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역은 우주의 기본 이론, 불교 공부에 도움 되는 철학” 강조 신심명·영가집 소중히 여긴 선사 〈신화엄경합론〉으로 ‘인촌상’ 수상 “탄허 스님 권유로 대만 유학” -언제부터 본격적으로 배움을 받으셨나요? 내가 대학을 졸업하고, 바로 대학원(석사과정)에 들어갔는데 졸업한 것이 1973년도 2월이에요. 바로 그해 1월인가, 2월이었는데 그때 스님이 석파정(대원군 별장)에서 화엄경 교정을 보고 있었어요. 왜 그런 계기가 이루어졌는지는 잘 기억이 안 나는데 탄허 스님을 도우면서 교정을 보던 무비 스님, 연관 스님, 성파 스님하고 내가 있었는데 “우리가 큰스님을 모시고 있는데 교정만 보지 말고 탄허 스님을 모시고 공부를 제대로 해보자”는 말이 나왔어요. 거기에서 초발심자경문부터 이력 과정을 다시 배우
막힘 없는 답변에 대처승 합장 동경대서 日人 60명 강의 듣고 큰절 관선 동국대 다시 찾아 넘겨줘 “마지막 갈때 공부의 힘 나온다” 석달 전부터 열반 준비 -탄허 스님은 양청우 스님과 친하였는데, 대흥사에는 안 가셨나요? 청우 스님이 대흥사 정화를 할 적에 대처승 박영희 스님에게 고생을 많이 했어요. 청우 스님이 그런 고생을 할 적에, 대불련의 법회를 대흥사에서 1주일간을 하였지요. 그때 박영희 스님이 탄허 스님을 찾아와서 서로 인사를 하고 나서는 협조를 하였던 일이 있어요. 그때 탄허 스님이 대흥사 큰방에서 강연을 하는데, 대처승 쪽의 강사급 승려가 30여 명이 와서 들었어요. 흑판 강의를 하였는데, 그때 만약 탄허 스님이 강의를 못하고, 대처승들의 질문에 답변을 하지 못하였으면 죽인다는 그런
유불선 통괄 불교빛낸 ‘불후의 명강’ 성일 스님, 녹음 테이프 제작 보급 “부처님 다녀오겠습니다” 꼭 인사 가까운곳도 두루마기 정장 외출 -스님은 탄허 스님의 화엄경 불사에 1970년부터 참여하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오전 세 시에 일어나서 아침 예불을 올리고, 새벽 공양을 하고는 그때부터 교정을 시작해서 하루에 열두 시간씩 교정을 보았어요. 그때에 큰스님과 각성·무비 스님 등 서너 분의 스님은 탄허 스님이 번역한 경전의 원전을 보시고, 저는 계속 읽고 그랬죠. 그 원고지 분량이 용달차 한 대 분량이나 되었는데, 그 원고를 다 읽으면서 혹시 빠뜨린 것이 없는 것을 확인하였어요. 참으로 대단한 것이 그 많은 분량에서 빠진 글자가 열 자도 안 돼요. 이런 점에서 저는 탄허 스님의 집중력은 대단하였다
청담 스님 “탄허 종보적 존재” 동국대 강의 때 명사들 청강 틈만 나면 참선…모든 것 禪으로 귀결 교육에 지대한 관심 가져 -스님도 탄허 스님과 인연이 많은 것으로 알고 있어요. 언제 처음으로 뵈었는가요? 탄허 스님을 뵌 것은 통합종단 출범(1962) 이전, 선학원에서 뵈었고 조계사에서도 뵈었어요. 조계사에서 뵐 때에는 여름의 오후였는데, 조계사 주지인 양청우 스님을 비롯한 열 명의 스님과 법당에 앉아서 이야기를 하실 때였지요. 그 무렵에도 스님은 대학자로 알려졌지요. 인상은 아주 좋으셨어요. 그리고 그 무렵 스님은 강원도 종무원장이셨어요. 그리고 종회의원이어서 종회가 열릴 때에는 서울에 오시고 그랬는데 그럴 때에 내가 뵈었지요. -1964년 1월, 월정사에 대처승들이 쳐들어와서 비구승들이 서울
소식하고 후학들 하는일에 간섭 안해 기억력 탁월, 칠판가득 외워쓰고 강의 스님 명성은 타고난 소양과 노력 결과 경전 번역할 때 직역 고집 -스님은 탄허 스님의 화엄경 교정 작업을 하신 분입니다. 어떤 연고로 그런 인연을 갖게 되었나요? 저는 1967년도에 출가해서 주로 선방에를 다녔어요. 그 시절, 옛날에 어릴 때에는 바람기가 있어서 여기저기 선방에를 다녔습니다. 그러다가 상원사 선방에서 결제를 하고 지내는데 오대산 단풍이 드는 것을 보고서는 마음이 싱숭생숭해졌어요. 그래서 ‘에라 모르겠다’는 심정으로 누더기를 입고 새벽에 걸망을 지고 도망을 갔어요. 그리고는 여기 저길 다니다가 상주 남장사가 문중 절이라, 그 절 나한전의 방을 하나 얻어서 혼자서 지내게 되었어요. 거기에 있으면서 산에 가서 나무를
