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환 추기경이 선종에 드신지 올해로 10년을 맞았다. 아마도 김수환 추기경의 선종을 누구보다 애통해 하던 이들은 전국 교도소 사형수들일 것이다. 김 추기경이 그동안 사형 집행을 막아온 측면을 그들이 너무나 잘 알기 때문이다. 선종 당시 대다수 언론은 추모 행렬을 조명하며 ‘김수환 신드롬’ ‘명동의 기적’이라 표현하며 그의 숭고한 가르침과 못다 이룬 큰 뜻을 조명했다. 그러나 김 추기경이 생애 마지막까지 혼신을 다 쏟았던 한 가지 주제는 크게 조명하지 않았다. 그것은 바로 사형 집행 반대와 사형제 폐지다. 김 추기경이 평생 낮은 데
조계종서 종정 스님이란 승가의 정신적 지주이며 존경받는 가장 큰 어른이다. 이렇게 대단한 자리인 종정을 한번도 어려운데 무려 세 번씩이나 역임한 고암 스님(1899~1988)은 인욕과 자비를 최우선으로 실천하며 겸손과 하심행을 한평생 일관한 참 수행자였다. 흘륭한 수행자적 풍모로 고암 스님은 1967년 3대 종정에 오른 이후 흔들리던 조계종단서 중심적인 역할을 톡톡히 수행했다.흔히 불가에서는 자비보살이라는 말로 수행자를 높이지만, 고암 스님은 진정 무소유, 무집착, 무차별, 자비보살이라는 말에서 한치도 어긋남이 없는 분이셨다. 그것
서울올림픽이 끝난 지 얼마 안 된 1988년 10월 8일, 지금은 없어진 영등포교도소서 공주교도소로 이감되던 미결수들이 호송버스서 난동을 일으켜 교도관들로부터 실탄이 장전된 총기까지 탈취해 달아나는 역대급 탈주극이 벌어졌다.탈주범들 영등포 교도소 출신TV 인질극 중계 보다 현장으로“성직자 책임 크다”는 말 죄책감내 생명 던진 강렬한 짧은 만남2006년 사건 모티브로 영화화우리 사회 죄 앞에서 평등해야이들이 미리 호송 과정서 탈주 계획을 모의 하면서 수갑을 풀기 위해 준비 해둔 특수 도구는 호송차량 탑승전 소지품 검사 과정에서 전혀
1992년 2월 9일 부산시 동구 범2동 철도건널목에서는 술취한 두 행인을 구하고 달려드는 열차를 피하지 못해 건널목 철도원이 숨진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살신성인의 주인공은 故 손무생씨이다. 그는 살아 생전 25년을 한결같이 하루도 빠지지 않고 ‘행인의 안전을 자신의 생명보다 더 소중히 여긴다’는 신념으로 고달픈 근무 환경에도 묵묵히 책임을 다해온 이다. 손씨는 평소 어려움을 겪고 있는 이웃을 돕는 일이라면 팔을 걷어 부치고, 자다 말고도 쫓아갈 정도로 봉사 정신이 투철했다고 한다.1992년 건널목 철도원 남편 살신성인남편 죽게 한
일본 후쿠오카현 고야산 신곤슈에 위치한 남장원은 전장 40미터에 이르는 세계 최대 청동 열반상이 세워져 있는 사찰로 유명하다. 발바닥 높이만 약 4미터에 이르는 청동 열반상이 건립된 것은 지난 1995년 10월의 일이었다.이때 아시아 각국 승려 1300여명이 모여 독경 하면서 천승공양을 했다. 지난 752년 이후 1200년 만에 일본서 천승공양이 열반상 건립 기념으로 이뤄진 것이다.복권 당첨금 전액 봉사 단체 기부해모범 소년원생 20명 일본으로 초청헌창탑에 스님이 준 불보살 사리 봉헌더군다나 당시 일본서는 흔치 않게 미얀마로부터 받
남북관계가 진전되거나 안좋아질 때마다 생각나는 사람이 있다. 바로 강영훈 前 국무총리이다. 3년전 작고한 강 前 총리는 군과 외교·정치·행정을 두루 거쳤다. 고인은 1921년 평안북도 창성군에서 태어나 국회의원, 대한적십자사 총재 등을 역임했다. 노태우정권 시절인 1988년부터 1990년까지 제 21대 국무총리를 지냈다. 고인은 1990년 9월 최초로 남북 총리회담을 성사시켰고, 그 다음달 홍성철 통일원 장관과 함께 남한 총리로서는 처음으로 북한 평양을 방문, 김일성 주석을 만났다.적십자사서 박애장 훈장 수여로 인연퇴임 후 청백리
