가 평범하지 않았다. (내가) 글을 하는지를 물으니 (수능은) 능하지 않다고 하면서 일부 책을 내놓으면서 나에게 억지로 제(題)를 지어달라고 청했다. 글이 다 지어지면 잠시 보관해 두기를 바란다 하며 홀연히 돌아갔다. 내가 그 책을 펴 보니 화엄의 중요한 말을 가려 뽑아 책을 만들어 이라 이름 하였는데 그 법도가 바르고 자상하고 치밀하다. 말이 모나지 않고 부드러워 저술하는데 노련한 사람이 아니
경신기근 당시 사창 열고 구휼 부친 영향 받아 불교와 교류해 울암사 스님들과 꾸준히 왕래 외재 이단하(畏齋李端夏, 1625~1689)는 송시열의 문인이며 려한구대가(麗韓九大家)로 손꼽혔던 택당 이식(澤堂李植, 1584~1647)의 아들이다. 그가 환로(宦路)에 나아간 것은 음보(蔭補, 조상의 은덕으로 벼슬에 오름)로 등용된 것이지만 1662년에 다시 중광문과에 급제하여 병조정랑을 거쳐 용안 현감을 지냈다. 비교적 순탄한 삶을 살았던 그도 숙종이 즉위한 후 제2차 복상문제를 상소하다가 파직되는 등, 어려움을 겪는다. 더구나 그가 살았던 시대는 자연재해가 빈번하게 일어나 흉년과 기근이 심했던 시기이다. 특히 경신대기근(庚申大饑饉1670~1671)에는 굶주려 사망한 자만도 100
불교 식견 높았던 문장가이자 ‘억만재’ 서재 가졌던 독서가 금강산·오대산 스님들과 교류 에 정황담은 詩 남겨 “석가·유가 나누지 말라” 설파 김득신(金得臣, 1604~1684)은 조선 중기의 문장가로, 다수의 승려들과 교류하였을 뿐 아니라 불교에도 상당한 식견을 드러냈던 인물이다. 그가 천기(天機)를 얻어 조화로운 시격(詩格)을 이루게 된 것은 다독(多讀)을 통한 그의 후천적인 노력의 결과라고 전해진다. 특히 어려서 천연두를 앓았던 그는 노둔하여 여러 번 책을 읽어도 기억하질 못했다고 한다. 그의 ‘행장초(行狀草)’와 ‘묘비명(墓碑銘)’에는 나이 10살이 되어서야 비로소 부친에게 〈사략(史略)〉를 배웠지만 3일이 지나도록 읽지 못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가
주자학 기반, 실학에 관심 많아 다산·초의와 교류… 親불교 성향 말년 설사병 심해 산사서 머물러 화장사 머문 기록 ‘유화장사기’ 당시 사찰 문화·음식 아는 사료 조선 후기 김매순(金邁淳, 1776~1840)은 초계문신(抄啓文臣)이었으며 홍석주와 함께 여한십대가(麗韓十大家)로 칭송되는 문장가이다. 김창흡(金昌翕)의 후손으로, 1795년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그는 검열(檢閱), 사인(舍人)을 거쳐 예조 참판, 강화유수에 오르는 등, 비교적 평탄한 삶을 살았지만 변고를 당하기도 하였다. 사후에 판서로 추증되었다. 그의 자는 덕수(德?)이며 대산(臺山), 석릉자(石陵子), 풍서주인(風棲主人)이라는 호를 썼으며 〈대산집〉과 〈주자대전차문표보(朱子大全箚問標補)〉를 남겼다. 학문
