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납게 생긴 머리의 뿔로 방자하게 으르렁거리며/ 시내와 산골로 치닫고 달리니 길에서 점점 멀어만 가네/ 한 조각 검은 구름은 골짝 어귀에 비켜 떠있는데/ 치닫는 걸음마다 아름다운 싹을 침범할 줄 누군들 알리요.-‘미목(未牧)’ 〈목우십송〉‘무엇이 나를 존재하게 하는가?’라는 의문에 대해, 지난 연재 회차에서 붓다께서 통찰하신 ‘12연기’에서 그 답을 찾았다. 12연기가 일어나는 과정 중 ‘유형(有形)의 삶(生)’이 나타나기 직전, 그것의 유발 요인으로서의 ‘갈애’(또는 愛取)를 소개했다. 삶을 거머쥐려는 집착의 갈애. 그것은 막강하
나는 지금도 그때의 일이 후회스럽고 부끄럽다. 15년 전쯤 제주국제명상센터 건축의 일환으로 하수로 공사를 하면서 후원금을 받은 일이 결과적으로 더 많은 공사비를 지불한 셈이 되었기 때문이다. 내 나름으로는 후원금을 받았으니 후원금만큼 절약할 것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그러나 나중에야 안 사실이지만 공사한 분들은 후원금만큼 더 싼 자재를 사용함으로써 소위 부실공사를 초래하였음이 드러났다. 겉으로 보이는 이익이 보이지 않은 곳에서 손실을 가져왔으니 눈앞의 욕심으로 눈 밖의 피해를 가져온 것이다. 사실 후원금을 받을 그때는 공사를 한 그분
“부처님, 부처님, 부처님의 영원한 불제자가 되겠습니다.”오늘도 어김없이 기도로 하루를 연다. 대대로 불자였던 집안에서 스님을 꿈꾸셨던 아버지와 유독 자녀 사랑이 깊은 어머니 슬하에 태어나 불교는 모태신앙으로서 자연스레 삶의 일부이자 전부가 되었다. 한창 밖에서 뛰어놀기 좋아하는 어린 나이에도 저녁이면 가부좌를 틀고 앉아 관음정진을 하는 것이 더 자연스러웠던 초등학교 시절 장래희망은 스님과 음악가였다. 이후 학교에 진학하며 음악을 접할 수 있는 기회가 많아졌고 합창단, 중창단, 브라스밴드 등 교내에서 할 수 있는 거의 모든 음악 활
지난해 7월 22일 한·중 수교 30주년을 맞아 오영훈 제주도지사와 왕루신(王쨀新) 주제주중국총영사는 제주와 중국 간에 천년고찰의 불교문화를 바탕으로 1200여 년 전 ‘해상왕 장보고의 발자취를 다시 잇는다’라는 의향서를 체결했다. 해상무역을 통해 한중일과 동아시아를 연결했던 장보고처럼 한·중 관계 진전과 제주지역 경제 활성화 및 관광산업 발전을 위해 물적·인적·문화·역사 교류를 지속적으로 강화하기로 약속했다. 이 자리에 도지사를 비롯해 중국 법화원 스옌쉐 스님, 법화사 도성 스님, 관음사 정안 스님 등이 함께 참석했다.법화사는 제
