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불교호스피스협회 ‘The 아름다운 사람’을 만나다 18이영실 한국불교호스피스협회 교육부장은 호스피스 봉사자와 활동가를 배출하는 최일선에서 일하고 있다.비상근인 봉사자이지만 이 교육부장이 가진 책임감은 대단했다. 이 교육부장은 “불교호스피스협회는 최초의 불교계 호스피스 교육기관이자 협회로 사명감을 갖고 있다”며 “불교가 대중에게 상구보리 하화중생할 수 있는 봉사활동이 바로 호스피스다. 스님이건 재가자건 자신의 죽음뿐만 아니라 타인의 죽음도 보살피는 것은 숭고한 일”이라고 강조했다.마하보디교육원서 활동 토대불교협회 교육업무 도맡아호
한국불교호스피스협회 ‘The 아름다운 사람’을 만나다 17김석종 불교호스피스협회 제주지부장은 제주도에서 ‘호스피스’하면 가장 대표적인 인물로 꼽히는 이다.그가 호스피스 분야에서 활동하기 시작한 것은 2005년부터다. 2001년 조계종 관음사 부설 불교문화대학을 2기로 졸업한 그는 ‘제주목탁소리’라는 신행단체를 결성해 매월 제주도 사찰순례를 진행했다.2005년 불교호스피스 시작제주관음호스피스회 창설"불교사회적 역할에 적합"그러던 중 그는 정토마을에서 불교호스피스 교육 19기를 졸업한 이에게 소개를 받아 2005년 21기로 호스피스 교
해방공간의 지식승이자 교육자로 잘 알려진 만허 원문상(滿虛 文常, 1908~1950) 스님은 교육계와 불교계 원로인 조명철(85) 前 혜향문학회 회장의 평생 불심의 뿌리가 돼준 큰 스승이다.스님은 1945년 12월 관음사 제주읍내 포교당인 대각사서 열린 ‘조선불교혁신 제주불교승려대회’의 부의장을 맡아 불교혁신을 주도했다. 1947년 고향인 하원으로 돌아온 스님은 중문중학원에서 역사와 한문, 동양사 등을 가르치며 교육자의 길을 걷다가, 1948년 당시 중문중학원 1학년으로 입학한 조명철 회장과 사제지간으로 인연을 맺게 된다.중문중 설
한국불교호스피스협회 ‘The 아름다운 사람’을 만나다 16통도사 봉사단으로 사찰에서 활동하던 장점숙 봉사자가 호스피스 공부를 시작한건 2002년도였다. 이해 8월 장점숙 봉사자는 환희불교복지대학 9기로 졸업 후에 부산 보훈병원에서 봉사를 시작했다.처음에는 목욕봉사부터였다. 사찰에서 봉사를 했지만 환자들을 목욕시키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마음 나눔, 생사 초월 보람죽음 두려움 없어져 행복가족이 함께 동참 눈길“경험이 없는데 환자를 보러 갔으니 어려웠어요. 보훈병원은 대부분 고엽제 환자분들이 많았거든요. 가족사도 안좋은 분들이 많아서
한국불교호스피스협회 ‘The 아름다운 사람’을 만나다 15불교호스피스 영적돌봄가 지몽 스님은 조계종 사회노동위원회 부위원장으로 활발한 사회활동을 펼치고 있다. 이런 스님이 사회운동보다 더욱 중요시하는 것이 바로 호스피스활동이다. 스님은 명상심리상담학 석사를 마치고 죽음과 유족의 심리에 관심이 있어 생사문화를 공부했다.이후 울산 마하보디교육원에서 호스피스교육을 받으며 본격적으로 호스피스 활동에 뛰어들었다.“저는 청소년시절 난치병으로 오랜 투병생활을 하였기에 환자가 겪는 죽음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ㆍ공포ㆍ불안을 조금은 경험했어요. 죽음은
