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움에는 어떤 구애도 받지 않아 법문·강의 원고 없이 술술 숯으로 흙에 글씨 쓰며 공부 출가자 잘못·제도 강하게 비판 -그 무렵, 탄허 스님은 동국대 대학선원장이 되어서 서울로 올라가시지 않았습니까? 그래요. 스님이 1966년 가을 무렵에 대학선원장이 되어서 서울로 올라가시고, 제가 시봉으로 따라 올라갔습니다. 그해 여름부터 그런 이야기가 오가더니 그렇게 되었어요. 스님은 서울로 가시면서 저를 시봉으로 삼아서 갔는데, 거기에도 조그만 일이 있었어요. 원래 그 시절에는 소임을 6개월만 하고, 6개월이 되면 소임을 바꾸는 전통이 있었어요. 제가 시봉을 6개월 이상을 하였으니, 당연히 다른 사람을 시봉으로 하려고 하였는데 스님께서 저를 계속해서 하려는 심중을 종무소에서 몰라서, 난리가 조금 있었죠.
‘바쁘다’소리 절대 안 해 스님의 ‘주역’은 대중의 희망 방편 예언가·도참사상가로 보면 안돼 공부도량 ‘화엄학회’ 원력 못 이뤄 -스님과 탄허 스님과의 인연은 어떻게 해서 이루어졌나요? 저는 고향인 영암의 서당에서 한문을 배우면서, 중학교를 다니다가 외삼촌인 김지견 박사의 소개로 탄허 스님에게로 오게 되었습니다. -4·19가 나고 서울에서 승려대회가 열렸는데 스님은 승려대회에 참가하셨나요? 그곳에서의 추억은 무엇이었나요? 정월 보름이나 해제 때에 있었던 돌림법문이 기억납니다. 전 대중이 법상에 올라가서 법문을 하는 것인데, 지목을 당한 스님들은 안 올라가겠다고 할 말이 없다고 난리가 났죠. 대중이 법상에 안 올라가려고 하면 스님께서 한 마디라도 하고 내려오라고 그러셨어요. 그러면 어떤 스님은 “
늘 새벽 참선…강백이면서 대선사 진관사 주련·편액 탄허 스님 선묵 환갑 잔치상 차렸다고 역정 일본 해일 등 예언 실제로 일어나 -탄허 스님은 이곳 진관사에 자주 오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곳 진관사에 자주 오셨는데, 많이 오신 큰스님은 탄허 스님, 석주 스님, 춘성 스님이에요. 탄허 스님은 여기에 오셔서 화엄경을 교정보신다고 오셨는데, 오시면 한 열흘씩 있다가 가시고 그랬지요. 그럴 때에는 무비 스님, 각성 스님, 명호근, 전창열 같은 사람이 왔다 가고 삼보 스님도 왔다 갔지요. -탄허 스님은 어느 고승과 친근하셨나요? 월산 스님과 제일 친하고, 관응 스님과 석주 스님하고도 친하게 지내셨어요. 하여튼 큰스님들이 나를 너무 좋아했어요. 나라는 사람을 큰스님들이 다 믿으셔서 진관사에 자주, 많이
매일 자정부터 6시간씩 좌선 한암 스님 편애는 유명 요령 잡고 직접 의식 집전도 당신 책 절대 공짜로 안 줘 ? -탄허 스님이 영은사 수도원에서 3년간 계시다가 1962년 가을에 월정사로 돌아오셨는데, 탄허 스님은 그때에도 큰스님으로 대접을 받고 대강백으로 이름이 나지 않았습니까. 현해 스님은 그 시절에 탄허 스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였는가요? 저는 처음에는 탄허 스님에 대한 인식을 좋게 갖질 못했어요. 특히 난 입산 이전 시절인 속가 때에도 불만세력이었어요. 그래서 비판적인 눈으로 탄허 스님을 보니까 탄허 스님의 주위에 별의별 사람들이 붙어 있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겼어요. 노스님(탄허) 주위에는 항상 협잡꾼, 사기꾼처럼 보이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이런 사람들이 우리 스님(희찬)을 모함하고 노스님
노자·장자 백번 이상 읽고 필요한 공부는 그 자리서 외워 사부대중 차별없이 인재 양성 국가와 민족·정치에 관심 ? -스님은 해인강원을 마치고 선방에 다니면서, 큰스님들을 많이 친견하였는데 혹시 그 때 탄허 스님에 대해 들은 것은 없었나요? 탄허 스님에 대해서는 범룡 스님에게서 들었어요. 저는 범룡 스님과 참으로 인연이 많아요. 저는 범룡 스님을 존경해서 동림산 태안사에서 모시고 살았고, 화엄사 구층암에서도 모시고 산 적이 있어요. 구층암에서는 〈화엄합론〉을 갖고 잠깐 공부한 적이 있어요. 적명스님, 정광스님과 함께 했지요. 그럴 때에 탄허 스님의 이야기를 많이 들었죠. 범룡 스님은 오대산 상원사에서 한암 스님을 모시고 공부하였는데, 그때 탄허 스님과 같이 있었답니다. 범룡 스님은 나중에 한암
