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은 살림살이를 정리 하면서 벼르고 벼르던 일을 드디어 하게 됐다. 17년이나 된 부엌살림을 오래 전부터 바꾸고 싶었는데,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실천하지 못했었다. 일을 벌리고 보니 생각보다 일이 컸다. 구석구석 채워져 있던 물건들을 꺼내기 시작하니 끝도 없이 나왔다. 기억도 안 나는 물건들이 줄줄이 나왔다. 너무나 많이 가지고 살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버려야 할 물건들, 나누어 주어야 할 물건들, 그러나 쓰지도 않으면서 버릴 수 없는 물건들이었다. 옛날 큰스님들께 공양 올렸던 밥그릇이며 큰 밥솥과 냄비와 수저와 그릇들, 제사 용품 등등 댕그라니 남은 두 늙은이 살림살이로는 많은 물건들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야말로 ‘짐’일뿐이었다. 우리집엔 늘 손님이 많았다. 그때 손님을 치르기 위해 장만했던
독자 위해 쓴 일기 ‘나’ 바로보게 해 ‘나’를 드러내는 일 조심스럽고 어려워 추억이 ‘무상’을 증명 바라밀 일기 오늘은 부산불교방송 ‘무명을 밝히고’시간에 초대되어 방송을 하고 왔다. 현대불교신문에 ‘바라밀 일기’를 연재한 것이 인연이 되어 방송에 까지 나가게 됐다. 신문에 연재를 시작할 때만 해도 쑥스럽고 걱정스러워 엄두가 나지 않았는데, 벌써 시작한 지가 1년이 다 되어가고 그로 인해 방송에 초대까지 받게 되니 더욱 쑥스러웠다. 연재를 시작할 때처럼 떨리는 마음으로 방송국을 찾았다. 오래 전부터 알고 지내왔던 지은아 아나운서가 담당 진행자여서 반가웠다. 진행자는 나의 근황과 바라밀 일기를 통해 소개되었던 나의 이야기들에 대해 물었다. 사실 나는 좋은 시절과 인연을 만나 신문에 연재도 하고 방
초등학교 동창회 오늘은 초등학교 동창회 모임 날이었다. 부북국민학교 28회 동창들의 모임이다. 결성 된 지 얼마 안 된 동창회는 일 년에 두 번 모임을 갖고 있다. 오랜 만에 다시 동창들을 만나니 반가웠다. 우리가 학교에 다니던 그 시절에는 반이 한 반뿐이어서 한 교실에서 6년을 공부했다. 그렇게 어린 시절을 함께 보낸 동창생들은 각처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살고 있었다. 직전 회장은 운송업으로 성공했으며, 하우스 농사로 성공한 사람도 있고, 과수원을 하는 사람 등 다양한 분야에서 여러 분야에서 열심히 살아왔고 살고 있었다. 모두 큰 어려움 없이 노후를 맞고 있는 동창생들을 보니 다행스럽고 고마웠다. 그리고 동창생 중엔 운명을 달리한 동창들도 있었다. 전 회장은 선물로 준비해 온 책과 타올을 나눠주었다
지극히 마음 쓰면 예감하게 돼 ‘벌침과 벌들의 죽음’을 보고… 서울에서 부산도 한 걸음 사람의 마음이라는 것이 도대체 무엇일까. 마음과 마음에 길이라도 있는 것일까. 한 걸음에 다가가 만나기도 하고 또 한 걸음에 멀어지기도 한다. 지난 11월 15일은 우리 부부에게 특별한 날이었다. 결혼 45주년이 되는 날이었다. 아침공양을 하면서 약속을 했다. 기념일을 축하하기 위해 통도사에 다녀오고 외식도 하면서 저녁엔 영화도 보기로 했다. 그런데 아침 설거지를 마치고 평소에 전화도 잘 하지 않았던 현대불교신문 최정희 편집이사님이 생각이 났다. 늘 어머님이 편찮으셔서 걱정이라던 말이 생각이 났다. 나는 나도 모르게 전화기를 들었다. 왠지 무슨 일이 있을 것만 같아 본인에게 물어 볼 수가 없어 이사님과 함께
