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베드카르의 불교관 독특 업이론 부정…대립이 苦의 원인 붓다 출가 정치적 망명으로 해석 ?암베드카르는 불자가 된 불가촉천민들이 불교에 대해 알 수 있는 책을 저술하기로 결심하고 이후 〈붓다와 그의 가르침〉을 출판한다. 책에서 그는 자신의 불교관을 가감없이 드러내는데 다소 파격적이라고 할 수 있는 내용들도 담겨져 있다. 또한 그는 ‘불가촉천민의 구원’이라는 분명한 목표를 가지고 개종을 했기 때문에 책에서도 그 목표에 부합하지 않은 불교의 교리는 삭제하거나 부정하기도 했다. 놀랍게도 그는 불교의 근본교리인 사성제(四聖諦)를 부정했다. 그는 생과 사가 모두 고통이라면 모든 것이 끝나버리는 것이며 이 교리가 불교를 염세적인 종교로 보이게 한다고 비난했다. 사성제 때문에 인간은 희망을 가질 수 없다고
신불교도들, 종교적 정체성 확립 못해 억압하던 힌두 신분제 해방에만 관심 불교기념일·힌두기념일 함께 기려 암베르카르 불교교재에만 의존 문제 인도의 신불교는 불가촉천민들을 힌두교의 카스트 제도로 인한 차별에서 해방시키려는 의도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인도에서 신불교가 생겨난 이후 인도 사회, 특히 힌두들이 그들을 완전히 독립적인 종교 집단으로 생각하는가에 대해서는 아직 의문이 남아있다. 불가촉천민들의 개종을 반대해 온 극우힌두정당의 대표는 부처님은 새 종교를 제창하신 것이 아니라 인도의 고대 사상을 새삼 강조했을 뿐이라고 하며 부처님의 가르침은 모두 힌두성전인 바그바드 기타에서 나온 것이고 부처님은 힌두신인 비슈누의 화신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단지 그 사람만의 의견이 아니라 많은 힌두교
인도의 신불교는 여러 가지 측면에서 다른 불교와 다른 모습들을 보여준다. 한 개인이 주도한 대규모 개종식으로 의해 탄생했다는 점에서 그 시작부터가 독특한 일이며 그 세력을 구성하고 있는 인물들이 모두 한 특정한 신분의 사람들이었다는 점도 유례를 찾기 힘든 경우이다. 따라서 신불교는 그만의 독특한 특징들을 가지고 있다. 재가 리더십에 대한 강조는 신불교의 특징 중 하나이다. 이것은 암베드카르가 자신의 저서 〈붓다와 그 가르침〉에서 출가자와 재가자의 평등함을 강조한 결과이다. 그는 책에서 법은 출가자와 재가자에게 평등하게 설해졌으며 출가자와 재가자의 차이는 생활양식에서 나오는 것이지 법에 있어서는 동등하다고 주장한다. 집단개종식에서도 암베드카르는 미얀마 출신의 찬드라마니 스님께 수계를 받았지만 자
개종식 이후 불자 18만→325만 명↑ 현재 인도 불자수 795만 여 명 암베드카르 사후 불교 정체돼 양적 성장 했으나 질적 성장은 낮아 1956년 10월 13일에 있었던 개종식에서 암베드카르와 40만 명의 불가촉천민들은 힌두교를 떠나 불자가 됐음을 천명했다. 이렇게 암베드카르에 의한 집단 개종으로 시작된 불교세력은‘신불교’라고 불리게 됐고 이렇게 불자가 된 이들은 ‘신불교도’가 됐다. 그러나 이 신불교운동은 시작과 동시에 위기를 맞이하게 된다. 1956년 12월 6일, 암베드카르가 재판(再版)을 위해 손보고 있던 자신의 책 〈붓다와 그의 가르침〉 원고 위에 엎드린 채 세상을 떠난 것이다. 그가 공식적으로 개종을 한 후 채 두 달도 되지 않던 시점이었다. 불교에 대해 많은 탐색과 모색 끝에 개종
16세때 〈부처님의 일생〉 읽고 불교 만나 세계불교협회 참석해 불교의식 살펴 〈붓다와 그의 가르침〉 출판 1956년 10월 13일 개종식 암베드카르가 처음 불교를 접한 것은 그의 나이 16살 때의 일이었다. 그가 해외유학을 갈 수 있도록 장학금을 주선해주었던 그의 고교 교장선생님이 ‘부처님의 일생’이라는 책을 그에게 선물한 것이 그 계기였다. 혹자는 암베드카르가 이 책을 읽고 큰 감동을 받았고 이것이 불교로의 개종까지 이어지게 되었다고 말한다. 하지만 개종을 결심한 이후 암베드카르가 불교보다는 다른 종교를 먼저 탐색했고 또한 거의 시크교로 개종을 할 뻔 했던 것을 보면 그것은 사실이라고 하기 어렵다. 사실 암베드카르의 개종선언에 대한 당시 인도 불교계의 반응은 다른 종교와 비교했을 때 조금