“나는 만담가 아니야!” 강연 거절 청년모임 익성회, 스님 도우며 공부 부산 법회에 5만명 참석 탄허 스님 소개로 한마음선원과 인연 -회장님과 탄허 스님의 인연은 어떻게 시작되었는가요? 저는 연세대 사학과를 나와서 5·16이 나던 해(1961)부터 국사편찬위원회의 편사연구관으로 근무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일을 하다가 문집 같은 것을 보면 왕도정치니 천리(天理)와 같은 개념이 나와요. 이런 것은 한문으로도 직역이 잘 안 되는 철학적인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이런 것을 공부 좀 해서 알아야 하겠다는 생각을 가졌습니다. 그러다가 그런 방면에 조예가 깊은 탄허 스님을 찾아가기 시작한 것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셨는가요? 그 시절에 저는 30여 명의 청년지도자
“나라·사회에 헌신하는 사람돼야” 중국수교 예견… “중국말 공부해라” 성철 스님과는 서로 존경하는 외우 교양대학 ‘3·1선원’ 다시 문열계획 -언제, 탄허 스님을 만나시게 되었나요? 대불련이 1963년 9월에 결성되고 그해 겨울에 대불련이 법주사에 가서 제1회 수련대회를 하였어요. 그때 추담 스님이 있었지요. 그러고 나서 그 다음해에 이기영 박사가 오대산에서 대불련의 제2회 수련대회를 하고 나오셨어요. 이때에 나는 대한불교청년회가 주관한 이기영 박사의 원효의 대승기신론 강좌를 들어서 이박사를 알고 있었지요. 이박사가 월정사에를 갔다 오시더니, 오대산에 생불(生佛) 같은 스님이 있다고 하시면서 탄허 스님을 극구 칭찬하시더라구요. 나하고 명호근이 그 이야기를 들었는데 얼마 후에 신문에 탄허 스님이 조
오대산 수도원 수강생은 사부대중 지도계층 인재양성 사회변혁 기대 돈오돈수 비판… 깨쳐도 보임해야 스님의 독특한 서체 전승 선양 필요 -스님은 언제, 어디에서 탄허 스님을 만나셨나요? 저는 1979년에 쌍계사에서 행자로 있었어요. 그런데 거기에서 고시 공부를 하는 대학생으로부터 오대산에 가면 팔만대장경에 통달한 도인 같은 스님이 있다는 말을 들었어요. 그 말을 듣고서 저는 갑자기 오대산에 가고 싶은 충동을 느꼈어요. 그 도인이 바로 탄허 스님이었지요. 그래서 쌍계사를 떠나서 오대산 월정사로 오게 되었는데, 그것이 1979년 말이었습니다. -1980년 가을에는 이른바 10·27법난이 일어났습니다. 그 무렵에 겪은 일과 탄허 스님과의 관련을 회고해 주세요. 저는 계를 받고 제 사형되는 혜광·현오 스님
배움에는 어떤 구애도 받지 않아 법문·강의 원고 없이 술술 숯으로 흙에 글씨 쓰며 공부 출가자 잘못·제도 강하게 비판 -그 무렵, 탄허 스님은 동국대 대학선원장이 되어서 서울로 올라가시지 않았습니까? 그래요. 스님이 1966년 가을 무렵에 대학선원장이 되어서 서울로 올라가시고, 제가 시봉으로 따라 올라갔습니다. 그해 여름부터 그런 이야기가 오가더니 그렇게 되었어요. 스님은 서울로 가시면서 저를 시봉으로 삼아서 갔는데, 거기에도 조그만 일이 있었어요. 원래 그 시절에는 소임을 6개월만 하고, 6개월이 되면 소임을 바꾸는 전통이 있었어요. 제가 시봉을 6개월 이상을 하였으니, 당연히 다른 사람을 시봉으로 하려고 하였는데 스님께서 저를 계속해서 하려는 심중을 종무소에서 몰라서, 난리가 조금 있었죠.
