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의선사를 연구하면서 초의와 관련된 추사의 자료를 하나 둘 찾을 때마다 전율을 느낀다. 이는 초의와 추사의 인연의 돈독함을 알기 때문일 것이다. 특히 추사의 친필 편지는 붓 끝에 서린 오묘한 기운 탓인지. 일필휘지로 써내려간 그의 글씨가 마침 흑용이 솟구쳐 하늘을 달리다가 문득 종이 위에 스며든 고요처럼 침묵의 잔잔함을 방점으로 찍은 듯한 묘미가 있다. 긴 여운 뒤에 남는 범접할 수 없는 비범함은 순간 빠져드는 마력을 지닌 것이 추사체의 힘이기도 하다. 이런 감동은 활자체의 자료에서는 느낄 수 없는 큰 울림이다. 추사의 문장은 간결하고 힘이 있다. 그래서 더욱 통쾌하고, 결연하며, 해학적이고, 맛깔이 지다. 호방함 속에 배어있는 문기(文氣), 선미를 담는 듯, 걸림 없는 포용력, 이런 안목은 이미 현대인의
추사가 원한 것 ‘도반과 차담’ 추사의 이 편지에는 ‘호의 초의 연조(縞師 草師 聯照)’라는 구절이 있다. 바로 호의와 초의 두 스님에게 보낸 편지인데, ‘연조(聯照)’란 나란히 살펴보라는 뜻이다. 실제 이 편지를 어느 해에 보냈는지는 알 길이 없다. 다만 편지의 내용 중에 ‘상원(上元)’이라는 말이 보인다. 상원은 바로 정월 대보름날을 의미한다. 이런 단서를 통해 이 편지는 정월 대보름날에 보낸 것임은 분명한데, 어느 해에 보낸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특히 추사는 새해를 맞아 이미 보름이 흘러갔지만 얼마동안 초의와 호의의 소식을 듣지 못했던 듯하다. 추사는 이들의 소식이 궁금해 ‘새해가 되었는데도 아직 스님들의 소식을 듣지 못한’ 자신의 마음이 ‘아프고, 허탈’하단다. 그러기에 이런 마음이 ‘어찌
유배지를 벗어나고 싶었던 추사의 열망은 1849년에야 이루어진다. 그러나 그가 제주로 유배될 초기까지만 해도 9년이나 제주도에 머물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은 듯하다. 이러한 그의 생각은 당대의 권세가였던 김조순의 아들 김유근(1785~1840)이 그와 뜻이 통했던 인물이었고, 그와 절친했던 권돈인의 정치적으로 역량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세월의 인연은 무심한 것인가. 그토록 기대했던 김유근이 1840년 12월에 세상을 떠나고 만다. 이로 인한 그의 상실감은 한동안 그의 마음을 괴롭혔으리라. 아! 세월의 인고를 견딘 추사의 힘은 어디에서 나온 것일까. 이는 바로 차와 불경이다. 더욱 그를 위로했던 것은 초의의 편지와 차였다. 아울러 간간이 찾아오는 그의 제자들과 승려들, 가족들의 소식도 더할 나위없는 청량
초의를 명찬 승려처럼 눈 밝은 수행자로 인식 추사가 편안할 수 있었던 것은 초의가 읽어주는 〈무량수경〉 덕분 어느 때일까. 초의에게 이 편지를 보낸 것이. 정확한 것은 아니지만 이 편지를 보낸 것이 어느 해인지를 짐작할 수 있는 실마리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가 ‘객지의 울적한 마음이 더욱 오래되어’라고 한 것이나 초의를 ‘일로암향사(一?香史)’라고 부른 것에서 그가 이 편지를 쓴 시점이 제주 유배시절임을 짐작케 한다. 제주 시절 어느 해 섣달 11일에 보낸 편지의 내용은 다음과 같이 시작된다. ?일로암향사(一?香史) 한 해는 저물어 가고 또 (날씨마저)추우니 화롯불에 토란을 굽는 풍미를 생각할 만합니다. 곧 (그대에)묻노니 이즈음에 계의 실행이 길하고 상서로운지요. (그대를 향한)그리움이 엷어지지