스마트폰 대신 손편지를… 스님의 원력과 불사에 고개 숙여져 스마트폰 세상 요즘은 전철을 타도 버스를 타도 기차를 타도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모두가 스마트폰만 들여다보고 있다. 곁에 앉은 친구도 보지 않고 마치 경쟁이라도 하듯이 혼자 스마트 폰으로 무언가를 열심히 하며 스마트폰에 열중한다. 사람은 사람과 놀며 대화해야 서로가 소통하며 또 이해하게 되고 함께 즐길 수가 있는데, 어쩌다 요즘은 아파트 내 어린이 놀이터에서도 아이들을 그 전 만큼 볼 수가 없다. 심지어 엄마가 우는 아이를 달랠 때도 아이의 손에 스마트 폰을 쥐어준다. 울던 아이는 울음을 그치고 게임에 몰두한다. 급한대로 아이를 달랠 수는 있지만 그것은 곧바로 중독이 되기 쉽다. 우리 아이들이 어떻게 살아가게 될지 엄마들은 생각하지 못하는
불상의 크기가 중요한 게 아니다 아들 군대보내는 부모마음 다 같아 부처님의 형상 우리는 불자로서 국내뿐만 아니라 세계 여러 나라를 순례하면서 많은 부처님(불상)을 친견하게 되고, 그 다양한 형상을 보면서 각 나라의 특징도 알게 되었다. 부처님의 모습이라면 누가 시키지 않아도 스스로 합장 예경하며 공양물도 올린다. 흙으로 만들어진 불상이거나 동으로 만든 불상, 돌로 만든 불상, 또는 목재로 만든 불상 등 여러 종류의 불상은 실상(實相)의 부처님이 아니지만 우리는 그 형상을 통해 살아계시는 부처님을 친견하는 마음으로 모신다. 하지만 그 부처님을 부처님이 아닌데 왜 절하느냐고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비록 그림일지라도 불상을 보면 부처님이란 생각으로 불상을 보게 되고 부처님이란 글자를 보아도 우리는
스스로 훌륭한 내생을 만들자 가진 것 없이도 가슴 깊이 감사함이 진정한 사랑이고 그 사랑이 묘법 일타 스님 법문 오늘 지인의 49제에 갔었다. 지극한 장엄염불로 고인의 극락왕생을 함께 축원했다. 공양을 마친 후 영가의 가족은 책과 타올을 봉투에 담아 손님들에게 선물했다. 책은 일타 스님이 지은 광명진언이었다. 스님은 생전에 우리 연꽃모임회원들의 지도 법사였다. 항상 웃는 얼굴과 인자하신 목소리로 법문해 주셨다. 그 은혜를 잊을 수 없다. 스님이 가신지도 어언 13년이란 많은 세월이 흘렀다. 하지만 생전의 법문만은 가슴에 남아있다. 오늘, 스님의 책을 보니 다시금 스님을 만나 뵙는 듯 반가웠다. 첫 페이지부터 스님의 음성을 듣는 듯했다. “살아있는 존재들이 가장 싫어하는 것은 죽음이다. 가
광목천 법복만 평생 입은 스님 자연의 고마움 늘 생각해야 스님의 광목 법복 부부동반 모임에서 가을 나들이로 경산 반룡사에 다녀오기로 했다. 반룡사에 도착 했을 때였다. 한 여인이 취재팀과 함께 원효대사에 관한 다큐를 촬영하고 있었다. 이 여인은 미국에 거주하는 교민으로 우리 한국의 불교와 문화를 알리는 일을 하고 있다고 했다. 불교를 홍포하거나 문화를 알리는 사람이 많지 않아 늘 아쉬워했는데, 이런 서원을 가진 사람이 있다니 놀랍기도 하고 고마움의 인사를 전하고 싶었다. 불교가 없었다면 우리가 무엇으로 역사를 말 할 수 있으며 문화라고 할 수 있을까. 아름다운 골짝마다 절이 있고 그곳엔 소중한 문화유산들이 있다. 좀 더 가까이 피부로 느끼며 아껴야 할 자랑스러운 유산임을 인식하고 알려야 할 것