고려대 교수들에게 ‘장자’ 강의 유불선 통달해 ‘예언가’로 오해 스승 한암 스님의 선교가풍 이어 운허·관응과 함께 3대 강사 ? -스님은 탄허 스님의 전강제자로 널리 알려졌습니다. 우선 탄허 스님을 만나게 된 배경부터 듣고 싶어요. 저는 지리산 자락의 화개에서 태어났어요. 유년 시절에는 한약국을 하시면서도 서당을 열었던 아버지에게 유교의 사서, 고문진보 등을 배웠어요. 그런데 그 무렵에 내 은사이신 여환스님이 연곡사 서굴암에 계셨어요. 그때 제가 여환 스님을 모시면서 한의학 공부를 하다가 그만 청나라 순치 황제의 출가시와 신라 부설거사의 사부시(四浮詩)를 듣고서는 출가하고 싶은 마음이 일었어요. 그리고 이종익의 소설 〈사명대사〉를 읽고는 육체의 병을 낫게 하는 의사보다는 마음의 병을 낫게 하는 도
한암스님께 배워 다음날 강의 한암 스님 “나보다 낫다” 칭찬 고암·영암·서옹 오대산 도반 ※본 내용은 범룡 스님 입적(2005) 전, 2002년의 대담이다. -스님께서는 금강산 유점사에서 출가하여, 1937년 강원도 3본산 승려 연합수련소에 입소하기 위해 오대산 상원사로 오셔서 처음 탄허 스님을 만나셨다는데 그 당시 탄허 스님께서는 무엇을 하셨습니까? 그때 탄허 스님은 선원 대중들과 같이 생활하면서 3본산 승려 연합수련소의 수련생들에게 강의를 하기 위해 저녁때가 되면 한암 스님께 올라가 원문에 토(吐)를 달고 모르는 것이 있으면 묻고 배운 뒤 이튿날 우리에게 쭉 읽어 주었지요. 그리고 대중들이 듣다가 의심이 나거나 모르는 것이 있으면 한암 스님이 직접 대답해 주었어요. 다시 말하면 탄허 스님이 풀어
※본 내용은 석주 스님 입적(2004) 전, 2002년의 대담이다. ‘한문 잘 하는 이’로 소문나 6·25 때 피난생활 함께 해 운허·탄허 역경 방법 달라 정화 직후 오대산 수련원 개설 -석주스님께서는 탄허 스님을 어디에서 처음으로 만났습니까? 내가 탄허 스님을 처음으로 만난 것은 일제 말기에 선학원에 있다가 상원사에 가서 한 철을 날 때였지요. 그 때 탄허 스님이 한암 스님을 모시고 수행을 하고 계셨는데 거기에서 만났어요. 탄허 스님은 고향에서 보천교를 믿던 사람 두 명하고, 이렇게 세 사람이 같이 와서 한암 스님 회상에서 수행을 하였지요. 그래 그 세 사람하고 함께 한철을 보냈어요. 그런데 탄허 스님은 한암 스님 밑에서 계속 공부했지만 다른 두 사람은 나중에 가 버리고 말았어요.
한암스님 설법 중 일어나 “주십시오” 스승이 던진 주장자 받으며 인가받아 본인이 손수 번역한 책으로 강의 늘 선정에 계셨던 철저한 수행자 ? -스님은 탄허 스님과 인연이 제일 많은 스님으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일제 말기(1941)에 파계사에 입산해서 은사인 고송 스님을 모시고 3년간 있다가, 글공부 하고 싶어서 간 곳이 오대산 상원사입니다. 그때 다른 곳의 강원은 대부분 문을 닫았지만, 상원사에는 승려수련소가 있어서 글을 배울 수가 있다고 해서 은사 스님이 탄허 스님에게 보내는 추천장 받아서 가게 된 것이지. 우리 노장님은 상원사 한암 스님의 회상에서 탄허 스님과 같이 공부한 터라 탄허 스님을 잘 알고 있었거든. 그리고 은사스님은 한암 스님에게서 법도 받았어요. - 탄허 스님이 중대에서 장자
方山窟의 無影樹 〈1〉탄허 스님 탄신 100년 증언- 각성 스님 근대 한국불교의 선지식 한암 대종사의 법을 이은 탄허 스님의 탄신 100주년을 맞았다. 문도회와 월정사는 40년에 걸쳐 〈신화엄경합론〉을 번역하는 등 역경과 교육 등 한국 현대불교사의 외연을 넓힌 스님을 기리는 증언집 〈방산굴의 무영수ㆍ方山窟의 無影樹〉의 발간을 앞두고 있다. 책은 김광식 동국대 교수가 법제자를 비롯한 스님의 생전 지인 62명을 만나 그들로부터 들은 스님의 고뇌와 행보, 사상, 가르침, 인연담 등을 기록한 것으로, 본지에 먼저 책의 신간(身幹)을 정리해 연재하기로 한다. 제호인 ‘방산굴의 무영수’에서 방산굴은 스님의 생전 조실채의 당호로, 이통현(635~730)이 〈신화엄경론〉을 지은 장소인 중국 북경의 ‘방산토굴’에서 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