시한부 인생을 살고 있는 홀어머니를 위해 9년째 병수발 하던 소녀가장 최정은(당시 나이 15세)을 처음 만난 것은 1993년 경으로 기억된다.암투병 홀어머니 위해 9년간 병수발삼중 스님, 모금 및 제주 여행 주선자신 일기 묶어 눈물의 수기집 펴내정은이는 부산 금정산 자락에 허름하게 지어진 움막집에 병든 어머니 강순애씨와 단둘이 살고 있었다. 어머니는 자궁암, 직장암으로 시한부 삶을 선고받고 6년째 투병중이었다. 병원 갈 돈도 없고, 치료시기를 놓쳐 강씨의 병은 돈쓸 수 없을 정도로 악화됐다.그런 강씨에게는 하루 수 차례씩 끔찍한 진
1982년 나는 일본 형무소에서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강연을 했다. 함께 동행한 김도영 장군이 통역을 맡아 줘서 언어의 장벽 없이 성공적으로 강연을 마쳤다. 김 장군은 강연이 끝나자마자 내 손을 잡고 급히 소개할 사람이 있다고 동경으로 갈것을 재촉했다. 무슨 영문인지도 모른채 나는 김 장군의 안내로 동경 시내 외딴 골목에 있는 다락방 2층으로 안내되었다. 작고 허름한 방 작은 책상에 명패 하나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거기에는 ‘세계만국평화회 총재’라고 적혀 있었다. 그 너머에는 초라한 차림의 스님이 앉아 있었다. 얼핏보아 분위
1932년 12월 19일 일본 가나자와서 순국암장된 유해 발굴해 1946년 조국에 봉환1992년 12월 19일 ‘암장지적’ 비석 조성돼2001년 12월 19일 69주기 추모제 봉행해나는 효창공원을 자주 찾는다. 그곳에는 윤봉길, 이봉창, 백정기 의사가 모셔져 있어서다. 25살 꽃다운 나이에 역사속으로 장렬히 산화한 윤봉길 의사의 묘역을 찾을 때마다 나는 삶에 대한 희망과 용기를 얻는다. 내가 윤봉길 의사를 본격적으로 알게 된 것은 김구 선생의 속에서다. 윤 의사의 의거 장면은 말만 들어도 영화속 한 장면처럼 감동과 긴장
“우린 안중근 의사 너무 몰라”가장 뜻깊은 사형수의 이름 나는 오랜 세월 많은 재소자들을 만나왔다. 특히 사형수들을 교화하면서 살았다. 많은 수감시설을 찾았고 그곳에서 그들과 많은 시간을 보냈다.내게는 그런 수감시설 중에서 좀 더 특별한 곳이 있다. 중국 뤼순 감옥이다. 안중근 의사가 순국한 곳이다. 그곳이야말로 나에겐 ‘법당’이었다. ‘안중근’이라는 한 시대의 영웅이 마지막으로 살았던 곳. 그를 만날 수는 없었지만 나는 그곳에서 또 한 번 많은 것을 배웠다.나는 30년 넘게 안중근 의사에게 미쳐 살았다. 안중근 의사가 내 마음 속
교도소에 작품 기부로 함께 교화활동처지 비슷한 장애 재소자에 깊은 애정 한국을 대표하는 화가인 운보 김기창과의 만남은 필연이자 우연이었다. 7살의 어린 나이에 장티푸스의 심한 열로 청각을 잃은 운보는 이후 어머니의 도움으로 미술가의 길을 걷게 된다. 그리고 그림을 그리는 부인 우향을 만나 서로 격려하며 함께 예술을 해나가고 세계로 진출해 전시회도 하게 된다. 운보를 생각하면 악조건 속에도 성실히 공부하고 재주를 갈고 닦는 사람에게는 큰 성과와 결실이 주어진다는 교훈이 떠오른다.운보 화백은 내 절친인 구상 선생과 친했지만 나하고는 전
‘교화복지론’ 특별강사로 초빙돼배 교수 강의로 송 전 총장 인연 2007년, 특별한 인연이 있었다. 두 사람이다. ‘사형수의 대부’인 나와는 반대편에서 살았던 그는 수많은 범죄자를 감옥으로 보냈던, 송광수 前 검찰총장이다. 그리고 그 인연에 다리가 된 사람, 숭실대 배임호 교수다. 그날의 인연으로 많은 학생들과도 인연을 맺었다. 10여 년째 스승의 날이면 그들을 만난다.당시 배 교수는 기독교 대학인 숭실대 대학원에서 ‘교정복지론’ 강의를 하고 있었다. 배 교수는 매주 이색적인 강사들을 초빙했는데 나와 송 전 총장도 그 강의에 초빙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