“달은 달맛이지” 어린 손자에게 듣는 법문 손자도 스승 손자 원영이의 전화를 받았다. 어린 애기 때부터 무수한 법문을 토해내던 외손자 원영이를 나는 스승님이라 생각했다. 지금은 초등학교 4학년인 원영이는 말을 하기 시작하면서부터 법문을 했다. 세 살 무렵, 가족이 서울 선유도에 나들이를 갔을 때였다. 하늘을 바라보니 반달이 떠 있었다. 나는 그 달을 보고 오늘이 며칠이기에 반달일까? 하고 혼잣말을 했다. 그때 원영이가 말했다. “할머니 반달은 원영이가 달의 반을 먹어버려서 반달만 남은거야.” 나는 너무 놀랐다. “달을 먹었다고?”하며 되물었더니 그 세 살짜리 아기가 벌떡 일어서면서 말했다. “달을 먹었더니 이렇게 커졌지요.” 나는 이 놀라운 말에 또다시 물었다. “달이 무슨 맛이었
말 한마디가 큰 오해 불러 제삿날 하루만이라도 효도하고파 말 한마디 우리집 아래층에 살고 있는 애기 엄마가 아기를 업고 우리 집에 놀러왔다. 애기 엄마는 내가 현대불교에 연재하고 있는 ‘바라밀 일기’를 즐겨본다며 만날 때마다 과찬이다. 그리고 신문이 나올 때마다 이번엔 어떤 글이 실렸을까 궁금해 하며 연속극 기다리듯 다음 글을 기다린다고 했다. 나는 고맙기도 하고 과찬에 쑥쓰러웠다. 얘기엄마는 그동안 내 글을 모두 스크랩했다며 모아 두었던 스크랩북을 들고 왔다. 우린 평소에도 서로 잘 지내는 사이였지만 그날은 더욱 고맙고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나는 고마움에 대한 표시로 부처님께 절 할 때 방석위에 덮개로 쓰라며 내가 물감으로 그린 깔개 하나를 선물했다. 이웃에 좋은 인연이 있다는 것은 크나큰 복이
코스모스 사진을 선물로 보낸 사돈 세상에서 만나는 것들 모두 ‘공부’ 사돈의 선물 가을이다. 멀리서 날아온 편지 한 통에도 마음이 흔들린다. 영광에서 온 사돈의 편지였다. 정성어린 손편지와 가을을 알리는 코스모스 사진들이 들어 있었다. 가을을 담아 보낸 편지였다. 가을이라는 계절은 눈(眼)이나 몸으로 느끼는 계절이 아니라 마음으로 받아들여야 비로소 시작되는 계절이란 생각을 했다. 올 가을은 사돈의 편지 한통으로 시작됐다. 사돈으로 인연을 맺은 지 벌써 17년이다. 그 동안 한 번도 서로 얼굴 붉히는 일 없이 지내왔다. 내가 훌륭해서가 아니라 사돈이 워낙 경우가 밝은 분이다. 향을 담았던 종이에선 향냄새가 난다고 했던가. 밝고 곧은 사돈 덕에 덩달아 경우 밝게 산다. 그렇게 한쪽에서 좋은 말과
‘반야심경’ 듣고 떠난 병아리 부처님 법대로 사는 세상 오길… 병아리 구족(具足)이 2013년 9월 26일 오전 10시 15분, 집에서 기르던 병아리(구족)가 죽었다. 멀리 경기도 수원시에 사는 아들 가족이 보내준 병아리다. 병아리는 돈을 주고 사온 것이 아니라 아들 내외가 기르던 어미 닭이 낳은 알에서 나온 병아리였다. 온 가족들이 새 생명을 신기하게 여기며 축하했던 기억이 났다. 처음 세 개의 알에서 세 마리의 병아리가 성공적으로 태어났지만 날이 지나면서 두 마리의 병아리가 죽고 홀로 남은 한 마리는 지난 추석에 우리 집으로 오게 되었다. 이유는 우리 집에 마당이 있기 때문이었다. 며칠 전이었다. 찻상 아래 병아리 변이 있어 닦으려고 차상을 밀었는데 그 속에 병아리가 있었던 것을 몰랐다.
