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승이 물었다. “각기 한 소질을 지닌 사람들이 몰려왔다면 그 일은 어떻습니까?” 조주 스님이 말했다. “나의 눈은 본래 똑바르니까 그 일에 대해 논하지 않겠네.” 問 衆機來湊 未審其中事如何 師云 我眼本正 不說其中事 손이나 발을 능숙하게 움직이는 자가 이 도를 익히면 손발을 움직이는 것이 곧 도가 된다. 그러나 도를 통하지 않으면 아무리 손이나 발을 움직여도 그것은 절대 도가 될 수 없다. 일대 장인은 원래 도에 가깝다. 그러나 손발을 능숙하게 움직인다고 다 도인이 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마음이 문제이다. 마음을 내려놓고 원하는 것 없이 다만 능숙하게 움직이기만 한다면 어느 날 도와 맞닥뜨릴 날이 있을 것이다. 장인이자 곧 도인이 되는 것이다. 예컨대, 도예가가 도를 행하면 도가 더욱 빛날
? 학승이 물었다. “학인은 특별한 것을 묻지 않겠습니다. 스님께서도 특별한 대답은 하지 말아주십시오.” 조주 스님이 말했다. “괴짜군.” 問 學人不別問 請師不別答 師云 奇怪 절에 오면 다들 특별한 무엇을 찾는다. 그런데 와서 보면 특별함이란 없다. 남들처럼 밥 먹고 잠자고 일하는 곳, 사람이 그저 살아가는 곳이 절이다. 이렇게 평범한 곳이지만 거기서 도(道)와 참 진리, 높은 뜻을 발견할 수 있다. 사실 선사의 말은 특별하지 않다. 그저 평범한 말들일 뿐이다. 다만 평범한 말에 대한 뜻을 모르기 때문에 평범한 말이 특별한 말처럼 여겨지는 것이다. 조주 스님의 ‘개가 불성이 없다’는 말이나, ‘사람 잡는 칼 따위는 쓰지 않는다’, ‘나는 고봉의 정상에 올라가지 않는다’, ‘뜰 앞의 잣나무’ 등
?학승이 물었다. “높고 험준하여 오르기 어려울 때는 어떻습니까?” 조주 스님이 말했다. “노승은 고봉의 정상에 올라가지 않아.” 問 高峻難上時如何 師云 老僧不向高峰頂 높고 험준한 곳은 도의 세계이다. 학승이 도의 세계에 들어가는 길은 높고 험준하다는데 여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가 물은 것이다. 그러자, 조주 선사는 “나는 높은 산봉우리 정상에 올라가지 않는다”는 말로 짤막하게 대답하고 말았다. 내가 가는 길은 그런 길이 아니라는 답변이다. 참으로 의미심장한 말이다. 처음 입문해 도를 이루고자 생각할 때라면 누구나 도는 높은 정상에 있을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간혹 잠잘 때 꿈속에서도 화두가 들릴 정도가 되어야 깨달음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으므로 초심자들이라면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당
학승이 물었다. “두 개의 거울이 서로 마주 볼 때 어떤 거울이 밝은 것입니까?” 조주 스님이 말했다. “그대의 눈꺼풀이 수미산을 덮는구나.” 問 兩鏡相向那箇最明 師云 ?黎眼皮蓋須彌山 산 밑에 가서 눈동자를 들여다보면 눈동자에 산이 비추어있을 것이다. 그때 눈동자 주인이 눈을 끔벅이면 산이 일시에 덮여버리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주인공의 눈꺼풀 하나가 산을 보이게 하기도 하고 덮어버리기도 한다. ‘눈꺼풀이 수미산을 덮는다’는 말은 모든 것에 대한 평가는 그대 주인공의 뜻에 맡기겠다는 의미이다. 거울은 청정 본성을 비유한 것이다. 청정 본성은 차별이 있을 리 없다. 누구의 본성도 밝음은 같다. 그러나 사람에 따라, 선지식에 따라 약간씩 다르게 본성이 빛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예컨대 조주
