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국가 고창국 있던 투르판 현재 이슬람 교도들이 머물러 이교도 훼불·서구 열강 도굴로 베제크릭 석굴 곳곳은 상처가 일제 도굴품 일부 國博에 소장 “탐욕과 무지의 훼불 반성하라” 중국 신강 위구르 자치구에 있는 투르판은 수많은 소국(小國)들이 나타났다 사라진 영욕의 역사 한복판에 있었다. 한나라는 현재 투르판에서 45km 떨어진 곳에 고창성을 세우고 둔전을 실시했고, 이후 한나라가 패망하고 전란이 끊이지 않자 이를 피해 본토의 사람들이 이주하기 시작했다. 세력이 늘어나자 북량의 왕족 저거 씨가 450년 고창국을 세웠으나 유연의 압력으로 멸망했다. 498년 유연과 고차, 돌궐 등 북방민족은 이 자리에 국가를 세우고 고창왕이 돼 640년 당나라에 멸망하기까지 번영을 누
?돈황, 동·중앙아시아 잇는 관문 동서 교류·구법의 중요한 루트 4세기 후반부터 석굴 개착해 490여 굴, 2000여 불상 존재 벽화 이으면 45km까지 펼쳐져 17굴 ‘왕오천축국전’ 발견 유명 주요 문화재 3D 극장서 ‘한눈에’ 중국 문화재 활용·보존정책 귀감 경이롭다. 수많은 석굴에 수천의 불보살이 상주하고 있는 돈황 막고굴을 보고 있자면 신앙의 열정에 대한 경외가 자연스럽게 느껴진다. 오직 ‘경이롭다’고 되풀이해 말할 수 밖에 없다. 돈황 막고굴(敦煌 莫高窟)은 천불동(千佛洞)이라고 불리며 감숙성 돈황현에서 동남쪽으로 25km 떨어진 곳에 위치한다. 서쪽에는 모래 언덕인 명사산을 끼고 있다. 돈황은 고대 실크로드의 중요한 관문이다. 당나라 시기에 서역
唐부터 淸까지 꾸준히 조성돼 曹氏 귀의군 시기에 집중 발전 동서 절벽에 40여 석굴 존재 조성 양식, 돈황 천불동과 유사 5000여㎡ 걸쳐 펼쳐진 불화들 조성 시기 정치·문화 사료로 중요 수월관음 등 미적 가치도 높아 허허벌판에 차를 세워 내렸다. 조금을 걸어가니 날카로운 협곡이 눈에 들어온다. 깊게 패어진 골짜기 사이로 기암괴석의 절벽이 펼쳐진다. 구석구석 조그마하게 석굴들의 존재가 보인다. 협곡의 이름은 ‘만불협(萬佛峽)’. 만불이 존재하는 골짜기라는 이름이 붙여진 이유는 이곳에 ‘유림굴(楡林屈)’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유림굴은 감숙성 안서현에서 서남쪽으로 75km 떨어진 지점에 위치하며 돈황의 막고굴, 서천불동과 함께 실크로드 불교예술의 진수를 보여주는 석굴로
실크로드 길목에 있던 난주5~11세기 불교 유적의 중심병령사 석굴이 가장 유명해서진부터 靑까지 불사 이뤄져183개 석굴에 776체 불상 모셔산 정상 있는 169굴에 오르니수많은 불보살이… 이곳이 불국토 중국 감숙성 난주는 기원전 1세기부터 천산북로를 잇는 고대 실크로드의 주요 통로였고, 이를 보호하기 위해 당시 지배층은 만리장성을 옥문관까지 확대시켰다. 이러한 지리적 특성으로 구법승과 상인들은 반드시 난주에 들려야 했다. 일종의 교통 요지였던 셈이다.하지만 한나라 멸망한 후 난주는 부족국가의 수도가 됐고, 다른 문화들이 복합적으로
천수는 구법 여정의 베이스캠프 구법승 모셔 법회와 역경하기도 짚단을 쌓아놓은 듯한 맥적산에 190여 석굴 조성해 부처님 예경 북위~당대 불상 변천사 ‘한눈에’ 깎아진 절벽에 조성된 대불·석굴 바라보면 선현들 佛心에 감탄이 중국 실크로드의 옛 루트는 두 가지가 있다. 실크로드의 시작인 서안(옛 장안)에서 위수-진주-농서-난주를 지나 병령사를 통과해 하서주랑(河西朱廊)에 이르는 것이 하나이고 다른 길은 서안을 출발해 빈현-경천-평량-정원-홍산협으로 가는 것이다. 위수에서 난주로 가는 길에서 가장 중요한 관문 중 하나가 바로 진주(秦州)다. 진주는 현재 천수(天水)의 옛 지명으로 한 무제(재위 BC 141~BC 87) 당시 장건에 의해서 서역과 교역할 수 있는 비단길이 개
부처님 지골사리 봉안처로 유명세 1987년 진신사리탑 보수공사하며 사리함 발굴… 2005년 한국서 전시 唐代 황실 주도로 사리공양 활발해 “의상 등 구법승 참여 있을 것” 추정 중국 서안(西安)의 옛 명칭은 장안(長安)이다. 일반적으로 실크로드의 시작점을 서안으로 잡는다. 중국의 특산품인 비단이 이곳을 기점으로 서양에 전해졌다. 실크로드는 불법 전파의 통로이기도 했다. 서안에서 시작된 실크로드를 수많은 동북아 구법승들은 인도로 가는 길로 활용했다. 지금은 키르기스스탄까지 5500km의 고속도로가 놓였지만 옛 구법의 길은 험난하기 그지 없었을 것이다. 문헌에 따르면 740명의 구법승들이 불법을 구하기 위해 인도로 떠났고, 생환해 돌아온 구법승은 63명, 전체의 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