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마가 지나가고 무더위가 시작됐다. 사람들은 무더위를 피해 산과 바다로 떠나기 시작했다. 시원한 계곡의 그늘과 파도치는 바다도 좋지만 풍경소리 들려오는 사찰의 그늘을 찾는 것도 좋을 것 같다. 8월 1일 김제 금산사 마당의 보리수 그늘 아래 신부님과 수녀님들이 앉았다. 먼 풍경소리가 시원한 바람을 실어오고, 산새 소리가 시름을 물어간다. 올 여름은 보리수 그늘에 부처님처럼 앉아 한 더위를 끊어내 보자. ?
숨이 끊어질듯 매미들이 운다. 어디서 왔는지 그 빽빽한 울음소리는 저마다 갈 곳이 있었다. 미륵전 지붕 위, 사리탑, 계단(戒壇), 마당의 보리수…. 매미소리 가득한 모악산 기슭. 천년을 넘긴 미래가 한 순간처럼 서있다. 금산사다. 금산사는 599년(백제 법왕 1)에 세워졌다고 전해오지만 확실하진 않다. 후에 진표 스님(眞表 ; 생몰 미상)이 중건을 했다. 금산사에 계시던 스님은 절벽에 세운 변산의 부사의암(不思議庵)에서 미륵보살과 지장보살을 친견하기 위해 정진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한다. 스님이 절벽에서 몸을 던지니 2 명의 청의동자가 손으로 받들어 다시 절벽위로 모시며 “아직 법력이 모자랍니다.”고 하자 스님은 다시 정진하여 미륵불과 지장보살을 본다. 그리고 금산사로 돌아온 스님이
조선의 문신이자 농학자였던 강희맹(姜希孟:1424~1483)이 명나라에서 가져온 연꽃씨를 심었던 경기도 시흥시 관곡지 주변 연밭에 연꽃이 만발했다. 불자들의 가슴에 늘 피어 있는 연꽃. 많은 사람들이 들판에 핀 연꽃을 보기 위해 모여들었다. 잠시 날이 개인 7월 26일 유치원 아이들도 연꽃을 보러 나왔다. “우리도 연꽃 보러 왔어요” ?
늘 겁 없이 지나다니던 그 길목, 명부전 앞. 그 길을 그렇게 겁 없이 걸어 다닐 수 있었던 것은 지장보살님이나 시왕 앞에 당당해서가 아니라 명부전의 의미를 몰랐기 때문이었다. 시방삼세에 의미 없이 존재하는 것이 없을 것인데, 하물며 도량의 길목마다 붙여진 이름의 의미도 알지 못한 채 드나들었던 세월을 생각하면 그것도 업보라는 생각이 든다. 여러 날을 쉬지 않고 비가 내렸다. 명부전 뜰의 발자국들이 비에 젖었다. 인경(印經)을 하듯 고인 빗물에 발자국들이 드러났다. 발자국 위에 또 발자국, 그 위에 또 발자국. 명부전 뜰엔 발자국이 많았다. 대웅전보다 많았고, 극락전보다 많았다. 내릴 비가 다 내리고 해가 돋았다. 고였던 빗물이 햇살에 마르고 발자국엔 햇살이 고이기 시작했다. 이번엔 햇살에 발자국이
김천 직지사는 7월 18~20일 ‘직지사 청소년 여름수련회’를 개최했다. 학생들에게 올바른 몸과 마음을 가질 수 있게 하기 위해 마련된 이번 수련회에는 전국의 중고등학교 학생 70여 명이 참가해 다양한 프로그램을 체험했다. 행사 마지막 날인 20일, 학생들은 불볕더위 속에서 각자의 서원을 담은 삼보일배를 통해 마음을 다졌다. ?
