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으로 사랑·존경 다 해도 표현하지 않으면 소용없어 기다리지 말고 먼저 다가가 ‘사랑한다’ 말할 때 ‘꽃’ 피어나?? ?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김춘수 ‘꽃’ ? 맞다. 아무리 좋은 말이라도 내가 표현하지 않으면 상대방에게 가서 꽃이 될 수 없다. 부부 사이도, 부모자식 간에도, 모든 대인관계에서 마찬가지다. 아무리 사랑하고 존경하고 정성을 다하더라도 상대방에게 표현하지 않는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 P할머니의 눈물은 부부 간에 표현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말해준다. 대학병원 외과 의사를 남편으로 둔 P할머니는 겉보기엔 아주 다복한 삶을 살았다. 처음 결혼
주체의식과 지혜와의 충돌 묘사 탐욕 상징, 저팔계의 부추김 이어져 내적 갈등 극복은 통일된 인격 형성 인삼과를 복용한 현장법사, 정신도 맑아지고 몸도 튼튼해지고 기운이 팔팔하다. 그 기운이 구도심으로 뻗쳐 열심히 경 구하러 가는 길을 재촉한다. 그렇지만 인도 가는 길 또한 만만치 않아라. 경치도 좋지만 험하기도 한 산이 또 가로막는다. 허위허위 오르다보니 팔팔한 기운에 걸맞게 배도 또한 빨리 고파진다. 현장법사, 손오공을 채근한다. “오공아, 오공아! 빨리 어디 가서 먹을 것을 좀 구해오너라.” 손오공 근두운 타고 하늘 높이 올라 사방을 둘러보고 멀리 복숭아나무에 잘 익은 복숭아 달린 것 찾아내곤 그거 따다 드리겠다고 찾아 간다. “산이 높으면 반드시 요괴가 있고 골짜기가 험준하면 도깨비가 생긴다
요즘 아이들이 무엇을 먹고 자라는지 살펴보면 가슴이 철렁할 때가 많다. 아이들에게 좋아하는 음식이 뭐냐고 물으면 한결같이 달고 기름지고 맵고 자극적인 음식을 줄줄 꿴다. 왜 아이들은 순하고 맑은 음식은 ‘맛없다’고 여기고, 달고 기름지고 자극적인 음식은 ‘맛있다’고 느낄까. 가끔 엄마들에게 제철채소 반찬을 아이들 밥상에 올리라고 하면 “우리 아이는 원래 안 먹어요”라고 답한다. 과연 아이들의 입맛은 ‘원래’ 그런 것일까. 몇 년 전부터 여름방학마다 초등학교 급식 영양사를 대상으로 수업을 진행하고 있다. 사찰음식을 기반으로 한 급식레시피 개발이 목적이지만, 많은 영양사들이 나의 강의를 듣고 ‘음식’에 대한 생각을 바꾸게 되었다고 한다. 정년이 2년 남았다는 한 영양사는, 지금껏 잘해왔는데 왜 이런 강의를 들
지금까지 ‘계율정신의 근원’을 찾아보기 위해 니까야에 나타난 부처님의 생각을 더듬어 보았다. 불교 밖의 사유체계와 소통하기 위해서 ‘계율정신’이라는 말을 썼지만, 불교 안의 사유방식으로 말하면 계(戒)와 율(律)의 의미는 다르다. ‘계(戒)’는 팔리어 ‘실라(s?la)’를 번역한 말로써 ‘습관, 성격, 도덕적 행위, 도덕성’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부처님이 강조한 계율 정신에 토대하면, ‘실라’는 현대의 ‘도덕성’ 개념에 가까운 말인 것이다. 여기서 도덕성이란 나와 남에게 유익함을 주는 행위, 오염이 아닌 청정함을 일으키는 행위를 비롯하여 궁극적으로는 해탈과 열반을 지향하는 길에 필요한 첫 번째 자산이 바로 ‘도덕(戒)’이라는 확신에 기초한 인식과 실천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에 반해 종교 일반의
