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 황실 티베트 불교, 고려에 유입돼 법기신앙 중심 금강산, 원 후원 집중 中 선종도 유입… ‘백장청규’ 자리잡아 태고·나옹·백운, 中 선종 법맥 전파 여말 간화선풍, 한국 선종 근간 세워 고려는 최씨 무인집권기였던 1231년부터 약 30년간에 걸친 몽골의 7차례 침입에 맞서 싸웠고 정부가 강화도로 천도를 감행하면서까지 항쟁을 계속하였다. 이 과정에서 수도 개경을 포함한 전국토가 유린되었고 부인사에 있던 초조대장경과 경주의 황룡사 9층 목탑 등 다수의 불교 문화유산이 불에 타는 등 크나큰 피해를 입었다. 1259년 몽골과 강화한 후 공민왕의 반원운동이 성공한 1366년까지 약 100년 동안 이어진 이른바 원간섭기는 정치적으로 매우 독특한 시기였다. 이 시기를 원간섭기라고 하는 이유는 충렬왕부터 공민
각훈의 ‘해동고승전’ 불교 전래사 기술 고승 업적 찬양·호교론적 서술 대부분 일연의 ‘삼국유사’ 韓 고대 실상 그려 단군, 한반도 역사 공동체 시조 ‘부상’ 고대 한인 문화 살펴보는 사료로 활용 한국불교의 자화상은 이른 시기부터 그려지기 시작했다. 한국 최초의 승전류 불교사서는 통일신라시대인 8세기 초에 〈계림잡전〉의 저자 김대문이 펴낸 〈고승전〉이었는데, 이는 현존하지는 않는다. 9세기 후반 최치원도 여러 고승들의 비문과 전기를 짓는 등 한국불교사의 조형에 필수적인 중요한 사료를 남겼다. 고려시대에도 승전류와 불교사서가 편술되었는데, 11세기 후반 의천이 읽었다는 〈해동승전〉의 명칭이 확인되며, 여기서 다룰 각훈(?~1230)의 〈해동고승전〉과 일연(1206~1289)의 〈삼
연등회·팔관회 국가 행사로 개최 왕실 권위 높이고 민심 안정 도모 몽골 침략땐 호국적 나한신앙 유행 우란분재 등 천도 의식도 활성화 결사·향도들 염불·埋香 통해 기원 ? 고려시대에는 불교가 사회 전반에 큰 영향을 미쳤고, 위로는 국왕부터 아래로는 천민에 이르기까지 모든 계층에서 불교가 신앙되었다. 국가 차원의 불교의례뿐 아니라 다양한 법회와 재회, 결사, 사경 등이 전시기에 걸쳐 전국적으로 이루어졌고 대규모 불사가 행해졌다. 불교신앙 또한 극락정토로 인도하는 아미타불, 현세의 고통을 구제하고 이익을 주는 관음보살, 윤회의 나쁜 과보에서 구원해 주는 지장보살 등 신앙의 대상이 다각화되었고 각종 결사와 지역공동체 조직인 향도도 염불, 매향 등을 행하며 행복과 안녕을 기원하였다. 고려시대 불교의례
고려 왕조의 정치이념은 유교 ‘崇佛’하면서도 政·敎는 분리돼 ‘훈요십조’ 내용대로 왕실 주도 연등회·팔관회 등 성대히 개최 왕권 아래 불교교단 형성·운영 유교·도교도 꾸준히 지원·발전 고려 문화의 다원성 이해해야 불교는 삼국시대 이후 고려시대까지 융성하면서 사상과 문화의 꽃을 피웠고, 성리학을 숭상한 조선시대에 들어서 급격히 내리막길을 걸었다고 알려져 있다. 이러한 상식적 통념이 틀린 것은 아니지만, 조선시대에도 불교는 많은 종교적, 사회적 역할을 수행하였고, 신라나 고려시대에도 토착 신앙이 강고하게 존속하였을 뿐 아니라 유교가 상류 지식층에서 중시되었던 것도 사실이다. 이처럼 역사를 바라볼 때 하나의 굳어진 관념으로 재단하거나 통설을 의심 없이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살아 움직이는 생물과
태조 왕건의 고려 후삼국 통일 고려 초 구산선문 확립돼 융성 신라하대 도입된 풍수지리 인기 ‘비보사탑설’ 도선 국사 영향 커 佛·儒·風水, 고려문화 新 트랜드 8세기 후반 혜공왕 대에 신라 중대왕실은 막을 내렸고 이후 150년간의 하대에는 왕위 분쟁과 함께 극심한 사회적 혼란이 초래되면서 독자적인 정치세력이 각지에서 부상하였다. 그 결과 10세기 초에는 궁예의 후고구려(태봉), 견훤의 후백제가 등장하여 후삼국 시대의 치열한 각축이 시작되었고 918년 왕건에 의해 궁예가 축출되고 고려가 건국된 후 935년 신라 경순왕이 투항하고 이듬해 후백제가 망하면서 새로운 통일시대가 열리게 되었다. 선종을 살펴보기에 앞서 기존 신라 불교와 성격이 다른 밀교가 수용, 유행된 사실을 간단히 소개한다. 밀교는