오월 단오절이 지난 후, 추사는 초의에게 부채를 보낸다. 이 부채엔 담담한 선미를 드러낸 추사의 시 한 수가 적혀 있었을 터이다. 귀향길에 오른 순 스님은 편지와 함께 단오 부채를 초의에게 전해 주었다. 단오절엔 임금이 신하에게, 스승이 제자에게, 친한 벗 사이에 부채를 선물하는 아름다운 풍속이 있었다. 이 단오 부채엔 무더운 여름, 더위를 식혀 주려는 속 깊은 사랑이 묻어있다. 지금이야 이런 풍속이 거의 사라졌지만 다시 회복해야할 아름다운 풍속이기도 하다. 한편 수일을 추사 댁에 머물다 돌아간 순 스님은 ‘가을 물을 계산하여 돌아갈 겁니다’라고 하였다. 그는 추사와는 오래 전부터 교유했던 인물인 듯하다. 특히 추사는 순 스님을 ‘사람 됨됨이와 기량은 빈틈이 없어서 도를 이루기에 족하니 칭찬할 만하다고 극찬
초의, 추사의 건강 기원하며 차 보내 추사, 노쇠해 지지 않기를 소망 ? ?초의와 추사와 관련이 있었던 승려들은 상경하는 길에 초의의 편지와 차 꾸러미를 추사에게 전해 주었다.특히 운구는 추사의 과천시절, 일 년을 함께 지냈던 승려인데, 이러한 사실은 1853년 12월 16일에 쓴 추사의 편지에 ‘근일에 운구와 함께 지냈던 일 년은 흡족했습니다’라고 한 것에서 확인된다. 그는 아마 초의와 추사와 가까웠던 대흥사 승려일 것이다. 그의 이름은 한민(漢旻)이고, 금강경과 능엄경에 밝았다. 그를 추사에게 소개한 것은 권돈인이었다. 따라서 그는 추사와 학문적 담론이 통했던 학승으로, 추사의 불경 연구에 도움을 준 인물이었을 것이라 여겨진다. 추사는 그가 떠난 뒤, 몹시 쓸쓸해하던 중,
추사의 말년 편지는 담담한 소회로 가득하다. 자신의 나이가 이미 칠십이 되었다고 하니 이 편지는 1854년 12월 말경에 보낸 듯하다. 칠십이 된 자신의 삶을 회고한 편지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초의 노사방장에게 노완이 답합니다. 칠십 년을 사는 동안 산중(山中)과 대나무 사이, 차나무 숲 사이, 솔바람 산골 물 사이, 차를 끓이는 동안에, 범패 소리 사이, 수행 중에 성태(聖胎)를 잘 길러 늙었지만 그러나 무리 중에 눈썹이 땅에 끌리니 장로라 존중하는 것은 마땅합니다. 나는 이처럼 칠십이 되었는데도 과거의 묵은 빚으로, 현재 새로운 일에도 움직이면 문득 고해가 됩니다. 초목 같은 나머지 삶을 무엇으로 지탱하겠습니까. 나와 그대가 함께 해를 같이하고 명을 함께함에 이른다면 날로 참선에 기뻐하고 현묘한 묘
추사가 제주 적거에서 해배 소식을 들은 것은 1848년 12월19일 경이다. 하지만 그는 이듬해 2월 26일에야 배를 타고 제주를 떠난다. 이후 소완도를 거쳐 이진(梨津: 해남군 북평면)에 도착한 것은 2월 27일이다. 이런 사실은 그가 1849년 2월 28일, 이진에서 용산 본가로 보낸 편지에서 확인된다. 아울러 대흥사로 초의를 찾아간 사실도 드러난다. 해배 이후, 그는 삼호(三湖)에 살았다. 삼호는 지금의 마포이다. 이 편지는 추사가 유배지에서 돌아와 어느 정도 안정감을 찾았던 삼호시절에 보낸 것이라 짐작되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 초의 노스님의 편지를 받고, 승련노인(勝蓮老人)이 답장하다. 금년 들어 마침내 편지 한 통이 서로 오지 않았습니다. 비록 막혔다 하더라도 무슨 허물이겠습니까.