18세 초시에 장원, 명성 크게 떨쳐 집무실에 ‘不易心’ 편액 걸어놔 혼란의 변고로 유배생활 보냈지만 다시 벼슬길 올라 보국충정 실천 교유한 승려만 60명, 근체시 능해? 동악 이안눌(東岳 李安訥, 1571~1637)은 어린 나이에 분전(墳典), 즉 고전(古典)을 두루 섭렵하여 신동(神童)이라 칭송된 인물로 수많은 승려들과 교유하였다. 그의 자(字)는 자민(子敏)이며, 별호(別號)는 동악(東岳)이다. 저서로 〈동악집〉을 남겼다. 그의 인물 됨됨과 학문적 성취는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에 “일찍이 선조께서 주감(胄監)에게 제생(諸生) 중에 후일 대제학이 될 만한 사람에 대해 묻자 공의 이름을 들어 대답하였다”는 사실에서 드러난다. 하지만 세상만사는 그저 순조롭기만 한 것은 아니다. 일품(
독일 ‘제로 운동’의 핵심적 인물 禪 통해 치유… 작품세계도 영향 주로 못으로 이미지를 형상화해 존재방식 성찰·소통 과정 보여줘 “자신의 가치 스스로 인정한다면 어떤 충격에도 상처받지 않는다” 무수히 많은 못들이 두꺼운 판을 뚫고 지나가며 둔탁한 소리를 낸다. 시간이 흐르면 점차적으로 개체로서의 못은 사라지고 커다란 집단을 형성하며 스스로의 모습에서 변화를 꾀한다. 이처럼 밀집된 공간에 스스로의 역할을 하는 것 같은 못을 통한 행위는 하나의 예술작품이 된다. 못은 서로를 연결해주는 역할을 한다. 전혀 낯설어 보이는 것들도 못의 역할을 통해 서로의 밀착되어가는 과정에서 서로의 모습이 합치된다. 그 의도가 무엇이든 새로운 모습으로 탄생하며 자신의 존재가치를 들어낸다. 귄터
빗소리에 일찍 일어나 방문을 활짝 열고 가만히 누워 비를 듣는다. 산사에서는 아무 것도 아닌 일상이 다 특별한 것만 같다. 이 순간에 최선을 다하며 살아야하는 말을 하고, 그림을 그리며, 막상 나는 지금 이 순간에 일상의 소중함, 특별함을 새삼 느끼고 있다. 비 때문인지 경내는 아침에도 밤처럼 소리가 없다. 빼꼼히 대웅전 문을 열어본다. 등을 켜지 않아 어두운 실내에 부처가 가만히 웃고 있다. 합장 반배를 올리고 마음으로 말한다. 부처님, 저 잘 쉬었다 갑니다. ?
멈췄던 것 같은 시간이 다시 흘러가. 아빠는 회사에 나가고, 엄마는 새로운 일감을 맡았어. 이번에는 밥솥을 디자인한대. 엄마가 디자이너라고 하면 사람들은 고개를 갸우뚱하지. 엄마는 지나치게 수수하니까. 옷 하나를 사도 남자애들이나 입을 것 같은 옷을 사 오지. 할머니는 뭐든 잘 만들었어. 엄마가 사온 밋밋한 셔츠도 할머니 손길이 닿으면 아주 멋지게 변신했어. 친구들은 늘 내 머리 모양이나 옷을 부러워하곤 했지. 나는 2학년이 되었어. 새로운 담임선생님과 새로운 친구들을 만났어. 아이들은 예쁜 담임선생님을 만났다고 좋아했지만, 나는 모든 것이 낯설어. 시간이 거꾸로 흘렀으면 좋겠어. 다시 1학년이 되고 겨울이 되고 가을이 되면 떠났던 할머니가 돌아오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게 돼. 일주일이 지나면 큰고모