한국불교호스피스협회 ‘The 아름다운 사람’을 만나다 ⑭“호스피스를 처음 접하게 된 것은 요양원에서였어요. 한참을 돌보던 어르신들이 병원에서 임종을 맞이하는 것을 보고 끝까지 지켜주고자 이 길에 나서게 됐습니다.”한국불교호스피스협회 울산지부 간사 최정순 씨(관음행, 61세)는 오랫동안 어르신들을 돌봐왔다. 2004년 요양원에서 자원봉사로 어르신들을 돌보던 그녀는 2013년 호스피스 활동에 나섰다.요양원서 임종봉사 발심환자 광명진언 외울때 보람그녀는 2013년 마하보디교육원에서 교육을 받고 자재병원 봉사활동을 하다 2014년부터 울산
이세진 스님은 1910년 8월 25일 제주도 한경면 저지리에서 출생했다. 스님은 18세에 내장사에서 한고벽을 스승으로 출가하고 백양사에서 유금해를 계사(戒師)로 비구계를 수지했다. 스님은 내장사 총무직을 역임했으며, 백양사에서 법계를 품수 받았다. 이후 내장선원에서 약 3년간 강사로 활동했고, 강원도 금강산 표훈사 중향강원 강사로 약 2년간 활동했다. 중향강원은 불교경전과 함께 근대 신학문을 교육하는 개혁적인 전통강원이었다.1930년대 제주불교는 불교활동을 위한 불교단체를 구성해내 관음사 창건 이후 가장 왕성한 사찰의 증가와 전통불
조천포구는 제주도의 대표적인 관문이었다. 육지와 소식을 주고받을 수 있는 관문이기에 조천은 과거 연육의 교통 요충지였다. 그만큼 항일운동에 앞장선 조천리, 불행한 과거의 역사를 지켜보며 속수무책으로 감내해야한 일제 하 참담한 과거 안겨준 아픈 상처들. 역사의 피해자이면서도 고통받는 주민들의 의지처로써 역할을 담당하며 수행해온 사찰이 바로 고관사다.옛 관음사라는 뜻의 사명이 보여주듯 고관사(故觀寺)는 고려 전기에 창건돼 19세기 중엽까지 존속한 옛 관음사의 명맥을 이은 사찰이다. 1927년 화주 고계부와 강정완 보살이 기와로 된 개인
한라산 650m 기슭에 자리한 조계종 제23교구본사 관음사는 제주불교의 중심이다.구전에 따르면 고려 문종 때 창건됐다는 설이 있고, 조선시대에도 존재한 사찰이라는 기록이 남아 있다. 그러다 조선 1702년 이형상 목사에 의해 제주지역 사찰 전부가 훼철되면서 관음사도 사라지게 된다.관음사 주석 이세진 스님 무장대 간부 활동하산 후 수감됐다가 사복경찰에 의해 수장돼폐허된 사찰에 군인 주둔… 총탄 흔적 ‘곳곳’ 200여 년의 명맥불교를 유지하다 지난 1908년 안봉려관 스님에 의해 중창됐다. 스님은 해월굴서 3년 동안 관음기도를 드리며
서귀포시 하원동 산 43번지에 자리한 원만사(주지 정법)는 법화사의 북쪽 2.5km 지점에 위치한 사찰이다.원만사 표지석에서 약 1km정도 들어가면 원만사로 가는 옛길을 만날 수 있는데 지금은 이 길 바로 옆으로 시멘트 길이 조성돼 있어 자동차를 타고 갈 수 있다. 하지만 원만사의 옛 모습을 보려면 옛 길을 타고 올라야 원만사가 왜 이곳에 창건됐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있다. 1932년 창건 원만사, 4.3 당시 전소돼21세 양홍기 스님, 토벌대에 의해 사살현 주지 정법 스님이 지속된 불사 추진 숲으로 들어서면 마애불을 연상시키는 거
