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후기 승려 설두 봉기(雪竇奉琪, 1824∼1889)는 백파 긍선(白坡亘璇, 1767~1852)의 제자이다. 초의와 백파의 선리 논쟁에 참여하여 〈선원소류(禪源遡流)〉를 지었으니 이는 스승 백파의 〈선문수경〉을 비판한 초의와 홍기 등의 주장을 반박하고 백파의 선리를 옹호하기 위함이었다. 그렇게 초의의 선리 입장을 강력하게 비판했던 그가 초의에게 정중한 문안 편지와 부채를 보냈던 정황은 1845년 8월 21일에 쓴 편지에서 드러난다.백파 제자였던 설두 봉기 스님초의·백파 禪 논쟁서 백파 옹호논쟁 후엔 정중한 서간을 보내초의 스님의
1860년 4월 4일 우기(祐祈)는 초의에게 편지를 보냈으며 이 해 7월에도 거듭 편지를 보낸다. 당시 그는 대원암(大圓庵)에 머물렀는데 이 절은 아마 안암동에 위치한 절이라 여겨진다. 그의 법호 지봉(智峯)이다. 1860년 4월의 편지에는 교동대감에게 사중에 일을 부탁하는 내용이 보인다. 아마 교동대신은 당시 권문세가였던 김조순(金祖淳, 1765~1832)의 아들 김좌근(金左根, 1797~1869)일 것으로 추정된다. 두 차례 보낸 그의 편지를 차례로 살펴보자. 먼저 1860년 4월의 편지이다. 크기는 30.4×45.5cm이며 피
조선 후기 초의에게 보낸 경성사 승려 원장(元長)의 편지에는 불화에 능했던 초의가 승려의 영상을 그리는데 관여했던 사실이 드러난다. 초의에게 선종의 초묵법(갈묵으로 그림을 그리는 기법)이 전해져 소치 허련에게 이어졌던 사실은 추사 김정희의 편지에서도 확인된다는 점에서 초의가 불화에 능했던 사실은 이미 내외에서 인정된 듯하다.그러므로 원장이 초의에게 함월 노화상(1691~1770)의 영상(影像, 초상)을 부탁했다는 사실은 불화에 능했던 초의가 대둔사 관련 승려들의 영상을 그리는데 주도적으로 참여했음을 거듭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그렇
조선 후기 관료 변지화는 초의와 동시대를 살았던 인물이다. 북산도인(北山道人)이란 호를 썼으며 1832~1837년경까지 진도목사를 지냈고 홍현주(1793~1865)의 별서를 출입했던 사람이지만 그의 생애를 조명할 자료는 초의와 주고받았던 몇 수의 시문이 남아있을 뿐이다.지금까지 학계에서는 그가 1832년경 진도목관으로 부임된 후 초의를 처음 만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그가 1838년 7월, 초의에게 보낸 편지에 “해옹(홍현주)의 정사에서 서로 헤어지고 나서 마음은 작은 배에 실려 남으로 가려고 합니다”라고 하였다. 따라서 변지화
유산 정학연(酉山 丁學淵, 1783~1859)은 다산 정약용(茶山 丁若鏞, 1762~1836)의 장남으로, 초의와 추사 김정희(1786~1856)를 연결해준 인물이다. 강진 다산초당에서 처음 만난 정학연과 초의는 평생 돈독한 우정을 나눴다. 특히 처음 한양을 찾았던 초의에게 적극 도움을 주었던 정학연은 1830년경 2번째 상경 길에도 물심양면 후원을 아끼지 않았고 실제 초의가 경화사족들과 폭넓은 교유를 확대했던 계기는 정학연이 마련해 준 것이라 하겠다.이들은 각기 수신과 수행을 실천하며 지향했던 목표를 이루고자 했다. 유자(儒者)와
대은암 승려 유정(有正)이 초의에게 편지를 보낸 것은 1843년 12월 9일에 일이다. 편지의 피봉에 ‘초암(草庵) 정수 대은암 소승 유정 상후서(草庵 淨水大隱庵 小僧 有正 上候書)’라고 쓴 것으로 보아, 대은암(大隱庵)은 정수사(淨水寺) 산내 암자라는 사실을 밝힌 셈이다.이뿐 아니라 조선 후기 전라남도 일원의 사찰들이 대부분 대흥사의 말사였고 초의를 사주(師主), 즉 스승이라 칭한 점에서 유정은 대흥사 출신 승려로, 초의와 사제의 인연이 있었던 인물일 것이라 짐작할 뿐이다. 혹 그에 대한 자료를 찾을 수 있을까 하여 대흥사 권속에