이혼, 이해·소통 부재서 비롯 자신의 틀에서 상대 보려해 서로 입장에서 ‘나’를 봐야 소통 잘하면 자녀도 보고 배워 ?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난다’는 말이 있다. 실제로 스님들 사이에선 그런 일이 많다. 그러나 가족은 다르다. 아무리 싫어도 함부로 떠날 수 없는 것이 가족이다. 남편이 아무리 마음에 안 들어도, 아내가 하는 행동마다 얄밉고 보기 싫어도 쉽게 가정을 버릴 수 없는 것은 백년가약이라는 아름다운 언약을 내팽개칠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많은 부부들이 아름다운 언약을 버리고서라도 가정을 떠나고 싶어 한다. 갈수록 늘어나는 이혼율이 그것이다. 예식장에서 ‘검은 머리 파뿌리 되도록 사랑하며 살 것’을 맹세한지가 엊그제 같은데 왜 그토록 많은 부부들이 가정과 가족을 버리고 이혼의 길을 선택할
17세기 후반 불교조각사 거두 호남 활동한 색난 스님과 쌍벽 목불 아닌 佛石으로 불상 조성 문헌 통해 활동 시기·지역 가늠 경주 기림사 중심으로 활동하며 전국 걸쳐 석불 수백점 만들어 기림사·수도사 시주자 참여도 17세기 후반에 호남에서 활동한 색난 스님과 쌍벽을 이루는 영남에 거주한 조각승은 승호(勝湖, 勝浩)스님이다. 승호 스님은 색난 스님과 달리 경주에서 산출되는 불석(佛石)으로 석불을 제작하였다. 불석은 일명 경주석(慶州石)이라고 부르는 돌로, 수분을 먹으면 조각도로 조각할 수 있지만, 수분이 없어지면 아주 단단한 특징을 가진다. 흔히 노스님들이 석고로 만든 불상이 전각에 봉안되어 있다면 대부분 불석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현재 승호 스님이 만든 석조불상은 전국에 걸쳐
10대제자, 16나한, 오백나한 등 526체 영산전, 나무와 흙벽 그대로인 백골단청 고려오백나한도 14점과 순번, 존명 일치 생로병사 애환 밴 천태만상의 나한 표정 지눌스님 정혜결사를 펼친 도량 나한(羅漢)은 범어 아르한(arhan)의 음역인 아라한의 줄임말이다. 아라한은 부처님의 제자로서 수행을 통하여 일체의 번뇌를 끊고 수행자들의 최고 계위인 아라한과(阿羅漢果)를 얻은 성자를 이른다. 공양 받아 마땅한 사람이라 응공(應供)으로도 부르고, 진리에 따르므로 응진(應眞), 또는 더 이상 배울 것이 없어 무학(無學)으로도 부른다. 불제자들은 경전에 따라 여러 숫자의 집합단위로 등장한다. 〈유마경〉에서는 십대제자, 현장스님이 번역한 〈대아라한난제밀다라소설법주기〉에서는 십육나한, 〈증일아함경〉, 〈오분율〉
‘고행에 의한 금욕생활의 완성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니그로다’의 이 질문에 대한 부처님의 대답은 간단하다. 앞에서 열거한 규범들을 철저하게 지키고 있어도 거기에 ‘더러움ㆍ오염ㆍ타락(upakillesa, 수번뇌)’이 있다면 완성이 아니라고 하였기 때문이다. 수행의 완성을 방해하는 ‘더러움’이란 무엇인가? 첫째, 고행을 실천함으로써 그가 의도한 바가 이루어졌다고 흡족해하는 것. 둘째, 고행을 실천함으로써 자신을 칭찬하고 남을 업신여기는 것. 셋째, 고행을 실천함으로써 기분에 들뜨고 취하여 게으름(방일)에 떨어지는 것. 넷째, 고행을 실천함으로써 이득ㆍ존경ㆍ명성을 얻게 되는 것. 이처럼 고행의 실천으로 나타나는 결과에 동요하고 있는 모습이 더러움이다. 이 네 가지로 인해 수행이 오나성을 향해가는
