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빠다 돼지 귀신 이야기 입의 허물에 관한 과보 전해 ? 처음 행자를 시작했을 때 어른 스님들께서 절 집안은 용사(龍蛇)가 혼재(混在, 섞여 산다)한다는 말씀을 들은 적이 있다. 그 때는 무슨 뜻인지 몰랐는데 나중에 알고보니 깨달은 훌륭한 스님들과 아직 깨치지 못한 스님들이 함께 살아간다는 뜻으로 이해했다. 동화사에서 박물관장으로 재직하면서 수장고와 전시실에 있는 많은 유물들을 자세히 관찰해보면 다른 곳에는 없는 귀중한 유물들이 많이 소장되어있다. 이 용두부월형 의식구는 어느 탱화에 그 유례를 보이는데, 정성이 많이 들어간 목조각으로 용머리에 혀를 도끼처럼 만들어놓은 것이다. 입속에 혀 대신 도끼를 달고 있으니 무척 힘들 것 같은 데 왜 도끼를 매달고 있을까? 야운비구자경문(野雲比丘 自警
문인화가 난초 대나무로 나라 잃은 슬픔을 표현 해강(海岡) 김규진(金圭鎭)은 구한말의 애국지사로서 전서·예서·해서·행서·초서에 모두 그 지극의 경지에 달한 명필이며 당대 최고의 대자(大字, 현판글씨)의 대가였다. 현재 한국의 어느 누구도 해강의 현판글씨를 넘어서는 이는 없다. 그 뿐 아니라, 시서화 삼절(三絶)로써 산수, 영모(새와 짐승), 사군자 등에 탁월한 솜씨를 보이는 당대의 서화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일합방 후에는 주로 대나무만 그리며, 나라를 잃은 한(恨)을 서화에 풀며 한 세상을 살다 간 분이다. 경남 합천의 해인사에 가면 가야산 해인사(海印寺)라는 단정한 해서(楷書)체의 커다란 대자(大字)글씨의 현판이 입구를 장악하고 있다. 그 풍기는 기운이나 엄
보현보살 코끼리 타고 등장 세상에 회향하는 모습 보여줘 가장 불교적인 동물을 하나 꼽으라면 당연히 코끼리를 일순위로 뽑을 것이다. 왜냐하면 부처님께서 마야부인으로 태어나기 전에 상아(象牙)가 여섯이나 되는 코끼리가 몸 안으로 들어오는 태몽을 꾸었다고 하며 수많은 경전에서 코끼리의 덕을 칭송하고 있기 때문이다. 코끼리는 범천의 세계창조 때 범천이 주문을 외어 만들어 냈다고 한다. 처음 만들어졌을 때는 천사나 새들처럼 날개가 있어서 하늘을 날아다녔다고 한다. 그런데 어느 날 코끼리들이 하늘을 날다가 2만년이 넘은 커다란 고목의 가지를 부러뜨렸는데 그 밑에서 공부하던 신선(神仙)의 제자들이 몇 명 그 나뭇가지에 맞아 죽었다고 한다. 그러자 노한 신선은 신들에게 요청해서 코끼리의
석재, 스님들에게 교육 받으며 명필 ‘팔능 거사’로 성장 사찰교육의 중요성 일깨워 ? ? 한반도 유사 이래로 최고의 예술가를 딱 한 사람만 꼽으라면 사람들마다 의견이 분분할 것이다. 물론 조각에선 석굴암의 세존상을 만든 이를 따라가긴 힘들 것이다. 금속공예로는 다뉴세문경보다 정교한 거울을 만들기도 힘들 것이다. 회화로는 몽유도원도를 그린 안견(安堅)이나 진경산수화를 개척한 겸재(謙齋) 정선을 꼽거나 가장 화려한 색채와 정교한 도안과 완벽한 구도를 자랑하는 고려불화를 그린 이름 없는 화공들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본납(本納)은 개인적으로 조선말에 대구에서 태어난 석재 서병오 선행을 최고의 예술가로 선택하고 싶다. 詩(시) 書(서) 畵(화) 文(문) 琴(금) 基(기,
유교 선비 난동 막기 위해 삼보와 함께 발원패 조성? ? 불패는 부처님이나 큰스님들을 주로 모시는 위패(位牌)로 경전명이나 불보살님들의 명호 큰스님들의 법명이나 발원내용들을 적어 불단에 함께 모시는 위패를 말한다. 보통 그 형태는 내용이 적힌 아름다운 조각이 되어있는 위패를 연화대(蓮花臺)위에 놓는다. 위패의 주위를 채운(彩雲)모습이나 보주(寶珠) 등의 모습으로 조각하고 그 안에 모란 연꽃 같은 화훼나 운용(雲龍)같은 문양을 화려한 모습으로 조각해 상단(上壇)에 모신다.? 불패는 보통 하부(下部) 좌대와 상부(上部)의 패신으로 나뉘는데 상단의 모습은 주로 구름을 도상화(圖像化)한다. 그리고 앞면 중앙에 직사각형의 액(額)을 만드는데 그 속에 여러 가지 발원문이나 불명을 넣어 발원하는 경
사당과 제사상을 그려 넣어 조선시대 유교사상을 표현 사찰과 유사한 건물 보며 보조국사 지눌 부탁 떠올려?? 감모여재도는 이름 그대로만 읽고 이해하려면 조금 무리가 가는 명칭이다. 감모여재(感慕如在)란 말은 사실 ‘사모하는 마음이 지극하면, 그 모습이 실재로 나타난다’는 뜻이다. 감모여재도는 원래 민화의 한 갈래로 들어가는 조선시대 특히 유교사상을 표현하는 그림이다. 대개의 경우 사당을 그리되 단아한 지붕에 잡상(雜像)이나 용두의 치미(雉尾)를 단정하게 그리고 서너 칸의 자그마한 집을 그린다. 그리고 그 안에 위패를 배치하고 바로 앞에 제사상을 펼쳐놓은 형태가 주로 많은데 상에는 여러 가지 제수인 과일이나 제사도구인 향 향합 촛대 술잔 꽃병 등을 그려넣는다. 제사상의 과일