‘바쁘다’소리 절대 안 해 스님의 ‘주역’은 대중의 희망 방편 예언가·도참사상가로 보면 안돼 공부도량 ‘화엄학회’ 원력 못 이뤄 -스님과 탄허 스님과의 인연은 어떻게 해서 이루어졌나요? 저는 고향인 영암의 서당에서 한문을 배우면서, 중학교를 다니다가 외삼촌인 김지견 박사의 소개로 탄허 스님에게로 오게 되었습니다. -4·19가 나고 서울에서 승려대회가 열렸는데 스님은 승려대회에 참가하셨나요? 그곳에서의 추억은 무엇이었나요? 정월 보름이나 해제 때에 있었던 돌림법문이 기억납니다. 전 대중이 법상에 올라가서 법문을 하는 것인데, 지목을 당한 스님들은 안 올라가겠다고 할 말이 없다고 난리가 났죠. 대중이 법상에 안 올라가려고 하면 스님께서 한 마디라도 하고 내려오라고 그러셨어요. 그러면 어떤 스님은 “
늘 새벽 참선…강백이면서 대선사 진관사 주련·편액 탄허 스님 선묵 환갑 잔치상 차렸다고 역정 일본 해일 등 예언 실제로 일어나 -탄허 스님은 이곳 진관사에 자주 오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곳 진관사에 자주 오셨는데, 많이 오신 큰스님은 탄허 스님, 석주 스님, 춘성 스님이에요. 탄허 스님은 여기에 오셔서 화엄경을 교정보신다고 오셨는데, 오시면 한 열흘씩 있다가 가시고 그랬지요. 그럴 때에는 무비 스님, 각성 스님, 명호근, 전창열 같은 사람이 왔다 가고 삼보 스님도 왔다 갔지요. -탄허 스님은 어느 고승과 친근하셨나요? 월산 스님과 제일 친하고, 관응 스님과 석주 스님하고도 친하게 지내셨어요. 하여튼 큰스님들이 나를 너무 좋아했어요. 나라는 사람을 큰스님들이 다 믿으셔서 진관사에 자주, 많이
매일 자정부터 6시간씩 좌선 한암 스님 편애는 유명 요령 잡고 직접 의식 집전도 당신 책 절대 공짜로 안 줘 ? -탄허 스님이 영은사 수도원에서 3년간 계시다가 1962년 가을에 월정사로 돌아오셨는데, 탄허 스님은 그때에도 큰스님으로 대접을 받고 대강백으로 이름이 나지 않았습니까. 현해 스님은 그 시절에 탄허 스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였는가요? 저는 처음에는 탄허 스님에 대한 인식을 좋게 갖질 못했어요. 특히 난 입산 이전 시절인 속가 때에도 불만세력이었어요. 그래서 비판적인 눈으로 탄허 스님을 보니까 탄허 스님의 주위에 별의별 사람들이 붙어 있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겼어요. 노스님(탄허) 주위에는 항상 협잡꾼, 사기꾼처럼 보이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이런 사람들이 우리 스님(희찬)을 모함하고 노스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