조선 후기 노론 핵심으로 정조의 개혁정치에 협력해 詩文 능해 ‘초계문신’ 선발 치감·체일 스님 등과 교류 서산 진영 보고 詩 남기기도 추사와도 깊은 우의 나눠 조선 후기 노론 시파(時派)의 핵심이었던 풍고 김조순(楓皐 金祖淳, 1765~1832)은 정조의 개혁정치에 협력하였으며, 어린 순조가 등극한 후 그의 딸이 왕비로 책봉됨에 따라 영안부원군(永安府院君)에 봉해진다. 정순 왕후가 돌아간 후에 노론 벽파를 제거한 그는 실권을 장악했으니 실제 안동 김씨의 세도 정치의 초석을 놓게 된 것은 이로부터 시작된 셈이었다. 그의 자는 사원(士源)이며 풍고(楓皐)라는 자호(自號)를 썼는데 이는 단풍나무 언덕이라는 뜻으로, 그의 집 근처에 단풍나무 1000여 그루를 심었던 것에서 유
정주학 유학자로 노장에도 관심 대흥사 융신·지헌 등과 깊이 교류 장서 1600권 소장… 불교에 박식 송광사·도갑사 등 유람한 시 남겨 연천 홍석주(淵泉 洪奭周, 1774~1842)은 주자학에 밝았던 조선 후기의 명망 있는 권문세가이다. 그의 아버지는 홍인모(洪仁模)와 어머니 영수합 서씨(令壽閤 徐氏)는 모두 문장에 뛰어났다. 그의 아우 홍길주(洪吉周1786~1841)는 사마천에 견줄 만한 문장가라 칭송된 인물이었고 홍현주 또한 시문에 능한 문장가로, 정조의 둘째 딸인 숙선옹주와 혼인하여 영명위(永明尉)로 봉해졌으니 그의 집안에 문벌이 어느 정도인지를 짐작하게 한다. ?원래 그는 노론, 낙론 계열인 김창협과 김원행의 학문을 이었으며 연경을 다녀온 후 청초(淸初)의 고증학자 고
고성암 보은산방서 스님들과 교류 만덕사·대흥사 대중들과 더욱 각별 정병·발우 마련, 초의와 우의 다져 만덕사 수룡 스님 입적에 절절한 애도 유산 정학연(酉山 丁學淵, 1783~1859)은 다산의 장남이다. 초명은 학가(學稼), 자는 치기(穉箕)였다가 후에 치수(穉修)로 바뀌었다. 호는 유산(酉山), 백아노초(白雅老樵), 철마산초객(鐵馬山樵客) 등을 사용하였다. 시문에 능해 추사나 홍현주, 홍성모, 이만용 같은 사대부들과 교유하며 두릉시사(杜陵詩社)를 주도했다. 그가 강진 동문매반가(東門賣飯家)로 부친을 찾아간 것은 1802년 겨울 무렵이며, 1805년 겨울에 다시 부친이 계신 강진으로 내려갔다. 당시 고성암 보은산방(寶恩山房)에서 수행하던 승려들에게 주역(周易)을 강학하던
실학 영향 받았던 추사의 제자 박학다식·시문 능해 ‘儒將’ 칭송 귀양시절 초의선사 만나 위로받아 일지암에 머물며 불교·차를 배워 신헌(申櫶1810~1884)은 실학에 영향을 받았던 추사의 제자다. 무신(武臣)이면서도 박학다식(博學多識)했던 그는 시문에도 능해 유장(儒將)이라 불렀으니 이는 그의 문인적인 성향을 드러낸 것이라 하겠다. 당시 추사의 문하에서 실사구시(實事求是)에 입각한 학문적 입장을 훈습 받았을 것이다. 이뿐 아니라 그는 개화파 인물이었던 박규수(朴珪壽)와 강위(姜瑋) 등과 깊이 교유했기에 변화하는 시대 조류에도 어느 정도 수용 의지가 있었음을 드러낸다. 특히 근대적 군사제도의 수립에도 힘썼던 그는 다산의 민보방위론(民堡防衛論)을 계승, 발전시켜〈민보집설(民堡輯說)
강진 유배시절 예학 등 학문 매진 대흥사·백련사 학승들과 교우 돈독 이암 혜장, 다산을 스승으로 모셔 불서에도 해박… 당시 巫風 비판도 1801년에 다산은 황사영 백서 사건에 연루되어 첫 유배지 장기에서 한양으로 압송, 모진 핍박에 시달렸지만 이렇다 할 협의를 찾지 못하자 다시 강진으로 이배(移配)된다. 이런 배려는 수렴청정하던 정순황후의 작은 배려 덕분이었다. 막상 강진에 도착해 보니 다산 자신이 처한 현실이 생각했던 것보다 열악하고 어려웠던 듯하다. 이러한 당시의 상황은 그의 〈상예사전서(喪禮四箋序)〉에 자세한데 이는 “그곳 백성들은 유배 온 사람 보기를 마치 큰 해독처럼 여겨 가는 곳마다 모두 문을 부수고 담장을 무너뜨리면서 달아나 버렸다”라고 하였다. 백성들조차 마