명절에 모인 식구 보며 ‘행복’ 생각 ‘나’보다 ‘너’를 생각하는 삶 살아야 명절의 행복 명절 때면 서울에 살고 있는 아들 딸 네 가족이 아이들을 데리고 이 곳 부산으로 온다. 차례를 장남인 우리 집에서 지내게 된지는 이미 오래 되었다. 명절 마다 지내는 차례와 웃어른들의 제사를 여러 해 모셔왔지만 나는 한 번도 그 일이 힘들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늘 마음을 내서 하는 일이기에 항상 즐겁다. 서울에서 내려온 식구들까지 모두 6남매의 식구들이 차례를 모실 때는 그 모습이 참으로 든든하고 자랑스럽기까지 하다. 그 여러 식구들 중에서 나와 마음이 제일 잘 맞는 사람이 있다. 넷 째 시동생이다. 그는 유난히 정이 많고 모든 생활이 모범적이며 정직하고 인내심과 배려심이 깊어서 평소 자랑스럽게 생각해
자식 키워본 엄마가 ‘엄마’마음 알아 나도 언젠가 ‘조상’ 된다…잘 살아야 아기의 울음소리 제주도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어린 아기의 울음소리가 들리더니 그치질 않았다. 계속되는 아기의 울음소리는 나를 포함한 승객들에게 불편을 주기 시작했다. 부산까지 길어야 한 시간이지만 아기의 울음소리를 듣고 있으려니 그 시간이 굉장히 길게 느껴졌다. 승객들이 불편할 것을 모를 리 없는 아기의 엄마도 당황스럽고 미안해 어쩔 줄 모르는 것 같았다. 그 모습을 모고 있으려니 불편하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했다. 나도 젊은 시절에 아이 넷을 데리고 다녔고, 버스나 기차에서 같은 경험을 했었다. 아이를 키우는 엄마라면 누구나 경험할 수밖에 없는 일이다. 문득 지난 13년 전 쯤의 일이 생각났다. 미국 뉴욕
문명과 제도만으로 자녀교육 안돼 대한민국이 따뜻하게 기억되길 청학동 아이들을 보고 70이 넘은 지금도 나는 가끔씩 돌아가신 아버지의 말씀이 생각난다. “남의 허물이 보일 때, 내 허물부터 살펴보라. 남의 약점 보다 그 사람의 장점을 보라.” 생전의 아버님은 평소 자식들의 인성에 마음을 많이 쓰셨다. 그래서 좋은 말이나 좋은 글, 또는 당신이 생각하는 소신들을 종종 일러주시곤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화분에 화초를 키우듯, 숲에 나무를 키우듯 아버지는 정성으로 자식들을 키우셨다. 그리고 그 자식들의 바른 인성은 어른들의 바른 언행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하시고 평소 당신의 몸가짐에도 마음을 많이 쓰시며 사셨다. 어느 시대나 자라나는 자녀들은 소중한 존재들이다. 작게는 한 가정의 문제이고, 크게는 한
지극한 신심…모든 장애 극복 뿌리깊은 나무는 흔들리지 않아 원력과 신심으로 내가 다니고 있는 절에서는 매년 백중 백일 전부터 백중까지 백일동안 조상님의 은덕을 기리는 기도를 올린다. 그리고 회향 후 영가들의 위폐를 모시고 방생을 떠난다. 올 해는 여수 향일암과 흥국사로 가기로 했다. 도중에 바닷가에서 용왕제를 올리고 위폐는 태우고 극락왕생을 축원했다. 무더위가 한풀 꺾일 만도 한데 여전히 폭염이 이어진다. 그래도 오늘은 비가 좀 올 기세다. 부산은 비 구경한지가 너무 오래여서 간절한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는데 가는 도중 비가 내렸다. 우린 박수로 비를 맞이했다. 기도 덕택 인 것 같았다. 버스 네 대로 나눠 탔다. 세 대는 우리 스님들이 각각 나누어 타고 나머지 한 대는 내가 맡아 가게 되었다. 우리
행복했던 지난 날 떠올리면 함께 사는 사람들 소중해져 큰 스님들 곁에서 행복했던 시절 어느날, 옛날 사진첩을 보게 되었다. 그 옛날 처녀시절 아니 부산 불교 청년회 시절부터, 아주 오래된 사진을 오랜만에 꺼내 보게 되었다. 해인사 수련회에 갔을 때 자비보살이라 불렀던 지월 스님께서 주지로 계실 때였다. 종정 고암스님과 퇴설당의 성철 스님 일타 스님 법정 스님 지관 스님 그리고 현재 송광사 방장이신 보성 스님 등 큰 스님들이 그곳에 다 모여 계셨다. 대각사에서 기도하던 나는 서면에서 우연히 일타 스님을 만나면서부터 감로사를 알게 되었고, 스님의 속가 외삼촌인 보경 스님(자운 스님의 맏 상좌)이 주지인 사실도 알게 되었다. 감로사는 아미타 부처님을 모신 절이어서 나는 백일기도를 하기로 마음먹었다.