암벽이 병풍처럼 둘러싸여 영험이 깃든 기도처로 유명한 제주시 도평동 용장사(현 흥룡사). 홍순여(복덕행, 1929~, 90세) 흥룡사 대화주의 증언에 따르면 제주 4·3 사건의 광기로 피비린내 진동하던 1949년 1월, 용장사 주지 백삼만(속명 백인수) 스님이 이른 아침 공양을 마치고 포행을 할 무렵 허름한 갈옷을 입은 무리가 도량 안으로 들어섰다. 이어 인근 외도지서에서 경찰들이 들이닥쳤는데 이는 토벌대가 주민들에게 함정을 판 것이었다.주민들이 모이자 군인들은 기관총을 설치하고 주민들을 향해 사격을 했는데 백삼만 스님도 그 자리에
제주올레 제18코스를 걷다보면 만나게 되는 도심 속 힐링 쉼터 원당봉. 그 안에는 고려시대 3대 비보사찰 가운데 하나였던 원당사지가 천년의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원당사지 터는 1914년 제주불교 중흥조 안봉려관 스님에 의해 ‘원당사지’가 ‘불탑사’로 개칭하면서 이 지역 불법의 뿌리를 내리게 된다.특히 제주 지역 불교 유물로 유일하게 지정된 ‘불탑사 5층 석탑(보물 제1187호)’에는 고려 기황후의 설화가 담겨있다. 원나라 황제 순제는 후손이 없어 고민하던 중 북두칠성의 명맥이 비친 삼첩칠봉의 터에 절과 탑을 세우고 기도하
서귀포시 호근동 봉림사(주지 일경)는 하논 분화구 내 중턱에 위치한 사찰이다. 하논은 ‘많다’의 제주어로 큰 논, 넓은 논을 의미한다. 밭농사가 주를 이뤘던 제주에서 사계절 마르지 않는 논에서 쌀농사를 짓던 곳이다.그 물줄기가 바로 봉림사 일대에서 흐르는 속칭 ‘원샘동네’라 불리는 물이다. 봉림사 대웅전과 감로당 사이에 맑은 용천수가 흐르는데 그 맛이 감로수나 진배없다. 주민들은 ‘무슨 일이든 정성을 다할 때만 물이 넘친다’고 얘기할 정도로 이 용천수는 신성시 되고 있다.1929년 혜봉 스님 창건… 4·3 당시 토벌대 의해 전소불상
한라산 기슭을 관통하는 제1산록도로 인근의 광령 소재 수덕암(修德庵)은 1948년 4·3이 발발하며 1949년 2월 관음사가 토벌대에 의해 전소되던 시기에 함께 불태워졌다고 한다.수덕암을 창건한 마용기 스님은 후손들 2대가 부처님의 법을 잇고 있지만 당을 연구하는 학자들에게 마용기 스님은 ‘법사’ 혹은 ‘산신령’ 등으로 불리는 등 제주도민들에게는 신화같은 존재다. 아마도 풍수에 능통했을 뿐 아니라 키가 육척이며, 기골이 장대하고 힘이 장사였다는 이미지가 크게 작용했던 것으로 보인다.마용기 스님 창건한 수덕암 4.3당시 법당 전소텃밭
청수리 가마봉은 남쪽의 큰 봉우리 등성이가 서북쪽으로 휘돌아 상봉, 중봉, 하봉이 ‘ㄷ’자 모양의 가마를 닮았다하여 가마오름이라 붙여졌다. 이 형세가 가마(釜)와 같다는 데서 가메 오름 또는 가마 오름이라 부른다. 그 가마봉 상봉 북녘 기슭에 자리했다하여 부악사(釜岳寺)라 불렸다.부악사는 지난 1933년 갑술년에 김경호 스님에 의해 창건됐다. 당시 한경면에는 지난 1932년 제주불교 중흥조 안봉려관 스님에 의해 고산 월성사가 창건됐고, 1934년 양경수 거사의 부지를 시주받아 김화표 스님이 1934년 판포 통천사를 창건하면서 이 지