장마가 지나간 숲길은 앓고 일어난 몸처럼 선명했다. 숲길이 끝나자 돌계단 위로 커다란 느티나무 한 그루가 사천왕처럼 서있다. 800년을 넘게 살았다고 적혀있다. 돌계단을 오르자 산새 한 마리가 느티나무 가지에 날아와 앉더니 고개를 이리 돌렸다 저리 돌렸다 한다. 제 집이라고 들고 나는 이를 살피는 것일까. 산새가 날아간 빈 가지 너머로 극락전이 보인다. 비암사다. 비암사는 창건에 관한 정확한 기록이 없다. 다만 멸망한 백제의 유민이 세운 백제의 마지막 사찰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비암사에서 발견된 국보 제 106호 ‘계유명 전씨 아미타불 삼존 석상(국립청주박물관 소장)’에 “전(全)씨들이 마음을 합쳐 아미타불과 관세음, 대세지보살상을 삼가 석불로 새긴다. 계유년(673년) 4월 15일 목(木)아무개
‘생각’이 시작되던 날부터 탑들이 생겼다. ‘생각’은 염원이 되었고 염원이 탑을 쌓았다. 씨앗이 날려 숲이 불어나는 것처럼 사바(娑婆)엔 탑이 늘어갔다. 아득한 세월로부터 건너온 탑들은 세월이 사라지면서 남긴 꿈이었다. 탑을 쌓은 염원들이 꾸던 영원한 꿈이다. 도량에 들어 아득한 시절을 품은 석탑 앞에 서면 그 영원한 꿈들을 만나게 된다. 그 중엔 기억할 수 없는 나의 꿈도 있을지 모를 일이다. 그 아득한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석탑은 절이 들어서기 전부터 서있었다고 생각하고 싶어진다. 저 멀리 절을 잃고 외로이 선 석탑 앞에 다시 절이 서고 누군가 석탑 앞에 서서 아득한 이야기를 들을 것이다. 석탑은 절이 서기 전부터 그 곳에 있었고, ‘생각’이 시작되던 날부터 석탑은 거기 있었다. 내가 있기 전부터
발끝에 산길이 익숙해질 때 쯤 산길은 끝이 나고, 눈앞에 나타난 돌계단 위엔 사천왕문이 산문을 열고 있다. 꽃길이었을 길이 탑전까지 사뿐히 닿아있고, 석탑 너머엔 법당 그림자가 파란 잔디 위에 누어있다. 숲엔 오래 된 석탑이 하나 자라있고, 장맛비가 지나간 매화당 툇마루엔 스님 세 분 스님이 선명하게 도량을 채우고 있다. 신원사다. 절이 주는 매력 중의 하나는 정신적으로든 육체적으로든 속세에서 멀어지는 것일 것이다. 일주문이나 사천왕문에 들어서며 합장을 하는 순간 속세는 멀어지고, 연산의 개념을 벗어난 시간과 자리가 가슴으로 다가온다. 그 절이 세상에 덜 알려진 절일수록 그 매력은 더해진다. 신원사가 그렇다. 계룡산이 품은 명찰 중의 하나이면서도 신원사는 다른 절이 비해 세인의 발길이 적다. 공주 마곡사
조계사(주지 토진)는 7월 1일 초하루 신중기도에서 ‘반야용선 진수식’을 봉행했다. 이 날 반야용선은 묶여있던 오색실을 ‘관음도’와 ‘극락도’로 끊어냄으로써 진수됐다. 반야용선 이운 후, 조계사 사부대중은 홍성지역 불우이웃을 위해 백미 20kg들이 20포대를 김석한 홍성군수에게 전달했다. ?