무수한 생명의 어울림 한마당인 세계를 음악적으로 설명하면 하나의 화음이다. 이를 다시 부처님 우주관에서 볼 땐 일체 생명계 일체 현상의 움직임들은 곧 ‘화엄(華嚴)’이다. 이 세상이 하나의 거대한 책이라면 곧 일체 생명이 생멸하는 대자연은 그대로가 불멸의 경전이랄까.그야말로 불가사의한 생명체인 인간으로 살면서 도외시할 수 없는 우리가 희구하는 복(福)은 기본적으로 환경의 풍요로움 속에 있다. 그러나 대(代)를 이어 오래 누릴 환경의 풍요를 조성하는 바탕인 더 중요한 덕성은 의식의 풍요로움 속에 있다고 하겠다.우리가 성장하고 성숙해
뉴델리에서 며칠 ②1 갈림길-행여 딴생각하고 계신 것은 아니시지요. 모두가 출가한다고 해서 당신까지 출가하라는 법이 어디 있습니까? 제발 절 버리지 말아 주세요.-손타라, 걱정하지 마시오. 내가 어찌 그대를 버릴 수 있겠소.-전 당신 없이 못 살아요. 행여 출가를 결심하시기라도 하시면 전 목숨을 끊고 말 거예요.-걱정하지 말라니까 그러오. 우리는 죽을 때도 같이 죽자고 약속하지 않았소.-고마워요. 정말 고마워요.그들이 그러는 사이 붓다는 라후라의 귀의만 받아들이고 다른 이들에게는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라고 한 다음 니그로다 정사로
목각탱의 전형을 보여주는 기준작후불탱화 중엔 대단히 인상적인 형식이 있다. 나무로 조각한 목각탱이 그것이다. 목각탱은 나무로 조각한 후불탱화를 의미한다. 불화와 조각이 결합한 형식으로 ‘탱화의 조각화’라 하겠다. 두꺼운 나무 판재들에 밑그림을 그려서 투조나 고부조, 환조로 조각한 후 조형에 금박을 입혀 완성한다. ‘판탱’, ‘후불목탱’이라고도 부르는 목각탱은 흔치 않다. 문화유산의 가치와 의의를 가진 현존하는 목각탱은 10점 정도다. 그 중 국보, 보물로 지정된 것은 여섯 점으로서 다음 표와 같다.위 여섯 점의 목각탱은 동일한 장면
〈원문〉“아난아 네가 원래 알지 못하는구나. 여래장 가운데에 성(性)이 색(色)인 진공(眞空), 성이 공(空)인 진색(眞色)이 청정하고 본래 그러하여 법계에 두루 있으면서, 중생의 마음을 따르고 아는 바의 양(量)에 응하느니라. 업(業)을 따라 현발(現發)하는 것이거늘 세간은 무지하여 의혹 되어 인연이다, 자연이다, 하나니, 모두 식심(識心)으로 분별하고 계탁하는 것이라. 다만 언설만 있을 뿐 도무지 실다운 뜻이 없느니라.”〈강해〉부처님이 아난에게 여래장묘진여성(如來藏妙眞如性)을 다시 일깨워주기 위하여 거듭 말씀해 주는 대목이다.
손바닥 위에 공이 얹힌 듯한 기감이 생겨나면 이번에는 심장의 박동을 느껴본다. 그런 다음 손바닥의 진동과 심장의 진동을 함께 느껴본다. 손바닥이 둥둥하고 울릴 때, 짧은 호흡으로 숨을 들이쉬면서 낚아채듯이 노궁의 구멍 속으로 공을 빨아들인다. 이때 손목에 약간의 스냅을 가해 준다. 공이 구멍 속으로 빨려 들어가면 손목 쪽이 뻑뻑해진다. 그러면서 뻐근한 통증이 느껴지기도 한다. 이때의 통증은 머리나 흉부 쪽에서 빠져나오던 냉기로 인해 생기는 것이다. 그런 경우에는 ‘옴’자 발성법을 통해 장부 순화를 더 한 다음에 진동관을 해야 한다.
