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은 한국 근대민족운동사의 정점으로 근대민족운동의 상징이다. 이런 3.1운동에서 불교계는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불교계의 3.1운동은 그 이면에 역사적으로 흘러온 호국불교, 대승불교, 민족불교의 정신이 바탕이 됐다. 불교계의 3.1운동을 성찰, 그 의미를 재인식하여 오늘날 불교 정신의 재정립과 계승의 근간으로 삼는 것은 후학들의 과제다. 다양한 사료 등을 바탕으로 불교계의 당시 운동을 정리해보았다. 김룡사 4월 13일 독립만세 운동1919년 3월 25일 문경 김룡사 공비생(출가 교역자가 되기 위해 교단의 육영장
불교계의 항일운동에 대한 연구는 만해 한용운·백용성·백초월 등 명망있는 스님들을 중심으로 이뤄져 온 것이 그간의 상황이다. 당시 불교의 종합적 상황이나 운동 과정에 대한 연구는 전무하다시피 했다.그나마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조계종 불교사회연구소(소장 원철)가 지난 2017년부터 불교계의 항일운동을 총체적으로 연구해 신문·잡지·판결문을 망라한 자료집과 종합적 연구 성과를 담은 논문집들을 발간한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다.조계종 불교사회연구소관련 논문집·자료집 발간기독교 주도 철원애국단철원 도피안사서 결성돼신상완 등 승려들도 참여숨
1919년 3월 1일 오후 1시 태화관. 만해 한용운, 백용성 스님을 비롯한 33인의 종교인들이 모였다. 33인 민족 대표들은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서’의 인쇄를 담당한 이종일이 가지고 온 선언서를 돌려 읽고, 만해 스님의 식사(式辭)를 들었다. 식사는 최린이 만해 스님에게 부탁했다.“우리는 신명을 바쳐 자주 독립국이 될 것을 기약하고자 여기 모인 것이니 정정당당히 최후의 일인까지 독립 쟁취를 위해 싸웁시다.”독립선언 시각인 오후 2시에 맞춰 만해 스님의 선창으로 “대한독립 만세”가 제창됐다. 이내 첩보를 듣고 태화관으로 달려온 일본
신문과 잡지는 당시의 시대상과 사건을 읽을 수 있는 중요한 사료이다. 1919년부터 1945년까지 언론에 기록된 불교의 상황은 어떠했을까. 조계종 불교사회연구소(소장 원철)는 지난 2017년 1년간 불교 3.1운동 및 항일운동과 관련된 신문 등의 자료를 수집했고, 이를 자료집으로 발간했다. 또한 민족사가 발간한 의 사진 도판으로 실린 신문과 잡지 자료들도 당시 상황을 읽을 수 있게 한다. 이들 자료에 따르면 당대 불교계 독립운동 기사를 통해 우리는 ‘3.1운동 발발 직후’와 ‘통합 임정 출현’을 기점으로 다른 양
2019년은 3.1운동이 일어난 지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이를 맞이하여 정부, 시민단체, 학계, 종교계 등 다양한 차원에서 기념식과 행사, 학술회의가 곳곳에서 열리고 있다. 3.1운동은 천도교, 기독교, 불교계 등 종교계 인사들이 주도하여 일제의 식민통치에 맞서 대한의 독립을 외친 거국적 항일운동이다.당시의 기록과 통계에 의하면 전국에서 인구의 10%에 해당하는 20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거국적으로 참여하였고 7,500명이나 되는 많은 이들이 목숨을 잃었다고 한다. 3.1운동 하면 흔히 유관순 열사가 먼저 떠오르지만 민족대표
3.1운동 100주년을 맞은 올해 이를 기념하는 각종 전시가 전국적으로 열린다. 로 알려진 만해 한용운 스님의 육필원고를 비롯해 대형사찰 스님들의 대대적인 만세운동 근거자료, 독립운동가들이 후손에게 남긴 각종 유물까지 일제강점기 항일운동을 펼친 선조들의 기개를 한눈에 느낄 수 있는 기념전시가 다채롭게 마련됐다. 수많은 행사 중 불자들이 가볼만한 전시를 추려봤다. 정리=윤호섭 기자예술의전당(서울)예술의전당은 4월 21일까지 서울서예박물관에서 3.1독립운동·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