중국 표착선에 실린 1천여 불서 화엄교학 전성시대 크게 기여 관련 판목 마멸될 정도로 인출 조선 사상계 접점에도 일익 담당 18세기 이후에는 이력과정을 중심으로 강원에서 강학이 매우 활성화되었다. 특히 대교과에 속한 화엄의 강경과 교학 연구가 중시되었고, 화엄 및 이력과정 교재를 대상으로 한 강의노트이자 주석서인 ‘사기(私記)’가 다수 저술되었다. 화엄학 유행의 계기가 된 것은 중국 불서의 우연한 전래였다. 1681년 전라도 임자도 앞바다에 풍랑으로 좌초한 중국 상선이 표착하였다. 배 안에는 사람은 없고 의문의 불서가 가득 실려 있었다. 그런데 이때 표류해 온 중국 배는 황벽판일체경(철안판) 판각을 위해 중국의 가흥대장경(가흥장) 간인본을 싣고 일본으로 가던 무역선이었다. 가흥장은 1589년부터
유도 배우면서 불교에 심취 禪 수행하며 예술가의 길로 유럽 등 禪風 확대 큰 공헌 청색을 깨달음의 색으로 설정 자신만의 청색 ‘IKB’ 만들기도 청색 담은 파격·격외 작품들 자기 정체성·내면 변화 표현 ‘깨달음에 이르는 예술’ 지향 “Ich mochte das Nichts nicht, und so lernte ich die Leere kennen, die tiefe Leere, diese Tiefen des Blau.” ?- Yves Klein(1956) “무(無)는 무(無)가 아니기를 원하고, 그리고 공(空)을 배웠으며, 공(空)의 깊이는 바로 청색이다.” ?- 이브 클라인(1956) 일상의 삶에서 쓰고 버려지는 물건들을 수집하여 모두 청색으로 색칠한다. 청색을
불교의 처음과 끝은 자비심 불자 자비증장 기회 가져야 “자비행은 전법행으로 이어져” 전 회의 이야기를 좀 더 이어나가 볼까요? 무한한 시간과 공간 속에서 ‘푸른 바다의 좁쌀 한 톨’(滄海一粟) 같고, ‘번갯불이나 부싯돌이 부딪쳐 나는 반짝임’(電光石火)처럼 짧은 우리 삶은 어떤 의미를 가질까요? 또 그런 커다란 관점에서 우리 삶의 모습을 살펴본다는 것은 또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갑자기 장자(莊子)의 이야기가 생각나네요. 장자 책의 첫머리가 어떻게 시작하는지 아시나요? 북쪽 바다에 큰 물고기가 있답니다. 그 이름이 곤(鯤)이지요. 그 곤의 크기는 몇 천리나 되는지 모른다네요. 그 물고기가 변하여 붕(鵬)이라는 새가 되죠. 그 새의 크기도 어마어마. 몇 천리가 되는지 역시 모른답니다. 이 붕새가 남쪽 바
솜씨가 교묘한 목장인으로 추앙 전국 걸쳐 수백 점의 불상 제작 조선후기 불교조각사 한획 그어 생몰 미상… 발원문·사적기 통해 색난 스님의 활동 지역 등 가늠 주로 호남 지역 중심 불상 조성 고흥 능가사 주석·부휴문도 추정 조선 후기(1600~1910)에 불교조각사의 최정상에 있는 작가는 색난(色難) 스님이다. 당시 대부분의 불상을 만든 조각승들을 화원(畵員), 양공(良工) 등으로 불렀다. 하지만 색난 스님은 달랐다. 일부 문헌을 살펴보면 색난 스님은 솜씨가 교묘(巧妙)한 목수(木手)라는 의미로, ‘교장(巧匠)’이나 ‘조묘공(彫妙工)’으로 기록돼 있다. 이만큼 당시에도 색난 스님의 조각 기술의 명성이 높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현재 색난 스님이 만든 불상은 전국에 걸쳐 20
