뛰어난 능력으로 관직 섭렵 파직되는 변고도 수차례 겪어 승려들과 오랫동안 정 나누며 승속 넘어 진정한 벗 거듭나? 조선 중기의 문신 월정 윤근수(月汀 尹根壽, 1537~1616)는 영의정을 지낸 윤두수(尹斗壽)의 아우다. 어린 시절 김덕수(金德秀)ㆍ김덕무(金德懋) 형제에게 공부했다. 퇴계 이황(退溪 李滉, 1501~1570), 남명 조식(南冥 曹植, 1501~1572)뿐 아니라 율곡 이이(栗谷 李珥, 1536~1584), 우계 성혼(牛溪 成渾, 1535~1598) 등과도 교유했다고 전해진다. 1558년 별시 문과에 급제하여 승정원 주서와 연천 현감을 지냈으며 기묘사화에 사형을 당한 조광조의 신원을 상소했다가 과천현감으로 좌천되는 등 정치적으로 곤란을 겪었다. 이듬해인 1563
어렸을 때부터 책 섭렵 시에 대한 탁마 열의 커 성불암·불일암 유람하며 오랫동안 승려들과 교유 손곡 이달(蓀谷 李達, 1539~1612)은 조선 중기 인물이다. 서출로 태어나 신분의 제약을 벗어날 수 없었던 시대 상황에서 나라의 동량이 되기에 충분한 자질을 타고 났지만 자신의 역량을 펴지 못한 채 불운한 세월을 보냈다. 잠시 한이학관(漢吏學官)을 지냈던 인연도 어린 시절부터 세상의 모든 책을 섭렵해 글에 능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얼마 되지 않아 벼슬을 버리고 이리저리 떠돌아 다녔다. 한때 뜻이 맞는 고죽 최경창(孤竹 崔慶昌, 1539~1583)과 옥봉 백광훈(玉峰 白光勳, 1537~1582) 등과 시사(詩社)를 결성, 서로의 의지를 공유하며 흡족한 시절을 보냈으며
전공 세워도 賞에 무관심 향리 풍속 순화 힘쓰면서 한때는 불교 배척했지만 만년에 승려들과 교유해 64세가 되어서야 겨우 사마양시에 합격했던 성여신(成汝信, 1546~1632)은 불세출의 문장으로 세상에 회자되었다. 이러한 그의 역량은 어린 나이에 신숙주의 증손인 신점(申霑)의 문하와 남명 조식(南冥 曺植, 1501~1572)의 문하에서 글을 배우며 배태된 것인지도 모른다. 임진왜란과 당쟁으로 얼룩진 시절을 살았던 그의 행로도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한때 신선세계에 빠져 산천을 주유했다. 하지만 나라가 위난에 놓이자 분연히 일어나 곽재우(郭再祐, 1552~1617)와 함께 왜군을 무찌르는 전공을 세우면서도 논공행상에는 관심을 두지 않고 은일하는 선비로 돌아갔다. 이뿐만이 아니다. 전쟁이 끝난 후의
대곡선생 성운 문하서 수학 재주 뛰어나도 名利 거리 둬 生死가 모두 공함을 드러내고 불교적인 삶 지향했던 유학자 조선 중기의 인물, 임제(林悌, 1549~1587)는 호남이 자랑하는 풍류남(風流男)이다. 평소 검을 좋아하고 피리를 좋아했던 그는 자유분방하여 얽매임을 싫어했던 그의 품성대로 20세가 되어서야 대곡선생(大谷先生) 성운(成運)의 문하에서 수학했다고 한다. 그의 기질은 〈국조인물고〉에 ‘동서붕당(東西朋黨)의 의논이 일어나 선비들이 앞을 다투어 명예를 가지고 서로 추켜세우면서 끌어당기었으나 공은 자신 멋대로 행동하고 무리에 가담하지 않았으며 또 몸을 낮추어 사람을 섬기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에 벼슬이 현달하지 못하였다’고 하였다. 천출로 ‘타고난 재주가 뛰어나 날마다 수천 마디의 말을