1970년 말에서 1980년대 초 만하더라도 도내 사찰은 기와를 얹은 전통양식보다 슬레이트 지붕이 많았다. 그만큼 제주 지역 사찰 환경이 열악했다는 것을 방증한다.하지만 한국불교 태고종 제주 남원읍 선광사(주지 수열)는 이야기가 다르다. 1984년 당시만 하더라도 장엄한 대작불사를 이룩하게 된다. 대웅전과 사천왕문, 범종루, 전통한옥 양식인 요사와 정재소가 함께 신축되고 도내 사찰 최초로 사천왕상과 2.5m 크기의 동으로 조성된 석가모니불을 새롭게 봉안하는 등 제주지역에서 보기 드물 정도의 사찰 면모를 갖추면서 그 위상을 높여나간다
‘The 아름다운 사람’을 만나다 ⑬ 사람은 살다보면 언젠가 죽음을 맞이하게 되고 죽기 전 잠시나마 인생을 정리하는 시간을 갖기를 바란다. 하지만 대부분 인생의 정리작업이 쉽지가 않다.불교호스피스협회 진말숙 봉사자는 말기 암환자들의 마지막 인생을 정리하는 일을 도와주는 도우미다. 호스피스 활동을 통해 그녀는 또 다른 삶을 살고 있다.12년 전 울산 정토마을에서 불교호스피스 교육을 받은 이후로 그녀는 울산대 9병동 봉사팀에서 매일 봉사를 하고 있다.“항상 ‘봉사 해보고 싶다’는 문장이 마음 깊숙이 있었어요. 마침 정토마을 불교호스피스
‘The 아름다운 사람’을 만나다 ⑫ 장선정 씨의 하루는 고단하다. 오랜 암투병 끝에 치매까지 생긴 시아버지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호스피스 병동에서 봉사를 마치고 나오는 그녀의 얼굴에는 미소가 끊이지 않는다.2009년 서울대 병원에서 그녀는 시아버지가 전립선암이란 소식을 들었다. 1년이 지난 2010년 시아버지는 다시 대장으로 암이 전이됐고, 수술을 해야 했다.1998년부터 대구 영남대 병원에서 환자를 돌보는 보현회에서 활동해 온 그녀는 사경을 헤메는 시아버지의 모습을 보며 죽음 앞에서 존재의 가치를 다시 살피는 일에 뛰어 들고
제주 구좌읍 하도리 금붕사 창건주 이성봉 스님은 1948년 4·3이 발발한 후 고향인 하도리 창흥동으로 피신하게 된다. 낮에는 절에 가서 불공을 드리고, 저녁에는 속가인 창흥동으로 내려간 것이다.겨울로 접어들 무렵, 1948년 음력 10월 21일 스님은 법당에서 사시예불을 드리는데 밖에서 요란한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를 쫓아 뛰쳐나갔던 스님의 눈앞에 목동이 바람처럼 지나갔다. 그 뒤로 총을 든 군인들이 헐레벌떡 뒤쫓아 왔다. 숨을 들이킬 사이도 없이 군인들은 스님에게 “이 앞을 지나간 목동을 못 봤냐”고 다짜고짜 물었다.당시 주지
제주 4·3사건이 올해로 70주년을 맞았다. 1948년 4월 3일에 발생한 소요사태를 비롯해 1954년 9월 21일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력충돌과 진압 과정에서 적지 않은 주민들이 희생됐다. 약 7년여 기간동안 비공식적으로 3만여 제주 주민이 희생됐고, 강경진압에 의해 제주 중산간 마을의 가옥 95%가 전소됐다.이런 겁화를 불교도 피해가지 못했다. 스님 16명이 죽거나 도일(渡日)·행방불명됐고, 37곳의 사찰이 피해를 입었다. 완전 전소된 곳도 18곳에 달한다. 대부분의 피해 스님들은 사찰 경내에서 총살 당했고, 고문으로 인한 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