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안(公案)이란?본래?공부안독(公府案牘)의?줄인?말로?반드시?지켜야?하는?관청의?법령을?말하는?것이다.?선가(禪家)에서는?부처님이나?조사들이?제시한?어구나?행동,?제자들과?나눈?대화,?깨달음의?계기가?된?어떤?정황?등을?참선의?모범적인?법도로?삼아?이를?공안이라?말해?왔다.?특히?간화선에?있어서는?이?공안이?풀어야?할?평생의?숙제가?된다.?간화선은?공부의?핵심이?공안?타파에?있다고?말한다. 〈벽암록〉?서문에?보면?“기록을?모아?공안집을?만들고,?기연(機緣)과?경지를?펼쳐?모범적인?법령으로?삼은?것은?세간의?금과옥조(金科玉條)나?청명대월(淸明對月)?등의?책들과?다를?것이?없다.?조사가?공안을?세우고,?총림에?남겨둔?것은?그?의도가?바로?여기에?있는?것이다.”고?공안의?의미를?밝혀?놓았다. 공안을?통
선종사에?특이한?인연을?소재로?한?특이한?화두가?하나?전해진다. 4조?도신?선사와?그의?제자?우두?법융(牛頭法融:594~657)?선사?사이에?있었던?일화에서?생긴?화두다. 특이한?인연이란?보통?제자가?스승을?찾아가?가르침을?구하는데?스승이?제자를?찾아가?깨우쳤다는?것이고,?특이한?화두는?제자가?스승의?가르침을?받기?전에는?새가?꽃을?물어다?주었는데?가르침을?받고?난?후에는?그런?일이?없어져?버렸다는?것이다. 법융?선사가?우두산?유서사(幽棲寺)?남쪽에?별도의?선실을?짓고?깊은?선정을?닦고?있을?때?도신?선사가?소문을?듣고?유서사를?찾아왔다.?도신?선사가?유서사의?한?스님에게?물었다. “이?절에?도인이?있는가?”?스님이?답하기를?“출가한?스님이라면?누군들?도인이?아니겠습니까?”라고?말했다.
옛날의?고승들은?특정?보살을?친견하기를?서원하여?수행을?했다는?이야기가?많이?전해진다. 우리나라?신라?때?자장?율사가?문수보살을?친견하였다하며,?의상?대사는?관음보살을?친견하였다?한다.?이는?모두?〈삼국유사〉에?기록된?이야기다.?지극한?신심의?정성에?의한?감응이었다고?생각할?수?있는?이야기들이다. 선화(禪話)에서도?보살친견의?이야기가?많이?나온다.?특히?문수보살과?나눈?대화가?많다. 무착문희(無着文喜:821~900)?선사는?위앙종?스님으로?앙산혜적(仰山慧寂)의?제자였다.?어려서?출가하여?비구가?된?후?〈사분율〉을?배우고?제방을?편력하다?당?무종의?불교말살을?획책한?회창폐불사태(會昌廢佛沙汰)를?만나?한때?일시적으로?환속하여?살다?다시?절에?들어와?제방의?선지식을?찾아?다녔다.?그러던?중?그러던?중?홍
불립문자(不立文字)를?표방하는?선가에서도?주옥같은?글을?남긴?선사들이?많았다.? 그것은?선사들?중에도?학식이?높고?학문적?자질이?뛰어난?이들이?많았기?때문이다.?중국의?선불교가?인도에서?온?달마로부터?시작되었다고?하나?선이?토착화?되는?데는?시간이?걸렸다.?달마도래?후?100년쯤이?지나고?양자강?이남에서?중국화?된?선법이?일어나기?시작했다.? 중국선의?자생적?발생에는?〈화엄경〉의?성기(性起)사상,?〈열반경〉의?불성,?여래장(如來藏)사상?그리고?노장사상(老莊思想)이?결합되어?발생하였다.?이리하여?점점?세력을?확장하여?중국의?선불교는?새로운?불교로?일어나면서?동아시아?전역에?지대한?영향을?끼치게?되었다.?그러나?당(唐)나라?때?일세를?풍미하던?선불교가?당나라가?망하고?송(宋)나라가?들어서면서?쇠퇴의?