학승이 물었다. “조사의 뜻과 교의 뜻은 같습니까, 다릅니까?” 조주 스님이 말했다. “겨우 출가하여 계도 받지 않았는데 가는 곳마다 물어대는군.” 問 祖意與敎意同別 師云 ?出家未受戒 到處問人 선불교의 핵심 가르침은 직지인심 견성성불(直指人心見性成佛)이다. 즉 ‘사람의 마음을 가리키고 그 성품을 보면 곧 부처를 이룬다’ 는 것이다. 이것은 부처님 재세시에 출가자들이 석존 교설을 단 한번 듣고 그 자리에서 즉시 깨달음을 얻었던 가풍을 그대로 잇는 것이다. 석존 열반 후에는 한동안, 반드시 수행해서 때를 제거해야 부처가 될 수 있다는 교설, 즉 소승불교가 확장되었으나 나중에 대승불교에서 ‘중생이 곧 부처’라는 사상이 높이 부각되었고, 선불교에서는 ‘깨달으면 곧 부처’라는 재세시의 가풍으로 다시 되돌
학승이 물었다. “나타난 사람은 누구입니까?” 조주 스님이 말했다. “불보살이다.” 問 出來底是什?人師云 佛菩薩 경전에, 부처님과 보살은 윤회로 이 세상에 온 것이 아니고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 온 사람들이라고 말한다. 이것을 ‘태어난 사람’이라고 하지 않고 ‘나타난 사람’이라고 한다. 중생의 성품은 본래부터 부처이다. 이것을 불성이라고 한다. 중생은 태어나 자기가 부처인줄 모르고 살아가기 때문에 각종 죄악을 지으면서 업식을 쌓는다. 이 업식은 허공중에 생긴 공화(空花)와 같다. 중생은 공화를 사실로 생각하고 집착한다. 이로 인해 윤회하게 되므로 자기 의지와 상관없이 수많은 생을 전변윤회하는 것이다. 그러나 불보살이나 선사(禪師)는 스스로 우주의 주인이요, 스스로 만물의 근원임을 깨달아
?학승이 물었다. “개에게 불성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조주 스님이 말했다. “집집마다 문 앞은 장안(서울)으로 통하고 있어.” ? 問 狗子還有佛性也無 師云 家家門前通長安 ? 본 〈조주록〉 132번째에 한번 나온 질문이다. 부처님이나 옛 조사 스님들은 움직일 줄 아는 자는 다 불성이 있다고 했다. 그렇다면 불성(佛性), 즉 부처의 성품이 누구에게나 있다고 한다면 과연 개도 불성이 있을까? 이것이 이 질문의 요지였다. 이 질문에 대해 조주 선사는 ‘없다[無]’고 잘라서 말했다. 비록 축생의 업식성이 강하다고 해도 성품은 변함없는 불성일 것인데, 왜 없다고 대답한 것일까? 이것이 화두가 되었다. 그런데, 같은 질문에 이번 답변은 불성을 인정하고 있다. ‘문 앞의 길은 장안으로 통한다’는 말은
학승이 물었다. “밤에는 도솔천에 올라가고 낮에는 염부제에 내려오는데 그 가운데에 왜 마니보주가 나타나지 않는 것입니까?” 조주 스님이 말했다. “무엇을 말하는 거야?” 학승이 다시 한 번 더 물었다. 조주 스님이 말했다. “비바시불이 일찍이 거기에 마음을 머무르고 있었고, 바로 현재에 이르기까지도 아직 그 묘리(妙理)를 얻지 못했다.” 問 夜昇兜率晝降閻浮 其中爲什?摩尼不現 師云 道什? 僧再問 師云 毗婆尸佛早留心 直至如今不得妙 대승불교를 높이 천양했던 무착보살(無着菩薩)이 유가사지론(瑜伽師地論)을 지을 때에 밤에는 도솔천에 올라가 미륵보살의 가르침을 받고, 낮에는 남 염부제인 사바세계에 내려와서 유가사지론을 집필했다고 하는 설화가 있다. 도솔천은 33개의 천국 중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는 천국인
스님 어디로 가십니까? 학승이 물었다. “무엇이 충언입니까?” 조주 스님이 말했다. “너의 어머니는 추하고 못생겼다.” 問 如何是忠言 師云 ?娘醜陋 백 마디의 설명보다 직접 체험한 것이 훨씬 효과적이다. 선사들은 학승이 느끼고 체험하게 하는 교육을 즐겨 사용한다. 조주 선사가 그대의 어머니를 면전에서 욕했다면 그대의 심리는 어떠하겠는가? 중생은 충언에 분노가 일어나고, 깨달은 자는 충언에 담담하다. 학승이 물었다. “무엇이 부처도 초월하는 것입니까?” 조주 스님은 박장대소했다. 問 如何是佛向上事 師便撫掌大笑 계율에 출가 수행자는 대저 큰소리로 웃고 떠들면 안 된다고 되어있다. 이것은 여러 사람이 사는 곳에서 다른 사람들은 조용히 좌선이나 경을 읽고 있는데 나 혼자 떠들면 방해가