사신 요구도 단번에 해결한 速作·多作 능력 갖춘 문장가 시험 代作해 한직 머물러도 도인 풍모로 승려들과 교유? 차천로(車天輅, 1556~1615)는 조선 중기 문장가로 한호(韓濩), 최립(崔?)과 함께 송도삼절(松都三絶)이라 칭송되는 인물이다. 그의 자는 복원(復元), 호는 오산(五山), 난우(蘭?), 귤실(橘室), 청묘거사(淸妙居士)를 썼다. 그는 출중한 글재주로 선조의 총애를 받았지만 평생 하급관직을 전전하며 고단한 삶을 살았다. 연유는 과거 시험 대작(代作) 사건과 개성출신이라는 지역적 한계 때문이다. 조선이 건국 된 후 개성 출신의 과거 정지이유는 다분히 정치적이었다. 이중환(李重煥, 1690~1756)의 〈택리지〉에 “태조께서 공양왕의 선양을 받아 수도를 한양으로 옮겼는데 고려의 신하였던
광해군 폭정 피해 산속 은둔 폐위 사실 듣고도 복귀 안 해 벼슬 구하는 길 멀리한 채 승려들 시축에 많은 글 남겨 정치, 사회적으로 혼란기를 살았던 유몽인(柳夢寅, 1559~1623)은 문장가로 글씨에 남다른 재주를 드러냈다. 그의 자는 응문(應文), 호는 어우당(於于堂), 간재(艮齋), 묵호자(默好子)이다. 설화 문학의 대가로 야담을 집대성한 〈어우야담〉과 시문집 〈어우집(於于集)〉을 남겼다. 한때 성혼과 신호의 문하에서 수학했지만 경박하다는 책망을 듣고 쫓겨나 성혼과의 관계가 소원하였다. 1589년 중광문과에 장원급제하여 병조참의를 거쳐 황해감사, 도승지 등을 역임했다. 임진왜란 때에는 선조를 호종하는 임무를 수행했으며, 1609년에는 성절사 겸 사은사로 임명되어 대명외
14세에 승보시 장원 급제 후 조정 대표해 中외교 담당해 말년에 승려와 교유 늘면서 돈독한 우정 글로 남기기도 천하에 문장가로 이름을 떨쳤던 이정귀(李廷龜, 1564~1635)는 어린 나이에 당대의 문장가 한유((韓愈)의 ‘남산시(南山詩)’를 차운(次韻)하여 시를 지을 만큼 글재주가 뛰어났던 것으로 전해진다. 나이 14세에 승보시(陞補試)에 장원으로 급제한 후, 증광문과에서 병과로 급제하였던 그는 중국어에 능해 어전통관(御前通官)으로 조정을 대표하여 명나라 사신을 접대하는 등 외교 활동에 높은 수완을 발휘하였다. 그가 공을 세운 탁월한 활약상은 바로 명나라 병부주사 정응태(丁應泰)를 파직시킨 일이다. 바로 정응태가 조선을 무고하는 사건이 일어난 것인데 이는 조선의 입장을 불리하게 하였다. 다시
동몽교관 임명에 禮 안 갖추고 자유로운 기질로 벼슬 그만둬 충심 담은 직언에 귀양 당해도 가난한 백성에 연민 잃지 않아 역사에 기록된 인물들에게는 시(詩)로 인해 변고를 겪은 일이 흔했지만 다른 한편으론 절창(絶唱)의 시를 남겼기 때문에 이름을 남긴 경우도 흔하다. 조선 중기에 문필가로 손꼽히는 석주 권필(石洲 權?, 1569~1612)도 바로 그런 인물 중 하나다. 그는 자유로운 기질의 소유자로 구속을 싫어했다. 그는 한때 가난을 염려한 동료들의 추천으로 동몽교관(童蒙敎官)에 임명되었음에도 상부에 예를 갖추지 않은 채 곧바로 학생들을 가르쳤다. 이런 그의 기질이나 “관대를 하고 예조에 나아가 예를 갖추라”는 말에 “그런 일을 잘 못한다”고 하고 벼슬을 그만두었던 그의 처세는