하루가 저무는 시간. 산문에서 북소리가 들려온다. 저녁예불이다. 부처님 앞에 서는 시간. 우리 모두 부처라 했던가. 각자의 앞에 서는 시간이다. 오늘은 내 앞에 서있는 나를 볼 것인가. 잔잔한 호수 위에 바람이 물결을 그리듯 한 줄기 북소리가 가슴을 흔든다. 북소리가 시방(十方)으로 날아가고 부처들이 쏟아내는 뜨거운 목소리가 법당을 태운다. 부처를 만나지 못한 부처들이 두 무릎으로 다시 법당을 짓고, 흔들렸던 가슴은 내일의 북소리를 기다린다. 내일을 기다리는 일은 간절하고 간절해야 할 일인 것 같다. ‘오늘’이 이 세상에서 보내는 마지막 날이기 때문이다. 오늘 북소리가 이 세상에서 듣는 마지막 북소리가 될지도 모를 일이다. ‘내일’은 모두가 기다리는 ‘오늘’이고, 오늘은 간절히 기다렸던 ‘내일’이다. 내
늘 그렇듯 오늘도 기어이 도량 가까이까지 차를 끌고 올라갈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럴 수가 없다. 차가 올라갈 수 없는 길이다. 아스팔트길 옆으로 오솔길이 이어진다. 길은 잔잔한 호수 같다. 오솔길에 발을 들여놓자 길 위에 파문이 인다. 흙 위에 누웠던 바람이 일어나 풀잎을 흔들고, 풀잎 위에 앉았던 나비들이 일어난다. 일어난 나비들이 물결처럼 스쳐 지나가고, 오솔길의 적막이 깨진다. 산새는 자리를 옮기고, 거미는 거미줄을 다시 친다. 마치 맑은 물에 흙탕물을 일으킨 것 같아 자연 앞에 인간은 어쩔 수 없는 존재라는 생각이 든다. 길이 깊어지고, 하늘과의 거리가 좁혀질 때 쯤 오솔길과 하늘 사이로 빛바랜 추녀가 머리를 내민다. ‘꽃바위절’ 화암사다. 조계종 금산사의 말사인 화암사는 신라
바늘 끝도 들여놓지 못하는 마음속에서 생각은 폭포처럼 쏟아지고, 비질로 쓸리지 않던 아침 햇살은 한 점 구름이 쓸고 간다. 오늘 이 비 한 자루를 들기 전까지 무엇을 했던가. 겨울을 알았고 봄도 알아낸 나뭇가지 끝에는 푸른 잎들이 날아와 앉았는데, 쓸어도 쓸어도 비워지지 않는 마음속엔 폭포 끝에 이어지는 폭포뿐이다. 세존께서 이르고 가신 구절구절이 창 너머 어두운 서안(書案) 위를 맴돌고 있을 때, 겨우 저녁 종소리가 끊어낸 생각들은 다시 폭포를 이룬다. 오늘 이 저녁 종이 울리기 전까지 무엇을 했던가. 구름도 한 순간에 알았고, 햇살도 한 순간에 알아버렸는데, 두고 온 서안 위에는 주인 없는 글자들만 쌓여간다. 오늘이 있기까지 무엇을 했던가. 내일 또 다시 비를 들고, 저녁 종이 울 때까지 무엇을 할
소나무 숲을 지나 오르막길을 오르자 연못 속에서 목탁소리가 들려왔다. 바람에 이는 물결 속에 법당이 있고, 파란 하늘을 품은 연못 위에는 따뜻하고 오래된 눈동자의 달마 스님이 서 있다. 보화루를 바라보며 작은 돌계단을 오르면 운부암이다. 조계종 은해사의 산내 암자인 운부암은 711년(신라 성덕왕 10)에 의상대사가 창건했다고 전해진다. 절을 지을 때 상서러운 구름이 일어났다 하여 운부암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몇 차례의 화재로 인해 전소와 중건을 거듭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마당에 들어서자 이미 ‘문자’를 떠난 지 오래인 편액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운부난야(雲浮蘭若)’, 문자로는 읽어낼 수 없는 공간이다. 운부암 선방의 당호다. 난야는 아란야(阿蘭若)의 준말로 적정처(寂靜處), 무쟁처(無諍處)
그 동안 나를 용서해준 시간들이 있어 또 다시 부처님 앞에 앉는다. 두근거리는 고백이 경판 위에 누운 종이처럼 그 시간들을 찍어내면, 팔만대장경 한 장 또 쌓인다. 그 동안 나를 용서해준 이름이 있어 또 다시 부처님 앞에 앉는다. 두근거리는 고백이 종루에 걸린 범종처럼 그 이름을 불러내면, 나를 용서했던 그 시간이 또 다시 흘러간다. 어디선가 어제까지의 ‘나’를 묻는 목소리가 들려오고, 대중은 외줄을 타듯 그 뜨거운 목소리 위를 걸어간다. 한 걸음 한 걸음 고백을 옮기고, 한 걸음 한 걸음 부처님 곁으로 다가가는 시간. 벗어놓은 신발이 댓돌 위에서 기다리고, 또 한 번 용서받은 ‘나’는 나를 기다리고 있다. 댓돌 위의 신발을 찾아 신고 나서듯 나는 ‘나’를 찾아 신고 참회 없는 날을 걷고 싶다. ?