학승이 물었다. “무엇이 불법의 큰 뜻입니까?” 조주 스님이 말했다. “자네 이름이 무엇인가?” 학승이 말했다. “아무개입니다.” 조주 스님이 말했다. “함원전 속, 금곡원 가운데로다.” 問 如何是佛法大意 師云 ?名什? 云某甲 師云 含元殿裡金谷園中 함원전은 장안(서울)에 있는 당나라 궁전 중의 하나인데 그 건축 작품이 빼어났고, 금곡원은 낙양(洛陽) 가까이에 있었던 진(晉)의 석숭(石崇)이 만든 진귀한 명원(名園)을 말한다. 당시 함원전과 금곡원은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했다. 학승이 자기 이름을 말하자, 조주 선사는 이 두 작품을 하나로 보태어 함원전 속에 있는 금곡원이라고 평한 것이다. 매우 훌륭하고 시원하다는 평이다. 도대체 조주 선사는 학승의 무엇을 보았기에 당대에 유명한 두 작
진부대왕이 질문했다. 학승이 물었다. “노스님은 춘추가 높으신데 치아가 몇 개나 남아있습니까?” 조주 스님이 말했다. “한 대뿐입니다.” 대왕이 말했다. “그것으로 어떻게 물건을 씹으실 수 있겠습니까?” 조주 스님이 말했다. “하나하나 씹습니다.” 鎭府大王問 師尊年有幾箇齒在 師云 只有一箇牙 大王云 爭喫得物 師云 雖然一箇 下下咬著 추월용민(秋月龍珉)씨는 하하교저(下下咬著)가 다른 사본에 일일교저(一一咬著)로 되어있는 곳이 있다 했고, 또 변문집 교기(校記)에 현재 화북(華北)지방 방언 하하(下下)는 낱낱(一一)이라는 의미로 기록되어있다고도 했다. 이 대목은 조주 선사의 신변을 알 수 있는 자료이다. 선사들은 더우면 덮다하고 추우면 춥다고 한다. 있는 그대로 말한다. 조주 스님은
조주 스님은 대왕이 들어오는 것을 보고 일어나서 마중하지 않고, 손으로 무릎을 치면서 말했다. “알겠습니까?” 대왕이 말했다. “모르겠습니다.” 조주 스님이 말했다. “저는 어릴 때 출가하여 지금은 완전히 늙어 버렸습니다. 손님을 보고도 선상에서 내려올 힘조차 없습니다.” 師見大王入院不起 以手自拍膝云 會? 大王云不會 師云 自小出家今巳老 見人無力下禪床 ? 사전에 아무런 행동이나 말도 없이 선사가 대뜸 “알겠는가?” 하고 묻는 이 질문은 상승 법문이다. 부처님의 뜻을 그대로 전달한 것이고, 오묘한 도를 들어내 보인 것이며, 낮은 단계에 있는 사람을 높은 단계로 이끄는 선지식의 상승 가르침이다. 납자들은 이 한 마디에서 다 털어내 버리고 모든 부처와 조사가 간 길을 가야 한다. 선사
학승이 물었다. “대중이 운집했습니다. 무슨 일에 대한 것을 함께 담론하시겠습니까?” 조주 스님이 말했다. “오늘은 나무를 끌고 와서 승당을 세워볼까한다.” 학승이 물었다. “그것은 결국 학인을 교화하는 일과 관련된 일 아닙니까?” 조주 스님이 말했다. “노승은 주사위도 놀이도 모르고 장행(長行)도 알지 못한다네.” 問 大衆雲集合談何事 師云 今日?木頭?僧堂 云莫只者箇便是接學人也無 師云 老僧不解雙陸 不解長行 쌍육과 장행이 당시의 놀음판이나 게임 같은 것이었을 것이다.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에 대해서는 중국 1200 년 전의 일이라 불분명하다. 여기서는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쌍육을 주사위로 풀어보았다. 선원(禪院)에서도 규율을 풀고 편안하게 쉬며 하루를 보내는 날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