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면적 멋이란 환희심에서 생겨난다. 스스로 기쁨을 느낄 때 나와 남과의 분별 사라지고 천지자연과 혼연일체가 되며 영원한 참삶의 환희에 젖게 된다. 여기에 무한성과 영원성이 있다.?? 일전에 내가 이걸 얘기했습니다. 언젠가 내가 이런 얘길 해 드려야 되겠다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데 오늘 말씀드릴 것은 연속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이론적으로는 여러분들이 다 아세요. 다 아는 겁니다. 아는 건데 문제는 어디다 두는 거냐 하는 건데, 이 불법은 생사문제 해결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생사문제를 해결해. 누리의 지도리를 우리가 걷어잡아. 이것인데 그리 하는데는 공부하는 내 입장으로 봐서 어떠한 경계에 닥치는 것이 이 공부가 되느냐 안 되느냐 이걸 내가 말씀을 오늘 드리기로 하겠습니다. 그런데
부처님 지혜 알려줄 뿐 지옥행 막지는 못해 절대 누리의 주인공인 자신이 지옥도 천당도 만들어 낸다. 내 마음이 하는 일이니 누구한테 의논할 수 없다 ? 지금으로 봐서 이 방에 나올 때는 이거 전생입니다. 적혈구 백혈구 세포가 많이 달라졌어. 지금도 달라지고 있어, 말하는 중에도 달라지고 있어. 이 방에 있을 때는 전생, 지금은 당장, 조금 있으면 후생입니다. 또 크게 봐서 이 몸 죽어지면 죽으면 후생, 지금은 현재, 또 내가 나기 전에는 전생. 이거 사실로 전생 후생 미래 해 봤든. 삼세 삼세 삼세.. 지금 내가 말하는 중에도 과거 현재 미래 계속입니다. 우리가 우리 몸뚱이를 못 봐서 그렇지 만약 이것이 현미경쯤 되는 안력을 가지고 있다면 내가 변하는 걸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
삼계를 벗어나는 단계는 말로 설명할 수 없다. 법의 도리는 당장 이해 안 가도 몇 십년 후에 깨닫는 씨앗이 되니 들어두는 것만으로도 공덕이 된다. ? 그러하기 때문에 이런 얘기를 소화를 하려면은 있다 없다 둘을 다 버려야 해. 있다 없다 살았다 죽었다 몽땅 버려 버리고 나중에 산 거를 굴리고 죽는 거를 굴리고 있는 거를 굴리고 없는 거를 굴리고 이런 식으로 나가면 나중에 차차차차 이것이 납득이 갑니다. 이것이 납득이 가면은 그때는 삼계를 뛰쳐납니다. 이 지구뿐 아니라 욕계 색계 무색계를 그 자리에 가만히 앉아서 탁 벗어나 버려요. 이런 사람이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아마 이렇게 얘기하면 대강 여러분도 아, 그러리라 아실 건데, 실로 이런 얘기는 말로서 이래 저래 안 됩니다. 죽도록
동이 있기 때문에 정이 성립 생 역시 사가 있기에 존재 사는 듯, 있는 듯, 없는 듯. 모든 것이 이러하니 좋지 않아요? ? 이 자리 주인공인데 주인공이 결정한 대로 그대로 되는 거예요.? ? 돌말이 뛰어가. 돌장승이 말을 해. 실로 우리가 이 자리, 가고 오는 것이 없어요. 가도 가는 것이 아니고 있어도 있는 것이 아니라. 이 도리를 알아야 이걸 압니다. 납득이 갑니다. 만약 가는 것을 가는 걸로 보고 오는 것을 오는 걸로만 봐. 가고 오는 데 치우쳐 버려. 그러하면 이것이 납득이 안 갑니다. 왜 그러냐면 가도 가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들 생각해 보세요. 우리가 죽는 걸 간다고 비유합시다. 내가 죽었어요. 이거는 없어졌어요. 없어졌다 합시다. 그러나 이 주인공은 없어지는 거 아
