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 조계종 종단쇄신위원회에서 이 시대에 맞는 ‘승가 청규’를 발표하였다. 매우 고무적인 일이다. 당시 청규를 제정한 어른들께서 강제성을 띠지 않는다고 했지만, 공포되어 공식적으로 실행되지 않았다. 청규(淸規)라는 율장에 있는 내용이 아니라 선종 승려들의 수행 패턴에 맞게 제정된 것으로, 당나라 때 백장에 의해서 처음 시도되었다. 청규를 최초로 제정한 백장 회해(百丈懷海, 749~814)는 어떤 인물인가? 백장은 ‘왕(王)’ 씨며, 복건성 복주(福州) 장락현(長樂縣) 사람이다. 백장의 휘호는 회해(懷海), 서산혜조(西山慧照)를
우리나라 최초의 선(禪) 전래자는 7세기 신라 진덕왕대(647~653 재위) 법랑(法郞)이다. 최치원이 쓴 ‘봉암사지증대사적조탑비’에 의하면, “법랑이 중국으로 건너가 4조 도신(580~651)의 법을 이어왔다”는 기록이 전한다. 하지만 선이 크게 보급되기 시작한 시점은 신라 말 고려 초에 해당한다. 이때 아홉 산에 산문(山門)이 개산되었다고 하여 ‘구산선문’이라고 한다. 그런데 아홉 산문 가운데 일곱 산문이 마조 도일(馬祖道一, 709~788)의 법손이다.즉, 마조의 수제자 가운데 서당 지장(西堂智藏, 735~814)의 법을 받은
‘무소유’ 담장 선사고대 그리스 철학자 디오게네스(BC 5세기 중반 활동)는 목이 말라 물을 먹기 위해 동냥 그릇을 들고 강으로 갔다. 그가 강둑에 다다랐을 무렵, 개 한 마리가 그의 옆을 스쳐 달려가더니 강물에 첨벙 뛰어들어 실컷 물을 마시고 즐겁게 목욕까지 하였다.디오게네스는 그 모습을 보면서 이런 생각을 하였다. ‘저 개는 나보다 더 자유롭구나. 개는 동냥그릇조차 갖고 다니지 않는군. 개도 이렇게 살고 있는데, 나(我)는 이 그릇을 도둑맞을까봐 몸에 안고 다녔다. 한밤중에도 그릇이 없어지지 않았는가 걱정되어 잠을 깬 적도 있었
부처님 재세 당시, 우바리·니티 등 천민 출신 비구가 아라한이 되었고, 수많은 여인들도 정각을 이루었다. 곧 깨달음 앞에 남녀노소가 있을 수 없고, 출·재가자의 구별이 없다. 이 점을 크게 발전시킨 이들이 대승불교를 일으킨 보살들이다.석가모니 부처님이 수십생 동안 보살로서 수행(因)을 통해 부처가 되었듯이(果) 대승불교 보살들도 누구나 수행을 통해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는 점이 부각되었다. 중국에서는 불교가 유입된 이래 재가자의 신행활동이 일반화되었으며, 역대로 깨달은 이들이 많이 있다. 또한 근현대 중국에서 불교가 나락에 떨어진
당나라 때, 마조 선사는 개법을 한 뒤 수많은 제자들이 구름처럼 몰려왔다. 어느 해 마조는 여러 제자들을 이끌고 어릴 적 살던 고향인 사천성 시방현(四川省 什方縣)을 방문했다. 막 마을 입구에 들어서자, 일하고 있던 할머니가 선사를 보고 외쳤다.“어, 마씨네 키쟁이 코흘리개가 지나가네.”마조도일(馬祖道一, 709~788)은 이 말을 듣고, 제자들에게 말했다.“출가해 나이 들어서 절대 고향에 가지 말라.” 예수도 성인이 된 후, 고향에 갔다가 사람들에게 당한 곤욕이 있어 제자들에게 ‘성인이 되어서는 절대 고향에 가지 말라고 하였다고
선(禪)과 관련된 주제를 원고 작성할 때면 늘 떠나지 않는 이야기가 머릿 속을 맴돈다. 구한말 금강산 마하연 아래 목욕탕이 있었다. 이 목욕탕의 주인은 불심이 돈독한 불자로서 스님들이 오면, 목욕비를 받지 않았다. 어느 날 한 스님이 이 목욕탕에서 목욕하고 나오는데, 주인장에게 고맙다는 말을 하면서 몇 마디 덧붙였다.“주인장! 고맙소이다. 육신을 깨끗하게 목욕하니, 기분이 좋습니다.”주인이 그 말을 듣고, 스님에게 이렇게 말했다. “스님, 육신은 깨끗하게 목욕했는데, 마음은 어떻게 씻으시겠습니까?”스님은 아무런 대답도 못한 채 돌아