시공간, 체험따라 의미 틀려 삶의 고(苦), 다르게 보면 삶의 목표로 다시 다가와 초연한 사고와 수행 자세 필요 인삼과 나무를 뿌리째 뽑아 놓은 현장법사 일행, 붙잡혀 갇히게 되지만 손오공 신통한 술법이 이때 빛을 발한다. 살며시 빠져나와 열심히 도망친다. 청풍 명월 두 사람 한 달 동안 잠들게 만들어 놓고……. 그러는 사이 하늘 세계 강의차 방문했던 진원대선 돌아오고 인삼과 뿌리째 뽑힌 걸 알게 되고 현장법사 일행 도망친 것도 알게 되고 휘익~ 구름을 타고 현장법사 일행을 추격해서 ‘게 섰거라!’ 그런다고 서냐! 그렇지만 진원대선 신통한 술법이 있다. 수리건곤(袖裏乾坤)이라, 소맷자락 속의 세상이란 뜻인가? 휘익~ 소맷자락 한번 쓸어내면 한꺼번에 소맷자락 속으로 휘리릭~ 빨려 들어가 버린다네. 손
할머니가 우리 곁을 떠난 지 일곱 날이 지났어. 할머니를 차가운 땅속에 묻고 돌아와서 엄마는 며칠 동안 앓아누웠어. 아빠는 회사에 나가지 않고, 집에서 엄마와 나를 보살폈지. 아빠가 앞치마를 두르고 밥을 짓고 설거지를 하고 청소하는 모습을 보았다면 할머니 기분이 썩 좋지만은 않았을 거야. 집안에는 물에 젖은 솜이 가득 차 있는 것 같아. 어디를 가도 무겁고 축축해. 큰고모 스님(어른들이 이제 큰고모에게 고모라고 하면 안 된대. 행화 스님이라고 해야 한 대.)이 목탁을 두드리며 불경을 읊고 있어. 목탁 소리에 맞춰 작은고모는 아이고 아이고 우는 소리를 내. 작은고모는 절을 올리다가 일어나지 않고 그 자리에서 엎드려 울음을 터트렸어. “아이고, 엄마. 엄마 없이 내가 어떻게 살아. 난 못 살아. 엄마
새벽, 해우소를 다녀오는 길에 달을 만났다. ‘제가 여기 계신 달님 보러 이렇게 왔습니다.’라고 하니 달은 푸른 웃음을 짓는다. 다시 방에 들어가 남은 잠을 자기엔 아쉬운 새벽이었다. 눈이 다시 내리기 시작했고 대웅전에서 새어나오는 노란 불빛에 나방처럼 다가섰다. 법당 안에는 새벽 예불을 준비하느라 불을 밝히는 노보살이 혼자 합장을 하고 있었다. 들어설까 잠시 주춤하다가 가만히 돌아섰다. 내가 오롯이 홀로 있고 싶은 순간의 마음이 날 붙들었나보다. ?
약초 공부 모임에 가는 길이었다. 가로수에 아슬아슬하게 얹힌 까치둥지가 눈에 들어왔다. 이 추운 날 새들은 어디에서 먹이를 구하고 언 몸을 녹일까. 차가운 하늘을 헤매고 다닐 작은 새를 생각하니 불현듯 측은지심(惻隱之心)이 들었다. 측은지심이란 무엇인가. 바로 불교의 ‘자비’다. 남의 고통을 내 것처럼 슬퍼하는 마음이다. 사찰음식은 자비를 깨우는 방편이 되기도 한다. 몇 년 전 지방에서 강연을 마치고 돌아가려는데, 한 중년 여성이 다가와 자신을 알아보겠느냐고 했다. 어릴 적 고향 친구였다. 그녀는 방송에서 내가 스님이 되었음을 알았지만 여기서 만날 줄은 몰랐다고 했다. 단발머리 소녀를 초로의 여인과 스님으로 만든 세월이 서운하게 느껴진 것도 잠시, 나는 그녀가 녹록지 않게 살아온 이야기를 듣고 잡은 손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