1840년 7월 3일 불갑사 승려 도영은 초의에게 편지를 보낸다. 크기는 27.2cm×43.0cm이고 행서체로 꾹꾹 눌러쓴 편지로, 정중함이 묻어난다. 겉봉투 상단에 ‘대둔사 초의사주 대법하 회답(大芚寺 草衣師主 大法下 回答)’이라 썼으니 초의에게 보낸 편지임이 분명하다. 하단의 오른편에 ‘불갑사 도영 상사장(佛甲寺 道影 上謝狀)’이라 썼다. 바로 초의가 보낸 편지에 대한 도영의 답신인 셈이다. 도영이 총섭차첩(總攝差帖)을 받는 과정에서 초의와 서로 다른 입장 차이를 보였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1840년 7월 도영이 보낸 편지총섭차
1841년?10월에?보낸?소치?허련(小癡?許鍊,?1809~1893)의?편지는?세로?116.8cm,?가로?24.6cm정도나?되는?장문의?문안?편지이다.?이?편지에는?대흥사?사중에서?산소?가에서?자라는?소나무를?잘라?관에?추증이?되는?등,?어려운?상황에?처해?있었고,?이를?해결하기?위해?초의차가?필요하다는?내용이?보인다. 이뿐?아니라?대흥사?사중에서?만든?차품이?“지난번?연영으로?보낸?차는?비록?스님께서?친히?감사하여?봉한?것은?아니지만?차품이?깨끗하고?맛도?맑습니다.?관찰사(使家)에게?칭찬을?받을?만하고,?드러난?공으로?다른?사람에게?빼앗길?만한?차품”이라고?한?점이다.?당시?대흥사?사중에서?생산되는?차품의?질을?짐작하게?하는?이?편지는?이와?같이?시작된다. 당시?대흥사서?松楸?잘라?물의 “해결위
기산(起山)은?김상희(起山?金相喜,?1794∼1861)의?자(字)이다.?추사?김정희(1786~1856)의?아우로,?기산(起山)이외에?기재(起哉)라는?자를?썼으며?호는?금미(琴?)이다.?영유?현령을?거쳐?호조?별장을?역임했다. 그와?초의는?평생?교유했는데?이들이?처음?만난?시기는?대략?1815년경이라?여겨진다.?당시?초의의?상경?연유는?밝혀지지?않았다.?그러나?그가?학림암에서?추사를?만난?계기는?이로부터?비롯된?것이니?이는?초의에게?물심양면으로?도움을?준?인연을?만난?셈이었다.?특히?초의의?학문적인?지향이나?수행,?그리고?새로운?시대?조류를?체험할?수?있었던?창구는?바로?추사였던?것이다.?이뿐?만이?아니다.?초의는?추사를?통해?그의?형제들뿐?아니라?경향에?역량?있는?사족들과의?폭?넓은?교유를?확대할?수?
근현대기에?가장?변화무쌍하게?변화된?것은?정보?통신이다.?20세기?초까지도?편지로?서로?정보를?교환했던?시절에?비하면?격세지감을?느낀다.?특히?핸드폰의?일반화나?소셜미디어(Social?Network?Service)를?통한?정보?교류는?상상을?초월하는?신세계를?열었다.?물론?현대적인?소셜미디어(SNS)는?1990년대?이후?월드와이드웹?발전의?산물이라고?한다.?하지만?이런?정보?수단은?편지처럼?눈으로?정보를?교류했던?시대로?회귀한?듯한데?매개체이나?전달?방법은?판이하게?다른?특징을?보인다. 시공간을?압축시킨?SNS가?실로?소통의?방식으로?가장?이상적인?것일까.?물론?현대인의?삶의?방식에도?지대한?영향을?미친?정보?통신의?혁신은?사람?간에?유기적으로?이어지는?정서?공감이라는?측면에서는?많은?문제점을?드러낸다
며칠?전?초의선사(草衣禪師,?1786~1866)와?교유(交遊)했던?이들의?편지를?완역했다.?자료마다?간략한?내력과?특징을?수록한?원고는?오랫동안?필자의?손때가?묻은?것이다.?일단?초의선사에?관련된?자료?중에?지금까지?발굴된?편지들이?대부분?필자에?의해?수집?정리되었다는?점에서?그?감개무량함을?무엇에?비길?수?있으랴.?다른?한편으론?스승?응송?스님과?맺은?언약을?지켜?냈다는?안도감뿐?아니라?이를?수행하는?동안?도움을?주었던?모든?인연들에게?감사를?드린다. 95통의?초의?서간문?새로?발굴 당대?문인부터?스님까지?다양해 시대?상황·茶?문화?확인할?단초 조선?미시사?연구에도?도움될?것 이번에?탈고된?초의선사와?관련된?편지와?시첩들은?원래?응송?스님(應松,?1893~1990)이?수습했던?자료?중의?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