불국사·석굴암, 당대 문화 정수 불교신앙과 신라인의 발원 집약 애절한 사연담긴 성덕대왕 신종 最古 목판인쇄물 무구정광다라니 사찰 중창·창건 담당 관청도 운영 다양한 분야서 화려한 발전 이뤄 한국의 찬란한 불교문화를 상징하는 세계적 문화유산으로는 어떤 것이 있을까? 고려대장경과 고려불화를 말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대부분은 완벽한 조형의 석굴암, 그리고 10원짜리 동전에 새겨진 다보탑과 일명 무영탑으로 알려진 석가탑이 있는 불국사를 가장 먼저 떠올릴 것이다. 실제로 석굴암과 불국사는 유네스코가 정한 세계문화유산의 하나로서 통일신라시대의 화려한 불교문화의 정수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삼국유사〉에서는 신라의 수도 경주에 대해 “절이 하늘의 별만큼 많았고 탑은 기러기가 줄지어 서
의상 스님 신라 화엄학 기틀 회향·실천 강조… 교학 발전 문도들에 의해 심화·발전돼 삼국통일 후 신라는 고구려, 백제 불교의 유산을 흡수하고 중국 당과의 교류를 더욱 확대하면서 교학에 대한 이해가 한층 심화되었고 원효를 비롯하여 기라성 같은 불교사상가가 다수 배출되었다. 교학 중에서는 특히 화엄학과 유식학이 신라 불교 교학의 중심이었다. 화엄학은 의상과 그의 문도들에 의해 체계적인 이해와 실천이 동시에 이루어졌다. 의상은 중국 화엄종의 2조 지엄에게 수학하였고, 지엄의 또 다른 제자로서 중국 화엄의 이론적 토대를 닦은 법장과 사형사제 관계였으며 귀국 후에도 사상적인 교류를 지속하였다. 신라의 화엄학은 의상 문도들의 활발한 연구와 활동에 의해 불교계의 주류사상이 되었고 후대에는 종파로 발전하였다.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는 삶 일심, 중생마음을 불법으로 봐 주류불교계와 거리, 대중 속으로 실천중시 사상 제시, 불교개혁 유도 환속 후 ‘소성거사’ 후에 ‘화쟁국사’로 신라불교 자존심을 세우다 소위 ‘국내파’ 지식인의 대표주자 당 유학길에서 ‘대승’요체 깨달아 유학 포기, 신라서 ‘신유식’ 모두 섭렵 중국·일본에 영향, 100여 저술 남겨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원효의 이름을 들어 보았을 것이다. 그는 불교사상가이자 대중교화행의 선구자이기도 하지만 보통은 해골 물을 마시고 깨달았다는 전설과 요석공주와의 로맨스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원효는 한국의 역사에서 가장 뛰어난 독창적 사상가였고 그의 사유는 중국과 일본 등 동아시아 세계에 큰 영향을 미쳤다. 또한 그는 세간과 출세간의 경계를 뛰어넘는
삼국 모두 불교학 빠르게 발전해 고구려, 삼론·중론·열반학 등 융성 백제, 천태계통 법화삼매수행 유행 신라는 원광·자장이 교학체계 정립 뛰어난 학승들 日불교에도 큰 영향 불교의 수용은 단순히 화려하고 영험한 불상과 의장이 전래되고 사찰을 통해 기복적인 신앙이 퍼져나간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제대로 된 불교 수용이란 불·법·승의 삼장이 온전히 갖추어진 상태를 말한다. 이를 위해서는 경전과 율장, 논서가 들어오고 승려와 교단이 성립되어 교리와 계율, 즉 부처님의 가르침과 승가의 규율이 이해되고 적용되어야 한다. 한반도의 불교 수용도 마찬가지로 불상, 경전이 전래된 후 계를 지키는 승려가 나오고 교단이 성립됨과 함께 교학에 대한 이해의 진전이 수반되었다. 삼국 중 가장 먼