중국의?절강성?가흥현(浙江省?嘉興縣)에?화정(華亭)이라는?곳이?있는데?사람들이?나룻배를?타는?곳이었다. 이곳에서?뱃사공?노릇을?하면서?지낸?스님이?있었다.?스님은?자신의?정체를?숨기고?뱃사공?형색으로?오가는?사람들을?배에?실어?강을?건네주기만?할?뿐이었다.?오랜?수행을?하고?깨달음을?얻은?도인이?오후보림(悟後保任)의?은둔기를?보냈는지?모를?일이지만?사람들은?그를?‘화정?선자’(華亭船子)라?불렀다.?화정?선자에?대한?정확한?고증이?나타나지?않으나?여러?전등사(傳燈史)에?단편적으로?언급되어?있는?내용을?종합해?보면?법명은?덕성(德誠)으로?청원행사(靑原行思)계(系)의?법을?이은?약산유엄(藥山惟儼)?선사의?제자로?알려졌다.?그의?행적이?후세에?큰?감명을?남긴?것은?그가?쓴?절창(絶唱)의?선시?한?편?때문이다.
수산성념(首山省念:926~993)?선사는?임제?선사의?5대손이다.?처음?출가한?후?각처의?선지식을?두루?찾아다니며?두타행을?실천하다가?〈법화경〉을?3000번?수지독송?했다.?그래서?그를?염법화라?부르기도?하였다.?한?번은?풍혈연소(風穴延沼)?선사의?회상에?있을?때?어느?날?풍혈연소?선사가?대성통곡을?하는?것이었다.?깜짝?놀란?수산?스님이?다가가?“스님,?왜?그러십니까?”?하고?물었다.?풍혈?선사가?대답하기를?“임제의?법맥이?내게서?그만?끊어지는?게?슬퍼서?그러네”하였다.?이에?수산?스님이?안타까운?생각이?들어?“저라도?스님의?법을?이으면?되지?않을까요?”?했다.?그러자?다시?풍혈?선사는?“자네는?〈법화경〉에?걸려?있어서?되겠나?”고?하였다.?수산?스님도?다시?“이제부터?공부를?다시?하여?스님의?법을?잇도록?
선화(禪話)에는?여러?가지?설화들이?대거?등장한다.?때로는?옛날이야기?같은?전설들도?자주?나오는데?역사적인?사실에?근거한?것이?아니라?고도의?은유나?어떤?상징적인?모티브를?제공하여?공안을?채택하기?위한?방편으로?설해지는?이야기들이다. 백장회해(百丈懷海:720~814)?선사는?마조(馬祖)?문하의?삼대사(三大士)의?하나로?알려진?인물이다.?걸출한?선승이었던?마조?제자에?서당지장(西堂智藏)과?남전보원(南泉普願),?백장회해의?삼대?제자가?있었다. 백장?선사에?관한?선화에는?여우?이야기가?있다.?백장야호(百丈野狐)라는?공안에?얽혀?있는?전백장후백장(前百丈後百丈)이야기이다. 먼저?〈무문관〉?2칙의?이야기를?소개하면?백장?선사가?설법을?할?때마다?어떤?노인이?항상?대중을?따라?법문을?듣고는?대중이?물러가
당(唐)나라?명찬(明瓚)?스님은?동양의?디오게네스였다고?불린?스님이다.?생몰연대가?정확히?밝혀지지?않았지만?숭산보적(嵩山普寂:651~739)의?법을?이은?제자였다고?한다. 그는?남다른?점이?많아?여러?가지?일화가?전한다.?형악(衡嶽)에?살?때?스님은?무척?게을러?대중들이?운력을?할?때도?참여하지?않고?공양도?시간을?맞춰?하지?않는?등?괴각(乖角)을?부렸다.?스님은?대중으로부터?비난을?받기도?하였다.?언제나?외톨이처럼?지내며?밥도?남이?먹다?남은?찌꺼기를?모아?먹었다.?이런?명찬?스님의?게으른?습성을?두고?사람들이?별명을?붙여?나잔(懶殘)?혹은?나찬(懶瓚)으로?불렀다.?대중들이?먹다?남은?음식을?즐겨?챙겨?먹었으며?그를?꾸짖거나?비난하는?말을?하여도?전혀?개의치?않았다. 그러나?가끔?그가?내뱉는?한
“발우?하나로?천가(千家)의?밥을?빌며?외로운?몸?만?리를?떠도네.?푸른?눈,?알아주는?이?없으니?흰?구름에게?갈?길을?물어?볼까나?(一鉢千家飯?孤身萬里遊?靑目睹人少?問路白雲頭)” 읽어보면?애틋하게?가슴이?저려오는?시이다.?운수송(雲水頌)으로?알려진?이?시는?포대화상(布袋和尙)이?지은?시로?알려져?있다.?이?시가?그의?생애를?대변하는?한?폭의?그림이?그려지는?시이다.?운수행각을?하는?수도자의?애환이?엿보인다.?구름처럼?물처럼?정처?없이?떠돌며?유랑으로?일생을?보낸?그도?어쩌면?자신을?알아주는?지기(知己)가?없어?무척이나?외로웠는지?모른다.?구름에게?길을?묻는다는?마지막?구가?세상을?초월한?자의?자유보다?그리움의?향수가?묻어나는?것?같다. 포대화상은?정확한?생몰연대가?알려져?있지?않다.?양나라?때?