세상은 모양과 크기 또는 움직이는 것과 움직이지 않는 것,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등 짐작할 수 없을 만큼 다양한 생명체들의 집합이다. 그리고 모양과 크기에 상관없이 모든 생명체의 근원은 다르지 않겠지만, 우리는 그 근원을 알지 못해 보이는 힘에 따라 우월한 것과 우월하지 못한 것에 차이를 두는 것을 당연하게 여긴다. 이러한 잘못된 견해가 서로의 차이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험담하게 부추겨, 자신들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하게 하는 어리석은 마음을 일으키게 만든다. 생명체의 모양과 크기가 다른 것은, 어리석음이 얼마나 다양하게 나타나
명상이나 참선에 관심있는 사람들이 흔히 듣는 말이 ‘참선은 어렵고, 명상은 쉽다’는 말이다. 하지만, 이것은 큰 오해다. 흔히 선(禪)에서는 참선을 ‘세수하다 코만지는 것과 같다’고 한다. 이 말은 참선은 너무나 쉬워서 누구나 할 수 있다는 것이다.그런데 어째서 사람들은 참선을 알지 못하는 것일까? 그 이유는 사람들이 본래는 그대로 완전한데 스스로 중생이라는 착각에 빠져 어리석은 분별심을 내고 있거니와 눈 밝은 선지식에게 선을 제대로 배우지 못했기 때문이다.이번에는 현대인의 일상생활에서 가장 괴로움을 느끼는 화, 짜증, 분노에 대한
어떤 분들이 나한테 이런 말들을 한다. 어떤 글을 보고 참 멋있게 잘 썼다고 하고, 또 어떤 분들은 왜 글을 그렇게 썼냐고들 한다. 다들 각자의 보는 견해에 따라 이렇다 저렇다 말들을 할 수 있겠다. 각자의 생각과 보는 관점에 따라 그렇게들 평가하는 모양이다.이렇게 쓰든 저렇게 쓰든 그때 그 작가의 감정과 느낌 그리고 마음이 끌리는 대로의 예술 그 자체의 모습이 아닐까? 우리 세상일들도 그런 것 같다. 서로가 보는 관점에 따라 또 취미에 따라 취향에 따라 서로가 보는 모습들이 다름을 느낀다. 표현 역시 말이다.관해난수(觀海難水),
산문일적(山門一適)/ 박규리산어귀에 홀로 사는 할매가 한살배기 천복이를 양자 삼아 데려왔을 때, 산중턱 작은 절 스님이 하, 고놈 참 자알 생겼다 내 아들 하자 내 아들 하자며, 아침 저녁 산책길마다 쓰다듬어도 주고 안아도 준 지 엊그제 같은데매미도 삼복에 지쳐 목이 쉰 여름 한낮느닷없이 천복이가 전화를 걸어서 스님 큰일났응께 후딱 좀 와보소 하길래, 하릴없는 스님 한걸음에 산문 밖으로 달려가니 할매가 아니! 스님이 웬일이라우! 하는 게 아닌가 천복이가 큰일났다는디 무슨 일이오? 물으니, 할매는 그 큰 응덩이를 마구잡이로 흔들며 부
아디카야의 검을 찾아서1 갈림길그가 돌아온다는 소문이 성안에 퍼지기 시작하자 온통 나라는 축제 분위기였다. 그는 본시 이 나라의 왕자였고 왕자가 성인이 되어 돌아오고 있다고 했으니 그럴 만도 했다. 그는 전륜성왕이 될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출가하여 이제 세상을 구할 등불을 들고 돌아온다고 했으니 들뜨지 않는 이가 없었다.물론 그를 반기지 않는 사람들도 있었다. 왕위를 넘보며 언제나 그에게 적대감을 가지고 있었던 사촌 수라다나 그의 이복동생인 난타 등이 그들이었다. 그리고 그의 소문을 듣고 은근히 그를 시기하고 있던 학파들도 있었다