한결 같은 물은 어디에서도 변함없다. 이 자리는 불변심을 말한다. 악한 것도 착한 것도 아닌 ‘열반묘심’이라고도 하는 이 자리가 바로 성품자리 ? 여러분들, 낙동강도 보고 한강도 보고 천리강산의 물을 보겠지만 이 물이란 건 끊임이 없어. 언제라도 그대로 흘러가. 인위적으로 강을 이렇게 돌리고 저렇게 돌릴 수도 있겠죠. 그건 유위법이고 그럴 수도 있겠죠. 그래 해놔도 물 흐르는 것은 매 한가지야. 이래 돌려놔도 결국 물은 흘러. 저리 돌려 놔도 결국 물은 흘러. 한결같아. 그러니 결국 마조대사도 역시 급하다 이 생각 다시 물을 줄 알았겠죠. 또 그 자리에서 알았으면 아 그렇구나 한결 같은 마음을 가지라는 마음자리가 바로 열반이로구나 바로 이렇게 아는 수도 있겠지만 다시 한 번 물을 줄도 알
우리는 진리 속에 살면서도 진리의 고마움을 몰라 진리의 나툼은 ‘열반묘심’ ‘보리’ 모습은 자리에 얽매지 않아 화두참선 이치와 바로 똑같아 ? 이 말마디에 있어서 나는 이렇게 본다 내가 쓰는 건 그겁니다. 마조대사가 이렇다 이 말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 강론을 다는데 있어서는 마조대사가 와도 어쩔 도리가 없습니다. 부처님이 와도 어쩔 도리가 없습니다. 나는 그런 자신 밑에서 글을 쓰고 있습니다. 그런데 급하니라. 아 어찌 열반이 급함입니까? 열반이라는 것은 편안하다든지 가는 것도 아니고 오는 것도 아니라고 해야 아, 그렇구나 할 건데 급함이니라 했거든요. 이거하고 연결 시켜서 가만히 생각해 보면 됩니다. 우리가 급할 때에, 좋은 일로 급할 때도 있겠고 나쁜 일로 급할 때도 있겠어요. 급하다는
깨달음을 ‘쇠꽃’에 비유 해볼까요? 쇠 철자는 변하지 않으니 말이죠 여러분 마음마다 이름을 지어보세요 없어질 것도 없고 속한 것도 아니고 산하대지 나투고 명암 나투지만 그 자리 공한 자리임을 아세요. ? 경우에 따라서 이 글자 쓸 때가 있고 이 글자 쓸 때가 있고 이 글자를 쓸 때가 있겠지만은, 경우에 따라서 우리 성품을 알면은 법을 알아 버려. 마음을 알면은 성품을 알아버려. 법도 알아 버려. 부처를 알면은 마음도 알아버려. 성품도 알아버려, 한문으론 글자 네 개지만 실에 있어서는 한가집니다. 그러하니 문제가 되는 것이 어즈버야 온 누리는 불가사의라. 사실로 뻔히 육안, 살눈으로 봐서 한계가 많습니다만, 참말로 불가사의 아닌 것이 없습니다. 제일 첫째 우리 몸뚱이부터 불가사의입니다. 오늘
과거·현재·미래의 마음 얻지 못할 때 허공 생각해야 바닷물에서 파도가 일지만 중생들은 파도에만 얽매인다 생사와 생사 없는 것 딱 하나 마음은 부처자리 곧 하나의 법 마음이 마음이 아니다. 다시 말해서 비심이다. 비심인데 이걸 이름하여서 마음이라 한다. 이러하니 실로 이것이 마음은 마음인데 마음이라 해 봤든 무엇을 걷어잡고 우리가 마음이라 하겠어요? 그래서 이렇게 말씀한 것인데 그러나 사실 이 말씀은 또 마음이 없단 말이 절대로 아니거든요. 이 자리가 아주 불가사의한 자리다. 여러분들이 가지고 있으면서 매일 써. 쓰는 이 마음씨가 지극히 불가사의한 자리다. 그러하기 때문에 과거심도 얻지 못하고 지나간 마음도 얻지 못하고 현재의 마음도 얻지 못하고 미래의 마음도 얻지 못한다. 이 말씀이거든요.