단하천연(丹霞天然:739~824)?선사는?유학을?공부하여?과거에?응시하러?장안으로?길을?가다가?우연히?한?스님을?만나?불법의?이야기를?듣고?과거를?포기하고?출가를?하였다고?알려진?스님이다. 처음?마조도일(馬祖道一)?선사를?친견하고는?석두희천(石頭希遷)?선사를?찾아가?3년의?지도를?받은?뒤?다시?마조?선사?문하로?돌아와?공부하였다. 어느?날?법당에?들어가?불상의?목에?걸터앉았다.?이상하고?무례한?행동에?대중이?깜짝?놀라?마조?선사에게?고했다.?마조?선사가?법당에?들어가?보고?“참으로?천연스럽구나!”하였다.?이?말에?단하?선사가?내려와?절을?하고?“스님께서?주신?호(號)에?감사를?드립니다”라고?말했다.?이리하여?천연(天然)이란?법호를?쓰게?되었다. 그는?제방을?찾아다니며?여러?선지식들과?교류했다
“지극한?성인의?명맥(命脈),?역대?조사들의?대기(大機),?뼈를?바꾸어?놓는?신령스런?처방(處方),?정신을?기르는?오묘한?술법(術法)이여!” 보조(普照)?선사가?쓴?〈벽암록(碧巖錄)〉?서문?첫?부분에?나오는?이?말은?벽암록을?편찬의?저본이?된?〈송고백칙(頌古百則)〉을?지은?설두?중현?(雪竇重顯:980~1052)?선사와?〈벽암록〉을?지은?원오?극근(圓悟克勤:1063~1135)?선사를?찬탄한?말이다. 종문(宗門)?제1서로?평가된?〈벽암록〉은?특이한?사연을?가지고?있다. 원래?이?책은?〈경덕전등록〉의?1700공안과?〈조주어록〉,?〈운문광록〉?등에서?100칙을?선택하여?그에?대한?송(頌)을?붙인?〈송고백칙〉을?원오?극근?선사가?각?칙(則)에?대한?짧은?서론?형식의?수시(垂示),?본칙과?송에?대한?해
“마음은?본래?청정하여?뚜렷이?밝고?두루?비춘다.?세상?사람들이?깨닫지?못하는?것은,?보고?듣고?느끼는?것을?자기?마음으로?잘못?알기?때문이다.?온갖?번뇌를?여의기만?하면?얻을?법이?없다.?부처라?하는?것은?본래?없던?것이?새로?생겨나는?것이?아니라,?일심을?깨닫고?보면?그것이?곧?부처인?것이다.” 이상은?황벽희운(黃蘗希運:?~850)?선사의?〈전심법요(傳心法要)〉에?나오는?말이다.?〈전심법요〉는?황벽?선사가?배휴의?청으로?심법(心法)의?종지(宗旨)를?전해?준?법문이다.?이?법문이?설해지고?기록되어?전하게?된?데에는?황벽?선사와?배휴의?특이한?인연이?있었다. 〈전등록〉?권?12에?수록된?〈배휴장〉에?의하면?한때?황벽선사가?황벽산?대안정사에?이름을?숨기고?지낼?때였다.?어느?날?배휴가?이?절을?찾아
임제의현(臨濟義玄:?~867)?선사는?스승?황벽(黃蘗)?선사로부터?세?차례에?걸쳐?매를?맞고?깨달음?얻었다는?일화를?가지고?있는?스님이다. 매를?맞은?것이?도를?깨달은?계기가?되었다??어쩌면?선수행?세계에?있는?불가사의한?이야기이다.?임제?선사의?행장(行狀)에?구체적으로?나오는?이?이야기를?삼도피타(三度被打)라고?말하기도?한다.?임제?선사가?같이?공부하던?스님의?권유로?법을?물으러?황벽?선사의?방에?들어갔다가?다짜고짜?방망이에?스무번이나?두들겨?맞았다는?이야기다.?그것도?세?차례에?걸쳐?모두?60대를?맞았다고?한다.?그는?황벽?선사의?이러한?처사에?회상에?인연이?없다고?생각하고?대우(大愚)?선사를?찾아가?전후의?사정을?이야기했으나?황벽?선사가?임제?선사를?친절히?가르쳤다는?대우?선사의?말을?듣고?확철대