17세에 화순 동림사서 학문 정진 연담 스님 만나 불교와 인연 쌓아 천주교리 관심 있었지만 교인 아냐 암행어사 시절 백성들의 현실 목도 토지 개혁을 위한 ‘田論’ 발표하기도 정조 승하 후 강진 유배, 새 삶 시작? 다산 정약용(1762~1836)은 조선 후기 실학을 집대성한 대학자로, 2500여 수가 넘는 시를 남겼다. 경세(經世)에 관심이 컸던 그가 피폐해진 정치, 사회, 제도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그 대안을 제안했는데 이는 그의 수많은 저술에서 확인할 수 있다. 영미했던 그가 7세의 어린 나이에 “작은 산이 큰 산을 가리고 있으니(小山蔽大山)/ 멀고 가까움이 다르기 때문이라(遠近地不同)”라는 시를 지었는데 이를 본 그의 부친이 “분수(分數)에 밝으니 자라면 틀림없이 역법과
문인화가로서 초의·추사와 교류 “그림으로 불사는 나로부터 시작” ‘佛奴’가 호, 스님과 법교 자청도 호산 조희룡(1789~1866)은 조선 후기 문인화를 지향했던 화가로 여항시사를 이끌었다. 차를 즐긴 그는 초의와도 교유하였다. 본래 그의 집안은 양반 출신이었다. 그러나 조부 때부터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고 그 또한 여항인(閭巷人)들과 어울린 화가였기에 중인으로 분류한다. 그의 자는 이견(而見), 치운(致雲)이다. 학계에 알려진 그의 호는 우봉(又峰), 철적(鐵), 호산(壺山), 단로(丹老), 매수(梅?), 수도인(壽道人)이지만 필자의 소장본 자료인 조희룡의 첩을 통해 ‘불노(佛奴)’라는 호가 있었음이 밝혀진 셈이다. 헌종의 총애를 받았던 그는 1813년 식년문과(式年文科)의
불교 禪家에 이어진 초묵법 초의 선사가 소치에게 전해 소치 허련, 한산전 머물면서 불화에 열중… 경지 이르러 “붓으로 삼매 경지에” 극찬 조선 후기 남종화를 대표했던 소치 허련(小癡許鍊1809~1893)은 모란을 잘 그려 ‘허모란’이라 불렸던 인물이다. 한때 헌종의 어전(御前)에서 그림을 그리기도 하고, 명화를 함께 감상하는 영광을 누렸던 그였지만 시은(施恩)의 은택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어전에서 물러난 후 여전히 객지를 떠돌며 생활의 어려움을 겪는다. 그의 일생에서 환한 햇살이 비쳤던 시기는 초의와 추사를 만나 사제의 정을 나눈 때이다. 그의 재주를 한눈에 알아본 추사는 성의를 다해 그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주었고 지체 높은 사대부들과 폭넓은 교유 또한 추사의 영향이었다. 이