몸뚱이를 가지고 있으면 시공간 개념 남아 있어요 생사는 내 권리의 행사 찾는 것도 버리려는 것도 다 허공임을 알아야 해요 ? 솔직한 말로 태양이 환하지 않아요? 여러분의 마음이 그렇게 환하기 때문에 태양이 환하게 뵈는 겁니다. 지금 캄캄하지 않아요? 여러분의 마음이 어쨌든지 말이지 지금 캄캄해. 캄캄하기 때문에 그래 뵈는 건데, 그러나 캄캄하다느니 환하다느니 이거 전부 경계놀음입니다. 경계. 그러나 캄캄한 걸 받아들일 수 있고 환한 걸 받아들일 수 있는 이 자리가 여러분에게 있어. 캄캄할 수도 있어. 환할 수도 있어. 이 도리를 여러분들이 알면은 그만 그대롭니다. 그대롭니다. 우리가 더 그거 할 것이 없습니다. 솔직한 말로 공부가 다 됐다 해도 되는 거예요. 앞으로 보림을 하는 것은 별 문제
경계에 닿질러 일어나는 망심 오만 생각 일으키는 그 자리는 빛깔도 냄새도 소리도 없어 의젓하게 그대로 있는 거에요. 그러하기 때문에 그러면 경계에 닿질려서 일어나는 그 마음을 써. 다시 말하면 반연(攀緣). 아, 여러 가지 인연해서 이렇고 저렇고 해서 그 반연 일으키는 그 진심 아니에요? 그렇다면은 반연이라는 거는 지가 올바로 생각했던지 그르게 생각했던지, 거기서 한 가닥 여김을 일으켜서 말이지 반연을 일으켜 놨는데 이것 헛것이거든요. 지가 일으켰으니 헛거 아니에요? 모래 위에 집짓는 거나 한가지란 말이죠. 아, 요거 헛거로구나 하고 딱 알아버리면은 말이죠 반연에서 일어나는 망심은 저절로 없어져 버리고 그 다음에 진심이 그대로 나타나. 그대로 나타났다고 해서 이거 어디서 딴 데서 숨어가 있다가 다
‘진심 구하기’는 허공 잡겠다고 말 타고 달리는 것과 같다 물거품처럼 일어났다 사라지는 삼독심은 그 자리에 없는 것이다 이 도리를 알면 법 굴리게 된다 ? 실에 있어서 우리가 본래의 내의 그 자체성, 다시 말하자면 눈이 있는 자리, 눈은 보는 걸 뜻하는 건데 나중에 가서는 소명하게 압니다. 듣는 그 자리를 소명하게 알면은 망상과 망념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걸 모르면, 이것이 어떤 반연에 의해서 일어나는데 진짜와 같이 생각합니다. 우리가 부회(화)를 내보세요. 부회 낼때는 부회나는 것이 진짜에요. 그것도 우연히 반연에 의지해서 경계에 닿질리는 그 마음이 자기 마음하고 잘 안 맞단 말이죠. 그래서 일어나는 것이지, 반연에 의지해서 이것이 일어나는 것이지, 본래 어디 망상이라는 것이 또렷하게
애욕의 당처 비어 있는데 생각 일으켜 탐진치 일으킨다 그 자리 비어 있는 줄 알면 애욕의 덩어리 눈녹듯 사라져 부처님의 그 모습은 참 좋다 이렇게 생각할 수가 있고, 그다음엔 중생들은 그렇게 안되는 게 전부 애욕의 덩어리라. 애욕도 천층만층이에요. 그 애욕이 있는데 탐진치까지 가해졌어. 그러니까 거기서 얼굴 빛깔이 자꾸 달라져요. 애욕만 있어도 거울에 모습이 나타나겠는데 탐이 가해진다든지 성내는 게 가해진다든지 어리석음이 가해지는 데 따라서, 미련하게도 뵈고 독하게도 뵈고 어떤 때 이쁘게도 뵈고 다 이래 되는 거 아니에요? 그러면은 내가 왜 이 말을 하느냐는 건 이유가 있어 하는 겁니다. 그렇다면 그러면 어찌해야 되겠느냐. 다만 한 가지 방법이 있어요. 애욕의 당처가, 우리는 모두 애욕의 덩어리라