통일신라인들 내세 안위 소원 아미타 정토신앙 폭발적 인기 광덕·엄장 설화 등 이를 증명 미륵신앙도 대중들에게 퍼져 고단한 삶 이겨내는 원동력으로 7세기 중반 삼국통일 후 신라 사회에서 불교가 맡게 된 과제는 이전과는 결이 다른 새로운 차원의 것이었다. 불교가 짊어져야 했던 새 미션은 바로 사회적 대통합과 신앙의 대중화였다. 이전에는 지역적으로 수도 경주를 중심으로 하고 불교신앙의 수요층도 왕실 및 지배층이 주요 고객이었다면, 이제는 옛 고구려와 백제 지역을 포괄하는 확대된 영역, 신라사회의 구성원 전체를 상대로 해야 했다. 〈삼국유사〉 등의 사료에서는 저자거리와 벽촌마을에서 일반민을 상대로 한 포교행위가 활발히 펼쳐지고 있었음을 볼 수 있다. 한반도 동남부 변방에 위치한
신라, 명산신앙·토템 등이 주류 불교 전래 후 마찰… 점차 융화 승려·사찰, 무교적 의례 이어받아 왕실불교의 호국적 성격도 파생 삼국서 모두 관음·미륵신앙 대중화 불교 확산, 특유 수용력서 기인 불교의 전래와 함께 현세와 내세의 복을 기원하는 불교신앙이 삼국에 유포되고 확산되었다. 고구려의 경우 현존하는 고분벽화에서 예불과 설법, 전륜성왕 등 불교신앙의 다양한 양상이 확인되며, 고구려 불상의 명문에서도 미륵신앙과 아미타신앙의 성행 사실을 알 수 있다. 백제는 남아있는 불상, 조각, 탑과 중국 측의 기록 등을 통해 다채로운 불교신앙이 있었고 수준 높은 불교문화를 구축하였음을 추정해 볼 수 있다. 하지만 현재 불교신앙에 관한 가장 많은 사료가 전해지는 곳은 신라이며 따라서 신라를
이상적 군주상 전륜성왕 수용 신라 왕족, ‘석가족’임을 자처해 법흥, 진흥 등 불교식 왕명 사용 왕권 비로 아래 신라 불교 성장 황룡사·해중릉 불교왕권의 단초 고구려, 백제, 신라의 삼국에서 외래 종교인 불교가 수용, 공인된 것은 공통의 정치사회적 조건과 배경 하에서 이루어졌다. 시기는 각각 다르지만 불교를 공인할 당시 삼국의 공통된 점은 고대국가 정립을 위한 왕권 강화, 중앙집권적 통치 체제 정비가 추진되고 있었다는 것이다. 신라보다 앞서 고대국가의 완비를 이룬 고구려와 백제는 4세기 후반 국왕 중심의 통치체제를 구축하기 위해 율령과 관료제도 등을 정비하였다. 이에 비해 신라는 6세기 초까지 왕권의 절대적 권위가 확립되지 못한 상태에서 연맹체적 정치구조가 지속되고 있었다.
기원후 4세기 이전 한반도에 도래 삼국 중 고구려가 가장 먼저 수용 허황후 일화, 해상 통한 전래 의미 불교 수용으로 세계사적 확장 가져와 한반도에 불교가 들어온 시기는 지금으로부터 약 1700년 전인 기원후 4세기 이전일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불교의 공인은 고구려, 백제, 신라의 삼국이 각각 고대국가체제를 정비하고 중국의 제도와 문물을 수용하던 4세기 후반에서 6세기 전반 사이로, 지역적 특성이나 국가와 사회의 발전 정도에 따라 대략 150년 정도의 시차를 보인다. 그 중 고구려는 중국과 인접한 만주와 한반도 북부에 위치하여 삼국 중 고대국가로의 발전단계가 가장 빨랐고 불교의 수용과 공인 또한 제일 앞섰다. 고구려는 소수림왕 때인 372년에 국가 교육기관인 태학을 설립하고
기원전 1세기 새로운 불교운동 ‘자리이타’ 대승불교 개념 정착 後漢시기에 중국으로 불교 전파 윤회·업 등 내세관, 東亞에 영향 인도에서 발원한 불교는 지금까지 약 2,500년 간 동남아시아와 동아시아의 광대한 지역에서 세계종교이자 뛰어난 철학 체계로서 확고한 위상을 구축해왔다. 불교는 이들 지역 사람들의 사유와 심성, 신앙과 내세관, 수행과 실천 등에 막대한 영향을 미쳐왔고 다층적이고 복합적인 문화를 창출하였다. 불교는 붓다에 의해 제시된 사상적, 수행론적 가르침을 근거로 하여 이후 수많은 거장들의 노력에 의해 변화, 확장된 고도의 사유체계이자 인간의 근원적 고통 해소와 생사윤회로부터의 탈피를 지향하는 실천적 종교이다. 붓다는 삶과 존재의 핵심적 가치를 꿰뚫은 선각적 사상가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