“저 많은 중생들을 모두 제도하시겠다고 하셨습니까? 그러면 이 소녀부터 제도해 주십시오. 대사님, 부탁이옵니다. 대사님…….” 공주의 마음을 받아줄 수 없었던 스님은 황룡사를 떠나 정처 없이 걷는다. 그러던 스님이 문득 걸음을 멈춰 선 것은 걸망 안에 들어있는 미완성의 이 생각나서였다. 스님은 발길을 돌려 분황사로 향한다. 분황사로 가는 내내 ‘원효’의 두 글자가 맴돌았다. 신라의 땅이다. 짙은 구름 아래 서 있는 고도(古都)는 사라진 기억들과 사라지고 남은 흔적들 속에서 비를 기다리고 있다. 이름만이 남아있는 황룡사는 안타까운 대지 위에 들꽃을 기르고, 안타까운 순간을 함께 했던 또 하나의 절 분황사는 그 아쉽고 허망했던 지난날을 바라보고 있다. 황룡사 바로 옆에 있는 분황사는 신라 선덕여
아누룻다가 게송을 읊었다. 무위(無爲)에 머무시는 부처님 / 나고 드는 숨결 멈추시도다 / 본래 적멸에서 오신 부처님 / 신비로운 광채 이곳에서 거두시도다 / 부처님께서 이 땅에 오신지 80년이 되던 해, 깨달음을 이루신 후 45년 되던 해, 기원전 544년 2월 15일. 그로부터 아득한 시간이 흘러 그 때의 이야기는 어두운 중생의 마음을 밝히는 데 제일인 이야기가 됐다. 며칠 전 부처님오신날이었다. 해마다 좋은날이다. 연등도 달고, 꽃비도 내리고 부처로 태어난 모두가 2500년 전으로 돌아가 부처가 되는 날이다. 우리 모두는 부처로 이 세상에 왔다. 그리고 오늘도 어두운 길에서 아득한 시절의 이야기를 떠올리고 있는 것이다. 그 어두운 길 끝에 분명 부처가 기다리고 있음 알기에 오늘도 그 어두운 길을
부처로 태어났으나 부처로 죽지 못하고, 이미 부처였으나 부처로 살지 못하니 그 이름 중생이라. 깨닫고 이뤄야만 끝이 나는 중생 짓이라 늘 지금 이 자리가 힘이 든다. 까마득히 먼 옛날에 꽃 한 송이로 주고받은 그 말 한 마디가 잊히지 않고 머리맡에 있으니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이다. 매화 숲에 날아든 박새 한 마리. 제가 날아든 숲이 어디쯤인지 아는 것일까. 선지식의 신발 한 켤레가 저 댓돌 위에 놓이기까지 매화 숲이 얼마나 피고 졌는지 알기나 하는 걸까. 무슨 인연이기에 저 작은 몸뚱이로도 염화실 마당을 드나드는 것일까. 한 치 앞의 인연을 알 수 없으니 매화 숲도 ‘숲’일 때 날아든 박새가 인연이요, 댓돌 위에 놓인 신발 한 켤레도 염화실 현판 걸렸을 때가 인연이다. 염화실 마당에 매화꽃 만발하고, 꽃잎에
? 부처님오신날의 하이라이트 행사인 연등축제가 5월 7일 서울 한복판에서 펼쳐졌다. 봉축위원회(위원장 자승)는 오후4시 동국대 대운동장에서 어울림마당을 시작으로 오후 7시~9시 30분 서울의
? ? ? ? 불기2555년 부처님오신날을 앞두고 서울 조계사(주지 토진)는 4월 25일 대웅전 마당에서 12명의 동자승 삭발 수계식 ‘Little Buddha Worl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