들은 것 공부로 삼지 마세요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아야 ‘내다 하는’ 아만상 없어져요. 허공으로서의 나를 인정하고 늘 잊지 않고 생활하세요 ? 암만 들어도 이해가 안 돼. 이해가 안 돼. 그러나 모습놀이라 하면 뽀르르 해. 거 참 이상한 거예요. 그러나 우리가 말이죠. 이 상승설법을 듣다가도 말이죠, 설혹 이해가 안 간다 할지라도 윤곽만 잡을 수 있으면 이걸 다행으로 알아야 합니다. 윤곽만 잡아 놓으면 그때는 팔진미의 밥상을 받아놓은 거나 한가지에요. 언제 되도 되거든요. 언제 먹어도 밥은 내 다 먹게 마련이라. 그러하니 이거 인연관계도 있고 업연관계도 있고 여러 가지 문제가 어렵다 할지라도 우리는 하루속히 윤곽을 잡도록 이리 나갑시다. 윤곽을 잡는 것도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딱 깨놓고 말
몸뚱이에 탁 들어앉지 마세요. 늙고 변해가는 인간의 육신 불구덩이나 흙구덩이를 향해 가는 이 육신을 잡고 인생놀이를 할지언정 그런 줄 알아차려야 합니다. ? 그러하기 때문에 어떻게 공부를 하는 방향을 딱 정해 놓으면은 그때는 마 그 사람은 벌써 견성한 거나 한가집니다. 왜 그러느냐 하면은 시공간이 끊어졌기 때문에 언제 되도 되는 것이거든요. 이렇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삼마지 사마타 이걸 갖다가 가장 소중하게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이걸 말하자면은 벌써 범어인데 그러면 이 이름을 전부 외워야 되느냐. 그것도 아닙니다. 다시 말하자면 사실로 별거 아닙니다. 그러나 참 아닌 게 아니라 어렵기야 좀 어렵죠. 우리가 중생의 분으로만 봐서 어렵지 법신분으로 봐서는 하나도 어려운 것이 아닙
눈·귀·혓바닥하고 타협하지 않는 것이 ‘삼매’ 그 자리가 정정이고 도력 마음 쓰는 방법이 ‘중요’ ? 상대성을 우리가 쓰긴 써. 선이다 악이다 상대성이다. 밝다 어둡다 상대성이다. 남자다 여자다 상대성이거든. 그러기 때문에 제일 알아듣기 쉬운 것이 사람으로서의 남자고 사람으로서의 여자다 말이에요. 사람은 절대성 자리라면, 남자다 여자다 상대성이거든요. 선이다 악이다 그런 건데, 우리 보림선원에 오래 나오는 분들은 벌써 절대성 자리에 앉아가 있습니다. 어쩔 때는 잊어버릴 때도 있어요. 앉아가 있으니 그 절대성 자리는 밝은 것도 아니고 어두운 것도 아니다. 착한 것도 아니고 악한 것도 아니다. 아는 것도 아니고 모르는 것도 아니다. 긴 것도 아니고 짧은 것도 아니다. 그 자리에 앉아 있거든요. 절대
착한 성품 악한 성품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내 마음이 일으키는 문제 선과 악 상대성에서 발생 부처님은 그 위에 존재 ? 정정이 제일 첫째 소식이고. 내 마음이 가라앉아. 눈하고 타협을 안 해. 귀하고 타협을 안 해. 혓바닥하고 타협을 안 해. 그러면 내 마음이 그만 허공과 같이 환하단 말이죠. 그런데 한 생각을 일으켜서 한 여김을 턱 일으켜서 이런 일을 해 보겠다 저런 일을 해 보겠다. 또 색신은 내의 그림자거든요. 하기 때문에 색신 살려야 되거든요. 이래서 회사에 나가겠다 장사를 하러 나가겠다 이래서 한 생각을 턱 일으키면은 그만 그대로 아무 실수 없이 그대로 일이 되는 거예요. 그런데 여기 말하는 이 도력은 벌써 문제가 다르죠. 법을 굴릴 수 있어. 그러하기 때문에 여기엔 어떠한