‘호남칠고붕’ 중 한 명으로 꼽혀 초의·호의 스님 등과 깊은 교류 詩會 열어 ‘대둔칠사’ 찬시 지어 ‘운관사회방서’ 등 문집 남기기도 운와 김각(雲臥 金珏)은 함양출신으로, 조선 후기 호남지역의 선비였다. 그는 선암사와 대흥사에서 수행했던 해붕선사(海鵬禪師)와 초의선사(1786~1866), 그리고 호의(縞衣)스님뿐 아니라 이들의 제자와도 교유했다. 원래 그는 도가의 태식법에 밝았던 인물로 알려졌으나 대흥사 승려들과의 교유를 통해 불교뿐 아니라 차에도 관심이 컸던 듯하다. 그의 자(字)는 태화(太和)이며, 호(號)는 운엄(雲?), 운관(雲館), 운와(雲臥), 운옹(雲翁), 운암거사(雲巖居士)라 불렀다. 지금까지 드러난 김각에 관한 자료는 초의선사의 〈일지암시고(一枝菴詩稿)〉
서화에 능해 ‘시서화삼절’ 칭송 불교 승려와도 폭넓은 교류가져 화엄사서 패엽경 열람하고 공부 “釋誕日, 2월 8일”… 초의와 격론 추사·초의 “2월, 4월 고증 어렵다” 자하도인 신위(紫霞道人 申緯1769~1845)는 조선 후기 문예를 이끌었던 인물이다. 외척세력의 득세로 그의 정치적 입지는 좁았지만 실제의 삶은 소요유(逍遙遊)의 자유로움과 선오(禪悟)의 경지를 체험했던 듯하다. 한때 병조참판이 되었다가 강화유수로 봉직되었던 그는 윤상도의 탄핵으로 곤욕을 당했을 때에 그를 도운 이는 풍고 김조순(楓皐 金祖淳1765~1832)이었다. 1831년에 다시 형조참판에 임명되었으나 병을 핑계로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다. 이 무렵 용강에서 병을 치료한 후 시흥현의 자하산방으로 돌아온 그
추사·초의 1815년 학림암서 만나 평생 거쳐 벗으로, 도반으로 지내 불교사상·예술 등 걸쳐 서로 영향 추사 유배길, 초의가 직접 배웅도 유배 당시 추사 차와 불교에 천착 얻은 기쁨 편지 보내 조선 후기는 성리학이 주도했던 시기로 신분제도도 엄격했다. 이런 때에 유학자와 승려의 교유를 가장 활발하게 남긴 인물은 추사와 초의이다. 이미 알려진 바와 같이 이들은 1815년 겨울 학림암에서 만나 평생을 교우했다. 특히 추사는 첫 만남에서 초의와의 숙연(宿緣)을 짐작했던 지. 가까운 자신의 벗들을 초의에게 소개해 주었다. 1815년 10월 27일에 쓴 초의의 편지엔 이들과의 해후를 이렇게 드러냈다.? 하물며 정벽(유최진)선생께서는 화권(畵卷)을 주시고 형암(김훈)선생께서는 비를 무릅쓰고 찾
조선시대는 흔히 숭유억불(崇儒抑佛)의 시대로 잘 알려져 있다. 정치 이데올로기를 ‘유교’로 삼은 조선은 사대문 안에 승려가 출입할 수 없도록 만들기까지 했다. 그럼에도 승려는 당시 유학자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지식인이자 교양인이었다. 그래서 유교와 불교를 넘어 서로의 학문과 사상을 교류했던 유학자와 스님들은 상당수다. 본지는 억불의 시대 조선에서 불교를 만나 혜안을 넓히고 유·불의 지평을 키웠던 유학자들을 정리한다. ?〈편집자 주〉 불교·금석학 등에 밝았던 유학자 초의 스님과 차·불경 담론한 지음 옹방강·소동파 ‘친불’에 영향 해붕 스님과의 법거량서도 드러나 〈금강경〉 空 사상의 일견 보여줘 학림암, 상경 승려 거점사찰 역할 추사 김정희(1786~1856)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