초의의 차포 선물에 한껏 들떠 “날마다 기다리던 것이라 흡족” 추사는 초의가 보낸 차포를 받고 한껏 들떠 있었다. 초파일이 가까워진다고 하였으니 초의가 보낸 차는 새로 만든 것인가 보다. 이 편지는 그가 병완(病阮)이란 호를 쓴 것으로 보아 과천 시절에 보낸 것이라 짐작된다. 날로 쇠잔해지지만 차는 그를 웃음 짓게 한 물품이었다. 이 편지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촌마을의 붉은 빛은 이미 시들해졌고, 들에는 푸름은 날로 성해갑니다. 초파일이 또 가까워지는데, 남녘의 풍물은 서로 더불어 특출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곧 강진의 아전 편에 그의 편지를 받으니 차와 편지는 날마다 기다리던 것이라서 기쁘고 흡족합니다. 또 살펴보니 봄 이후 수행하는 자리가 가볍고 편안하다니
추사가 섣달이 가까워지는 어느 날인가 초의에게 이 편지를 보낸다. 편지의 말미에 과도인(果道人)이란 호를 사용한 것으로 보아 과천 시절에 보낸 편지임이 분명하다. 섣달이 되면 늘 새로 나온 책력을 챙겨 초의에게 보냈던 추사였다. 한동안 이들의 편지를 내왕해 주는 인편이 없었던 지, 추사는 ‘아직 섣달이 된 것도 아닌데 일체 소식이 없다‘고 말했다. 이처럼 소식을 전하지 않는 초의의 변화된 마음은 ‘산으로 들어가 더욱 깊어져서 인간세상과는 함께하지 않고 자연과만 소통하려는 것인가‘라고 반문한다. 이는 추사의 심사를 반영한 말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론 대흥사의 깊숙한 암자에서 선삼매에 몰두하고 있는 벗, 초의를 이리 표현한 것이리라. 이 무렵 과천초당에서 어렵고 괴로운 시간을 보냈던 그는 실로 불경과 차를 통
초의의 차포 선물에 한껏 들떠 “날마다 기다리던 것이라 흡족” ? ? 추사는 초의가 보낸 차포를 받고 한껏 들떠 있었다. 초파일이 가까워진다고 하였으니 초의가 보낸 차는 새로 만든 것인가 보다. 이 편지는 그가 병완(病阮)이란 호를 쓴 것으로 보아 과천 시절에 보낸 것이라 짐작된다. 날로 쇠잔해지지만 차는 그를 웃음 짓게 한 물품이었다. 이 편지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 촌마을의 붉은 빛은 이미 시들해졌고, 들에는 푸름은 날로 성해갑니다. 초파일이 또 가까워지는데, 남녘의 풍물은 서로 더불어 특출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곧 강진의 아전 편에 그의 편지를 받으니 차와 편지는 날마다 기다리던 것이라서 기쁘고 흡족합니다. 또 살펴보니 봄 이후 수행하는 자리가 가볍고 편안하다니 뛸
추사의 이 편지는 1854년 4월에 보낸 것으로,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자료이다. 이 편지를 살펴보니 과천으로 찾아온 순 스님 편에 초의의 편지를 받은 추사는 뛰듯이 기뻤던지 ‘눈이 환하게 밝아지듯’ 마음이 상쾌해졌다고 하였다. 이는 초의의 편지를 받은 후, 막혔던 가슴이 탁 트인 듯, 경쾌해진 그의 감회를 이리 표현한 것이다. ‘金?(금비)’란 무엇일까. 이는 금으로 만든 젓가락이다. 고대 인도에서 맹인의 안막을 제거하는 도구로 사용했다고 전한다. 불가에서는 맹인의 가린 막을 금비로 제거하듯, 중생의 무지한 막을 말끔히 제거해 준다는 뜻으로 사용한다. 과천 시절 불교에 몰입했던 추사의 일상을 살펴 볼 수 있는 이 편지는 이렇게 시작된다. ? 초의노추의 선궤에게, 승연암에서 쓰다. 순 승려가 오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