중국?강서성(江西省)?구강현(九江縣)?남쪽에?있는?여산(廬山)?서북쪽?기슭에?동림사(東林寺)라는?절이?있었다.?동진(東晋)?때?혜원(慧遠:335~417)?선사의?도반이었던?혜영(慧永)?스님이?먼저?여산의?서림사(西林寺)에?머물다가?혜원?선사를?이곳으로?오게?한?후?당시의?자사?환이(桓伊)에게?부탁해?산의?동쪽에?혜원?선사를?위해?다시?지은?절이?동림사이다. 혜원?스님은?일찍이?육경(六經)을?배우고?노장학에?정통했던?대학자였다.?출가하여?도안(道安)을?찾아가?수행정진하기도?했고?여산으로?옮겨와?30여년을?지내면서?염불수행을?하면서도?교학발전에?크게?이바지?하였다. 제자?법정(法淨)과?법령(法領)을?서역에?보내?범본을?구해와?계빈국?출신?승가바제에게?〈아비담심론(阿毘曇心論)〉과?〈삼법도론(三法度論)〉
오가칠종의?선종?가운데?운문종(雲門宗)은?운문?문언(雲門文偃:864~949)?선사가?종조(宗祖)이다.?운문종도?육조?문하에서?청원행사,?석두희천으로?법맥이?이어져?와?설봉의존?밑에서?탄생하였다.?운문?선사는?당나라?말?오대(五代)의?스님이다.?절강성(浙江省)?가흥(嘉興)?출신으로?공왕사(空王寺)에?출가하여?스님이?되었다.?비구계를?받고?처음에는?여러?경론을?섭렵하고?〈사분율(四分律)〉을?깊이?연구하기도?했다. 선(禪)을?시작한?것은?목주?도종(睦州道?)의?문하에서?였으나?나중에?설봉의존(雪峰義存)을?친견하고?3년?동안?공부하고?인가를?받아?그의?법을?이어?종지를?전수?받았다.?그?후?제방을?편력하다가?소주(韶州)?운문산(雲門山)?광태선원(光泰禪院)에?주석하게?되었는데,?이때에?그의?문하가?크게?융성하여
중국?선종?오가칠종(五家七宗)?가운데?위앙종(仰宗)은?위산?영우(山靈祐:771~853)?선사와?앙산혜적(仰山慧寂:803~887)?선사에?의해?창시된?종파다.?당나라?때?원화연간(806~820)에?영우?선사가?위산에?주석하여?종풍을?떨치다가?그의?제자?혜적?스님이?계승하여?종파로서의?자리를?굳혔다.?이?종파는?당말오대(唐末五代)?시기에?가장?번창하였다가?송나라?때?이르러?점차?쇠퇴하여?자취를?감추기?시작하여?마침내?임제종(臨濟宗)에?흡수되는?형국이?되었다.?위앙종은?대략?150년?정도?명맥을?유지하였다. 영우?선사는?백장회해(百丈懷海)?선사의?법을?이은?후?7년?동안?위산에?홀로?살다가?대안(大安)?스님이?백장?선사의?회상에서부터?찾아온?이래?학인들이?점차로?몰려들었다.?항상?천오백?명이?넘는?대중이?모