? 힌두교를 버리고 새 종교로 개종을 하겠다는 암베드카르의 발언은 큰 파장을 불러왔다. 한 불가촉천민 단체는 암베드카르의 개종결심을 ‘위험한 움직임’이라고 비난하는 성명을 발표했고 암베드카르와 같은 카스트에 속하는 한 불가촉천민 운동가도 그의 의도가 수상쩍다는 반응을 보였다. 특히 마하트마 간디는 매우 격렬하게 개종에 반대했다. 암베드카르와 간디는 개종선언이 있기 전에 이미 만난 적이 있었다. 불가촉천민들을 위한 활동을 하면서 암베드카르는 불가촉천민들에게 필요한 것은 타당한 권리를 얻고 정치적인 힘을 얻는 것이라고 보았으나 간디는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사회적, 종교적 박해로부터의 보호라고 주장했다. 이런 간디의 온정주의적 태도에 실망한 암베드카르는 첫만남에서 “선생님, 저는 조국이
불가촉천민 위한 분리선거구 요구 신분차별 원인은 힌두교…개종선언 해외에서 최고의 교육을 받고 고국으로 돌아온 암베드카르는 1924년 변호사일을 시작한다. 당시 인도는 정치사회적으로 격동기를 맞고 있었다. 독립운동도 최고조에 달해 있었고 억압받는 계층을 위한 해방활동도 활발했다. 공부를 끝마치기 전에도 불가촉천민을 위한 잡지를 발간해왔던 암베드카르는 귀국한 후 본격적으로 불가촉천민 해방운동에 착수했다. 그 첫번째는 불가촉천민들이 마을의 공용 우물을 사용할 수 있도록 만드는 일이었다. 1923년에 불가촉천민들이 공용 우물을 사용해도 된다는 법안이 통과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상층계급 힌두들은 불가촉천민들이 마을의 공동 우물에서 물을 떠가는 것을 막고 있었다. 암베드카르는 이에 항의하기 위
? 신분때문에 박사학위 무용지물 되기도 美·英 유학, 변호사·인도 초대 법무장관 인도 내에서 불가촉천민에 대한 극단적 차별이 19세기 까지 성행하던 당시 암베드카르 역시 불가촉천민으로 1891년에 태어나 그런 고통을 겪어야 했다. 초등학교에 입학한 그는 교실에서 다른 학생들과 떨어진 구석자리에 앉아야 했으며 산스크리트를 배우는 것이 수드라계급과 불가촉천민에게는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가 원하던 산스크리트 대신 페르시아어를 배워야 했다. 또한 학교에서 목이 마를 때도 자유롭게 물을 마실 수 없었는데 그가 수도꼭지를 틀면 물이 오염된다는 이유에서였다. 때문에 그는 학교 급사가 와서 수돗물을 틀어줘야만 물을 마실 수 있었다. 이런 일들은 어린 암베드카르의 마음에 큰 상처를 남겼다.
인도의 불교라는 말은 과거를 떠올리게 만든다. 그 과거는 부처님 당시일수도 있고 화려했던 대승불교 시대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지금 인도에서는 불교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불교가 탄생하고 발전했던 그 땅에서 ‘신불교’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는 현대인도불교를 살펴본다. 인도는 부처님의 나라이자 불교의 발상지이다. 따라서 지금도 인도에서 불교가 부처님 당시처럼 상당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으리라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놀랍게도 현재 인도의 불교인구는 전체 인구의 1%에도 미치지 못한다. 자신이 태어나고 화려하게 성장했던 인도에서 불교는 12~3세기경에 거의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인도에서 불교가 사라진 이유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나 정체성을 잃어버린 불교가 서서히 힌두교로 흡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