스리랑카에 처음 가서 가장 깊은 감명 깊었던 것은 수많은 동자승들이 있다는 사실이었다. 스리랑카의 고대 도시이자 불치사(佛齒寺, 부처님의 불치사리를 봉안한 스리랑카 최고의 사찰)가 위치한 산악도시 ‘캔디’의 어느 동물원에서 만난 수백명의 동자승들은 진정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나라의 미래가 그 아이들에 있듯이 종교의 미래도 가장 젊은 성직자들에게 있다. 도제교육(徒弟敎育)은 불교가 그 혜맥(慧脈)을 잇고, 교세를 넓힐 수 있는 유일무이한 방식인 것이다. 미국의 어느 기독교 종파 중에 특이한 종파를 본 적이 있는데, 그 종단의 특징은 결혼도 하지 않고, 아이도 낳지 않는 교리를 가지고 있었다. 결국은 그 종단의 마지막 남은 신도인 어린 소년의 모습이 찍힌 사진을 보았는데, 그 소년도 결국은 어린 나이에 죽
아함부(阿含部)의 8편에 보면 조각을 이어 만든 가사(袈裟)의 유래에 대한 글이 적혀있다. 당시에 비구스님들은 조각을 하나도 이어 붙이지 않은 상아색의 가사를 입었다 한다. 재가자들은 그 걸 보고 마치 감각적 쾌락을 즐기는 장자와 같다고 비난했다. 제자들이 이를 부처님께 보고 드리자 부처님은 ‘조각을 잇지 않은 가사를 입어서는 안 되며, 누구든 조각을 잇지 않은 가사를 입는 비구는 잘못을 범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당시에 부처님께서는 라자가하에 계시다가 닥키나기리로 가는 도중에 마가다국의 들판을 지나게 되었다. 논들은 줄이 질서 정연하고, 선과 논둑이 나란하며, 네모나게 잘 배열되어 있었다. 부처님은 이를 보시고 아난다 존자에게 물으셨다. “아난다여, 저 줄과 논둑과 선이 질서정연하고,
학승 혜원ㆍ시인 도연명ㆍ도사 육수정 만남 한중일에 전파…新사상 수용의 예?? 대표적인 중국의 삼대(三大)사상은 불교와 유교 도교라고 할 수 있다. 인도의 불교가 중국에 토착화(土着化)되는 과정에서 많은 불교적 변용(變容) 현상이 일어나는 과정에서 일어난 가장 현저한 변화 중 하나는 사상과 종교와의 타협이다. ?중국의 불교는 인도와는 다르게 상당히 다양한 면에서 그야말로 중국적인 사상이라고 할 정도로 시기적으로 점차 변해가다가 완전히 정착한 상태의 불교를 한반도로 전해준다. 현재 한국의 불교는 사실 당(唐)나라 방식의 선불교(禪佛敎)의 변용이라고 볼 수 있다. 불교를 토착화시키려는 중국의 승려들과 불자들은 그 타협하는 과정에서 권력에 도전(挑戰)하기도 하고 엄청난 분량의 중국적인 불교 위경(
송광사 진영과 복식 ‘차이’ 당초화문으로 정교함 더해 ? 전남 순천 송광사(松廣寺)에는 불교사(佛敎史)를 빛낸 보물 제 1043호로 지정된 십육조사진영(十六祖師眞影)의 진영이 있다. 이 고승들의 진영은 가로 77.4㎝, 세로 134.8㎝ 로 제작기법이나 크기가 같아서 어떤 한 금어(金魚, 승려 불화승)스님의 작품들로 보여진다. 이들 중 특히 보조국사의 진영은 녹색 장삼에 붉은 가사를 입고, 오른 손에 길고 가는 석장(錫杖)을 쥐고, 날카로운 선기(禪氣)를 지닌 눈매로 전면(前面)을 바라보고 있다. 이 16점의 진영(眞影)들은 모두 정조(正祖) 4년(1780년)에 안치되었다고 전한다. 모두 상태가 매우 양호해서 조선중기의 고승영정들의 기법을 알 수 있는 귀중한 보물들이다. 팔공산 동화사(桐華寺)에도
극달화상 진영과 the Composition by Mondrian -공산개조 극달화상지진영 ? ? 동화사사적기(桐華寺史蹟記)에 의하면, 신라 소지왕(炤知王, ? - 500) 15년(493)에 극달 존숙(尊宿) 화상이 창건하여 유가사(瑜伽師)라고 부르다가 흥덕왕(興德王) 7년(832) 심지(心地) 왕사(王師)가 중창할 때 오동(梧桐)나무가 겨울에 상서롭게 꽃 피웠다고 하여 ‘오동나무꽃절’이라고 이름을 고친 절이 바로 동화사이다. 그런데 극달화상의 창건설은 사실 일반 사서(史書)에서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단지 1931년 김정래 선생이 지은 조선불교 선교양종 제일 수사찰 대본산 경북 달성군 공산면 동화사적비(朝鮮佛敎禪敎兩宗第一首寺刹大本山慶北達城郡公山面桐華寺蹟碑)에 위의 사실(史實)이 나올 따름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