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처럼 도타웠던 관응 스님 순일한 표정 속 단호함 깃들어 스님 존경하는 마음 담아 표현한 진영 ‘압권’ 평가받아 “조선 초상화 중 제일 좋은 작품을 꼽는다면 어떤 그림일까요?” 관응 스님이 물었다. 나는 평소 생각대로 안향, 이항복, 송시열, 허목, 이재 초상, 윤두서 자화상 등을 꼽았다. 그러자 스님께서는 그 이유를 물으셨고, 나름대로 생각한 바를 말씀드렸다. 스님은 자신의 생각도 같다고 하셨고 대화는 화상찬까지 화제가 옮겨갔다. 스님께서 그림에 대한 관심과 감식안이 높으셨던 것으로 기억한다. 나는 관응 스님과 많은 시간과 공간을 함께 보냈다. 스님의 따뜻한 말과 배려 속에서 많은 것을 배우고 느꼈다. 자연히 스님의 말씀과 생활을 그림으로 담아내고 싶다는 생
박식함·혜안 속 깃든 따뜻함 마치 어진 이웃할아버지 같아 통찰력 담긴 스님의 작품평 “평범이 특별해지면 ‘힘’ 생긴다” 어느 날 한학자 청명 임창순 선생에게 전화가 왔다. “김 화백, 진짜배기 스님이 계시는데 한번 만나 보세요. 나이가 많이 드셨어도 불법을 철저히 지키는, 스님 중에 스님이에요. 무엇이 자비로운지 어떻게 사는게 자유로운지 스님을 통해 알 수 있어요. 정말 공부를 많이 하신, 이 시대에 만나기 어려운 분입니다. 늦기 전에 한번 방문했으면 하는데, 언제쯤 갈 수 있어요?” 나는 청명 선생의 성격을 잘 알기에 무작정 스님을 만나 봬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지체없이 중암을 찾았다. 스님께서 주석하고 계신 직지사 중암은 적요했고 깔끔하게 정돈돼 있었다. 작은 소리조차도
스님의 정신적 깊이 표현이 과제 얼굴은 더 그릴 수 없을 때까지 옷은 더 이상 뺄 것이 없을 때까지 치열하고 검소했던 스님 삶 담아내 성철 스님의 진영을 본 사람들은 스님이 마치 살아서 뚜벅뚜벅 걸어나오는 것 같다며 특히 피부가 살아있는듯하다고 감탄한다. 그럴 때마다 나는 특별한 게 뭐 있겠냐며 웃어넘겼지만 사실, 나는 많은 시간 성철스님을 생각했다. 내겐 법력이 크신 스님을 이리저리 규정하거나 판단할 자격도, 한계를 지어 허물을 남기고 싶은 생각도 없다. 다만 스님 법문을 열심히 읽고 스님의 생각을 좇아 같은 눈높이에서 스님을 느끼고 싶었다. 진영을 그리기에 앞서 나는 근 한 달을 해인사 부속 암자인 청량사에 머무르며 진영의 초본작업을 했다. 스님은 관절이 좋지 않았다.
마치 새가 모든 장면 내려다보듯 12시간을 하나의 그림속에 축약 스님에 대한 그리움 채워 주길 발원 시간의 흐름을 잊고 바쁘게 살던 어느 날 아침, 전화벨이 울렸다. 아버지였다. “내일 특별한 일이 없으면 해인사에 갔다 오면 좋을 것 같다. 성철 스님이 대단하다고 소문이 자자한데 그분이 사람들에게 얼마만큼 영향을 미친 인물이었는지 보고 싶지 않으냐?” 나는 이미 성철 스님 영결식에 참석할 준비를 하고 있던 참이었지만 나이 든 아들을 아이로 보는 아버지의 마음이 느껴져 알겠노라고 대답했다. 그날은 비가 참 슬프게도 내렸다. 나뭇잎들조차 바닥에 누워 우는 듯한 모습을 보며 나는 오래도록 생각에 젖었다. 해인사 경내에서 치러진 영결식과 다비장으로 가는 길, 그리고 다비식
해인사 등 답사 스님 체취 느끼려 했지만 천학비재 화가에겐 멀게만 느껴져 외형보다 ‘얼’스민 선화 장르 확장 계기 ?처음 성철 스님의 그림을 부탁 받은 것이 1994년 여름으로 기억한다. 그 자리엔 성철스님의 상좌이신 원택 스님과 원영스님 그리고 사진작가이신 주명덕 선생님이 함께 계셨다. 나는 성철 스님의 다비식에 다녀 온 경험이 있던 터라 자연스레 스님과 관련된 이야기와 분위기에 동화 되었고 대화를 이어 갈 수 있었다. 나를 부른 이유는 “성철 스님의 진영을 모셔야겠는데 그릴 수 있겠느냐”는 것이었다. 나는 부족하지만 최선을 다해 작업에 임하겠다고 답했다. 원택 스님께서는 “노장님의 참 모습을 보고 싶다. 이를 모실 수 있도록 해 주면 고맙겠다”며 “스님의 모습을 어떻게 구현하든 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