우리는 숱한 번뇌 망상의 구름을 일으키고 있다. 분별심으로 허공 될 수 없어 ‘정정’, ‘바른 가라앉음’은 눈·귀·혀와 타협 하지 않고 상황을 있는 그대로 보게한다. ? 마음이 가라앉지 않으면 도력을 얻지 못합니다. 어제 얘기했죠. 어젯밤에 얘기한 것. 망심이 없어서 정도(正道)를 써야 된다. 망심이 있어서 정도를 쓰면 그 정도는 사도(邪道)가 돼 버려. 그와 마찬가지로 정정(正定), 바를 정자 정할 정자. 정(定)자를 우리말로 하기가 참 어렵습니다. 정자를 가라앉는다 이런 식으로 내가 말을 하고 있습니다. 가라앉은 자리다. 정할 정자거든요. 이건 바를 정자, 이거는 여러분들 다 아는 것이고. 그런데 이 정정, 바로 가라앉는 것, 정정을 얻지 못하면은 바로 삿된 마음이 아니고 바른 마음,
죽고 생기고 하는 몸뚱이는 단 일초를 가만히 있지 못한다 사람들은 상 속에 들어앉아 상을 여의고 있는 걸 모르고 뒤바뀐 생각을 한다. 가만히 생각을 해 보라 말이여. 어째 실감이 안 가겠느냐 말이여. 가만히 생각을 해봐요. 그러니까 그럴 때는 이렇게 알아야 돼. 이거 적혈구 백혈구가 모아진 거라 말이여. 일초 동안에 약 삼십만 마리가 죽어 나가고 일초 동안에 약 삼십만 마리가 살아 나온단 말이지. 이거 죽고 살고 죽고 살고 하는 게 가죽주머니다 이렇게 생각하란 말이여. 그래서 나중에 갈 때는 몽땅 갈 때는 흙구덩이나 불구덩이로 들어갈 거다. 이래 생각하면 이건 진짜가 아니다. 이걸 끌고 다니는 놈이 절대성자리다 이건 상대성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이것이 곧 납득이 가 버려. 그러니까 여러분들은 어
육신은 성품이 없는데 세상 사람들은 이를 자신의 몸이라 하고, 경계에서 일어나는 것을 자신의 마음이라 생각하니 근본문제 해결되지 않는다 ? 무유정법이라. 정해진 법이 아니여. 그러기 때문에 경계에 따라서 경우에 따라서 이때는 이렇게 말하고 저때는 저렇게 말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쇠소의 혓바닥이 설법을 하네. 이거 조금 더 여러분 아는 거 한 마디 하겠습니다. 설법 내가 하는 것 아니죠? 이건 알죠? 대혜승 보살, 말해 보세요. 내가 하는 것 아니죠? 여러분은 이걸(몸) 갖다 내라 할 거라 말이죠. 이걸 갖다 김백봉이라 할 거라. 내 혓바닥에 성품이 있나요? 설법하게 내 입에 성품이 있나요. 설법하게. 아니거든. 솔직한 말로 아니거든. 그럼 우리 이 색신 여기에 백혈구 적혈구, 색신 가죽주
견성 해놓으면 망념 없어지고 전부 공성이라는 걸 알게 돼 쇠소의 혓바닥 법신에 들어 앉아 설법 진리 내 몸 안에 있음을 알면 부처님의 은혜 갚는 길 나온다 ? 그러니까 우리가 인자 이만큼 됐으니 이젠 솔직한 말로 누리의 진리를 아는 거 아니라요? 누리의 진리 어찌 알았나. 그거 절대성이라 말이여. 절대성자리 아무 모습도 없더란 말이여. 냄새도 없더라. 그렇구나. 꼭 허공 한가지더라 말이여. 여기서 공기에서 비료가 나오고 태평양 바다에서, 여기 영도 앞바다에서 파도를 생기듯이 옳지 여기서 상대성 나투었구나. 상대성은 변하는 도리로구나. 절대성은 변치 않는 도리로구나. 생사 이것도 상대성이다. 선악도 상대성. 정도니 사도니 상대성. 성인이니 범부니 상대성. 부처니 중생이니 상대성이거든. 전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