佛性, 그 위대한 언어“간디 씨, 나(불가촉천민)에게는 조국이 없습니다.”회의석상에서 암베드카르(Ambedkar, 1891~1956)가 인디라 간디에게 던진 말이다. 암베드카르는 카스트(Caste)제도에도 들지 못하는 불가촉천민이다. 그는 1948년 인도가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이래 최초 법무부장관을 역임하였다. 암베드카르가 겪은 간디는 ‘마하트마’라는 단어가 들어가지 않은 그냥 ‘간디 씨’였다. 간디는 불가촉천민을 ‘하리쟌(신의 아들)’이라고 하였지만, 진정한 천민을 위한 성자는 아니었던 듯 하다.(간디는 바이샤 계급) 신분 문제만
우두종 2세 윤주 지암은“중생의 아픔을 알기 때문에 무위(無爲) 세계에 머물지 아니하고, 중생의 고픔을 없애기 위해 유위(有爲) 세계를 저버리지 않는다.”-〈유마경〉 ‘보살행품’타종교와 달리 스님들은 성직자가 아닌 수행자라는 타이틀을 걸머진다. 즉 출가하면서부터 타인을 위해 봉사하겠다는 발원이 아닌 자신의 생사해탈을 위해 출가하는 경향이 강하다. 초기불교에서는 깨달음을 얻어 이 사바에 돌아오지 않는 것을 최고 지향점으로 한다. 곧 ‘회신멸지(灰身滅智, 깨달은 성자는 당연히 윤회하지 않는다)’라는 열반론이다.하지만 부처님의 위대한 진
마음은 모자라지도 넘치지 않는다죄명은 문둥이…이건 참 어처구니 없는 벌이 올시다.아무 법문의 어느 조항에도 없는 내 죄를 변호할 길이 없다.옛날부터사람이 지은 죄는사람으로 하여금 벌을 받게 했다.그러나 나를 아무도 없는 이 하늘 밖에 내세워 놓고.죄명은 문둥이…이건 참 어처구니 없는 벌이 올시다.- 한하운(1925~1975) ‘벌’한하운 시인은 병으로 고생했고 가슴 저린 명시를 많이 남겼다. 한하운 시인과 비슷한 병을 앓고 있는 수나라 때, 선사가 있었다. 이 선사는 40세 무렵, 2조 혜가 앞에 나타나 말했다. “저는 오래전부터
현대적 감각서 본 달마의 禪달마가 중국에 들어온 무렵, 승주(480~560)뿐만 아니라 화북의 수행자들은 백골관(白骨觀)이나 부정관(不淨觀) 수행법을 닦았다. 이에 〈속고승전〉의 저자 도선은 ‘보리달마의 선법은 이론적인 반야(般若) 사상에 기초를 두면서도 벽관(壁觀)이라는 실천으로 새로운 경지를 펼쳤기에 대승벽관(大乘壁觀) 공업최고(功業最高)’라고 극찬했다. 바로 이런 점 때문에 달마가 중국 선종의 초조(初祖)로 받들어지기도 한다. 달마의 선법을 전하는 최고의 문헌은 돈황본 〈이입사행론(二入四行論)〉인데, 이를 토대로 보자. ‘이입
이 연재의 원고는 과거 역사상 불교의 선지식들 이야기를 다룰 예정이다. 과거의 위대한 선지식이 있었기에 현 중국이 사회주의 국가이지만 불교의 면모가 점점 되살아나고 있다. 먼저 중국불교의 현 주소를 엿보기로 하자.10여 년 전, 중국은 지린성(吉林省)의 리훙즈가 창시한 파룬궁(法輪功) 신자들에게 엄청난 종교탄압이 있었다. 그렇다면 현 중국에서 종교를 부정하고, 신앙을 허락하지 않는가? 한마디로 대답하면, 꼭 그렇지만은 않다. 중국은 어떤 특정 종교를 강요하지 않으며, 어떤 종교를 선택하든 간에 자유이다. 현재 중국에서 승인하는 종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