18세 초시에 장원, 명성 크게 떨쳐 집무실에 ‘不易心’ 편액 걸어놔 혼란의 변고로 유배생활 보냈지만 다시 벼슬길 올라 보국충정 실천 교유한 승려만 60명, 근체시 능해? 동악 이안눌(東岳 李安訥, 1571~1637)은 어린 나이에 분전(墳典), 즉 고전(古典)을 두루 섭렵하여 신동(神童)이라 칭송된 인물로 수많은 승려들과 교유하였다. 그의 자(字)는 자민(子敏)이며, 별호(別號)는 동악(東岳)이다. 저서로 〈동악집〉을 남겼다. 그의 인물 됨됨과 학문적 성취는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에 “일찍이 선조께서 주감(胄監)에게 제생(諸生) 중에 후일 대제학이 될 만한 사람에 대해 묻자 공의 이름을 들어 대답하였다”는 사실에서 드러난다. 하지만 세상만사는 그저 순조롭기만 한 것은 아니다. 일품(
어려서부터 文才 기질 드러내 사찰 순례·승려 교유 빈번 스님들에게 증표로 詩 써주며 산사 풍광 아름답게 표현해 백주 이명한(白洲 李明漢, 1595~1645)은 조선의 문장가 이정구(李廷龜, 1564~1635)의 아들로, 그 또한 시문으로 세상에 이름을 떨쳤다. 이미 어려서부터 문재(文才)를 드러냈던 그는 16세에 진사시에 합격한 후, 1616년에 전시(殿試) 을과(乙科)에 급제하여 승문원에 들어갔다. 그가 전적(田籍)이란 6품 벼슬에 오른 것은 주청사(奏請使)로 공을 세운 아버지 이정구의 공로 때문이었다. 이후 공조좌랑에 제수되었고 대사헌ㆍ도승지ㆍ대제학ㆍ이조판서 등 여러 관직을 역임했지만 그가 살았던 시대는 내외로 어려움을 겪던 시기이다. 특히 병자호란 때에 척화파로 지명된 그는 최명길, 김상헌,
? ? ? ▲ 도판 전서의 대가 신익성의 글씨. 산인 수능이 동회로 나를 찾아왔는데 수능 승려의 행동거지가 평범하지 않았다. (내가) 글을 하는지를 물으니 (수능은) 능하지 않다고 하면서 일부 책을 내놓으면서 나에게 억지로 제(題)를 지어달라고 청했다. 글이 다 지어지면 잠시 보관해 두기를 바란다 하며 홀연히 돌아갔다. 내가 그 책을 펴 보니 화엄의 중요한 말을 가려 뽑아 책을 만들어 이라 이름 하였는데 그 법도가 바르고 자상하고 치밀하다. 말이 모나지 않고 부드러워 저술하는데 노련한 사람이 아니
경신기근 당시 사창 열고 구휼 부친 영향 받아 불교와 교류해 울암사 스님들과 꾸준히 왕래 외재 이단하(畏齋李端夏, 1625~1689)는 송시열의 문인이며 려한구대가(麗韓九大家)로 손꼽혔던 택당 이식(澤堂李植, 1584~1647)의 아들이다. 그가 환로(宦路)에 나아간 것은 음보(蔭補, 조상의 은덕으로 벼슬에 오름)로 등용된 것이지만 1662년에 다시 중광문과에 급제하여 병조정랑을 거쳐 용안 현감을 지냈다. 비교적 순탄한 삶을 살았던 그도 숙종이 즉위한 후 제2차 복상문제를 상소하다가 파직되는 등, 어려움을 겪는다. 더구나 그가 살았던 시대는 자연재해가 빈번하게 일어나 흉년과 기근이 심했던 시기이다. 특히 경신대기근(庚申大饑饉1670~1671)에는 굶주려 사망한 자만도 1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