〈원문〉“또 아난아, 어찌하여 12처가 본래 여래장인 미묘한 진여의 성인가 하면 아난아, 네가 기타림에 있는 샘과 못을 보나니 어떻게 생각하느냐? 이것들이 색이 눈의 견을 내는가, 눈이 색상을 내는가? 아난아 만약 눈이 색상을 낸다면 허공을 볼 적에는 색상이 아니니, 색의 성이 소멸할 것이요, 소멸하였으면 아무것도 드러나는 게 없으리니, 색상이 없으면 어떻게 공(空)의 본질을 밝히겠느냐? 공도 또한 그러하니라. 만약 색진(色塵)이 눈의 보는 것(見)을 생기게 한다면 공(空)을 볼 적에는 색이 아니니 견은 곧 소멸해 없어질 것이요,
중심과 손가락 하나만으로도 언제든지 내 속으로 들어가서 제도해야 할 대상을 만날 수 있다.중심법과 뇌척수로운동법이 함께 쓰이면 훨씬 더 빨리 장부 순화가 이루어진다. 중심의 이면이 갖고 있는 두 가지 관점이 있다. 하나는 공간적 관점이다. 또 하나는 상태적 관점이다. 중심의 이면은 텅 비어있다. 이것이 이면이 가진 공간적 관점이다. 중심의 이면은 ‘아무렇지 않은 상태’이다. 이것이 이면이 가진 상태적 관점이다. ‘아무렇지 않다’는 것은 각성으로 주시되는 대상의 상태이다. 현상을 대하는 의식이 아무렇지 않을 때 그 상태를 각성이 주시
태어나서 성장할 때까지 많은 것을 접하고 살아가지만, ‘실재’를 접하면서 살아가는 것은 아니다. 물론 이런 인식조차 일어날 수 없지만 말이다. 그럼 ‘나’는 무엇을 접하고 살아가는지를 물을 수 있다. 여기서부터 관점의 차이가 나타난다. 대부분은 질문의 관점을 ‘나’에 두지 않고‘무엇’이라는 대상에 치우쳐 무게중심을 두고 있다. 그리고 ‘실재’를 접하지 않는다면 내가 접하는 것은 무엇인가? 라고 답을 요구하게 된다. 사실 이 질문에 대한 답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말할 수 없는 것이 그 해답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접한다는 것은
목련(木蓮)꽃은 나무 목(木)과 연밥 련(蓮)으로, 나무에 피는 연꽃이다. 꽃은 3~4월에 잎보다 먼저 피고, 꽃의 색은 흰색, 자주색이 있다. 꽃말은 ‘고귀함’·‘숭고한 사랑’이다.옥란(玉蘭)이란 이름으로 불리기도 하는데, 이는 백목련(白木蓮)의 색이 옥과 같이 맑고 아름답기 때문이다. 옥(玉)은 재물을 의미하기 때문에 집 안에 목련꽃을 그려놓기도 한다. 또 목련꽃봉우리가 붓을 닮아서 목필(木筆)로 부르기도 하고, 꽃이 피려고 할 때 끝이 북녘을 향한다고 해서 북향화(北向花)라고 한다. 생약명은 신이(辛夷)이고, 꽃은 신이화(辛夷
우리를 윤회하게 만드는 것은 무엇일까? 바꾸어 말하면 ‘우리는 왜 자꾸 다시 태어나는가’라는 질문이다. 윤회한다는 사실이 실감되지 않는다면, ‘우리는 어떻게 태어나게 되었는가’라는 의문으로 시작해도 되겠다. 나의 근원은 무엇이고, 나는 어떻게 태어나게 되었는가? 하나의 생명체로서의 존재의 비밀은 무엇일까?기독교·유교·도교 ‘존재’ 창조설‘나는 무엇인가’ 또는 ‘존재란 무엇인가’라는 근원적인 질문에 대한 답을 제시하는 것이 종교의 역할이다. 존재의 창조설 또는 근원설에 대해 대표적 종교별로 간략히 살펴보자.우선, 기독교의 경우, ‘나
‘돼지의 왕’ ‘더 글로리’ ‘모범택시’ ‘약한 영웅’ ‘인간 수업’ ‘구해줘’ ‘펜트하우스’ ‘학교 2015’ ‘경이로운 소문’ 등 최근 학교폭력을 제재로 다룬 드라마가 봇물 터지듯 방영되고 있다. 이는 여러 연예인이 가해자로 지목되고, ‘학폭투’(학교폭력 미투)라는 신조어까지 등장할 정도로 학교폭력이 사회문제로 대두됐다는 방증일 것이다.학교폭력을 제재로 다룬 드라마 중 완성도 면에서 ‘돼지의 왕’과 ‘더 글로리’가 가장 수작이라고 할 수 있다. 두 작품을 제외한 다른 작품들은 학교폭력을 진행되고 있는 현재 시점의 이야기를 다루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