동산 양개(洞山良价:807~869) 선사는 중국 선종 5종 가운데 조동종(曹洞宗)을 창시한 종조(宗祖)다. 육조의 제자 청원 행사(靑原行思)의 5대손이다. 선사는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와 형과 살다 남방으로 떠나 글방에 들어가 유학을 공부하였다. 그러나 어느 날 불교 교리에 심취해 유학을 버리고 출가할 것을 결심했다. 선사는 이 때 어머니에게 올리는 사친서(辭親書)라는 편지를 남기고 출가한 스님으로 유명하며 그 글이 널리 알려져 있다. 선사는 오설산(五洩山) 영묵(靈默) 선사의 문하로 가서 스님이 되었다. 21세에 숭산(嵩山)에서 비구계를 받고 제방을 편력하다가 남전 보원(南泉普願)선사를 참방하여 종지를 깊이 깨달은 뒤 위산 영우(山靈祐) 선사를 찾아갔다. 그때 위산 선사가 동산 선사에게 남양 혜
“발심은 선후가 있으나 도를 깨치는 데는 선후가 없다”는 말이 있다. 이 말은 수행자의 공부를 두고 한 말인데 공부를 먼저 시작했다 해서 반드시 먼저 깨닫는 것은 아니란 뜻이다. 실제로 역사적으로 보면 혜능 선사 같은 경우 절에 온지 8개월 만에 오조로부터 법을 전해 받아 육조가 되었다. 그것도 계를 받아 스님이 되기 전에 법을 전해 받고 나중에 인종 법사로부터 계를 받으면서 인종 법사에게 법을 전해준 결과가 되기도 했다. 상좌가 은사보다 먼저 깨달은 경우도 있었다. 중국 당나라 때 신찬(神贊) 선사가 복주(福州)의 고령사(古靈寺)에서 은사 계현(戒賢) 스님을 모시고 살다가 절을 떠나 백장 선사 회상에서 안거를 나고 다시 은사가 계신 고령사로 돌아왔다. 은사가 물었다. “여기 안 있고 밖에가 무엇 하였
당나라 현종 때 사공산(司空山) 무상사(無相寺)에 본정(本淨) 선사가 주석하고 있었다. 한 번은 왕이 중사(中使)인 양광정(楊光庭)을 산으로 보내 산춘등(常春藤)을 캐어 오게 했다. 양광정이 산에 와 지나는 길에 절에 들려 본정 선사를 뵙게 됐다. 그가 절을 하고 물었다. “제가 도를 사모한지 모래입니다. 바라건대 화상께서 자비로써 가르쳐 주십시오.” 본정 선사가 대답했다. “천하 선종의 석학(碩學)들이 모두 장안으로 모이니 천사(天使)께서는 조정으로 돌아가시면 물을 수 있을 것이오. 나(貧道)는 산수에 의지할 뿐 마음을 쓰는 바가 없소.” 광정이 더욱 간절하게 다시 절을 하였다. “나에게 절을 하지 마시오. 천사는 부처를 구하는거요, 아니면 도를 구하는거요?” “제가 우매합니다. 모르겠습니다.
육조 혜능 선사 당시에 선종이 남북 종파로 갈라져 크게 대립한 적이 있었다. 이른바 남돈북점(南頓北漸)이라는 말이 생겨 종지의 차이를 나타내기도 했다. 남돈의 혜능(慧能) 선사와 북점의 신수(神秀) 대사, 두 종주(宗主)는 너와 내가 없었지만 그들의 문도들은 서로 시기 질투로 대립하였던 것이다. 당시 북종의 문인들이 스스로 신수 대사를 옹립하여 6조로 삼고 혜능 선사가 의발을 전해 받았다는 말이 천하에 퍼진 것을 시기하였다. 이 무렵 혜능 선사가 자신에게 다가올 위해를 미리 알고 돈 10냥을 준비해 방에 놓아둔 일이 있었다. 북종의 문인들이 강서 사람 장행창(張行昌)을 매수하여 자객으로 보내 혜능 선사를 해치게 했던 것이다. 야밤에 행창이 칼을 품고 육조 혜능 선사가 거처하는 방으로 몰래 침입 육조를 죽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