만해 축전을 다녀오면서 만해마을에서 열린 2013년 제17회 만해축전에 다녀왔다. 그동안 신문이나 방송을 통해서 듣기만 했던 만해 축제에 꼭 한번 가보고 싶었었는데 이제야 가보게 되었다. 몇몇 도반들과 함께 가게 되었다. 애초의 계획은 안동 용수사를 들려 그곳에서 하룻밤 기도를 하고 묵기로 했었는데 가는 길에 청량사 계곡에서 조금 놀다가 지도를 잘못 보게되어 정암사를 먼저 가게 되었다. 너무 먼 길이어서 다시 용수사로 돌아 올 수는 없어 정암사로 갔는데 어둠이 짙어 절은 그야말로 고요했고, 산 위의 수마노탑에서만 목탁소리와 기도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우리는 너무 어두워 산을 오를 수 없어 수마노탑을 행해 합장하고, 내일 새벽에 다시 오기로 했다. 그리고 가까운 거리의 장작 찜질방에서 쉬기로 했다. 새벽
삶과 죽음 무더위가 한창이던 며칠 전, 지병으로 투병해오던 제부가 운명을 달리 했다. 10여 년 전부터 뇌경색으로 쓰러져 병원을 전전하며 일어나지 못하고 있어서 전화만 와도 늘 나쁜 소식일까 싶어 가슴을 쓸어내리곤 했는데, 기어이 부고를 접하고 말았다. 우리 내외는 함께 빈소가 마련된 서울로 갔다. 동생의 시댁은 시어른께서 교회에 다니게 되면서부터 가족 모두가 교회에 다니게 되었다. 같은 가정에서 자란 나와 동생이었지만 종교에 관해서만은 인연이 달랐다. 하지만 나는 동생에게 종교에 대해 이야기 하지 않았다. 내가 말하지 않아도 충분히 힘들 것임을 알기 때문이었다. 장례식은 생각대로 기독교식으로 치러졌다. 문상객 역시 교회 신자들로 보이는 사람들이 많았다. 불교식이든 기독교식이든 고인 앞에서 그런 것
하나의 존재가 전체의 시작 세상만물 모두 존재 이유 있어 ? 모래의 무정법문 외손녀, 규연이가 큰이모를 따라 부산에 왔다. 서울에 사는 초등학교 5학년 규연이는 오래 전부터 외할머니네 와보고 싶어 했는데, 이번에 연휴를 이용해 오게 됐다. 나도 그랬지만 어렸을 적에는 친척집에 놀러가는 것이 설레고 재미나는 일이다. 커서는 오라고 해도 잘 오지 않겠지만 어릴 적 마음은 충분히 이해가 된다. 처음 오는 길이고 나는 규연이를 빨리 보고 싶은 마음에 기차역으로 마중을 나갔다. 기차에서 내린 규연이가 달려와 와락 안겼다. 기차 타고 왔다고 자랑부터 했다. 첫 날은 송정 바다와 해운대 바다를 구경시키고 점심도 바닷가에서 하기로 했다. 주말이이서 해운대 가는 길이 유난히도 막혔다. 평소 30분이면 도착 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