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건국 공헌하며 승승장구 반대파 참언에 말년 유배생활 평양·강원도 사찰 유람하며 신분 떠나 승려들과 정 나눠? 조선전기 관료 문인 이원(李原, 1368~1429)은 건국 초기 국가의 기틀을 다지고 제도를 정비하는 데 공헌한 인물이다. 그는 다수의 승려들과 교유하였으며 수행승의 시축에 화답시를 남겼으니 이는 척불(斥佛)이 소명처럼 인식된 시기에 유불교유가 이어진 정황을 드러낸 것이라 하겠다. 그의 자(字)는 차산(次山)이며, 호(號)는 용헌(容軒)이다. 저서로는 〈용헌집〉과 〈철성연방집(鐵城聯芳集)〉을 남겼다. 이원의 집안은 3대에 걸쳐 번영을 누린 가문이다. 특히 조부 이암(李?, 1297~1364)은 재상을 역임한 인물로 동국의 조자앙(趙子昻)이라 칭송될 만큼 예서와 초서에 능했으며 묵죽을 잘
정몽주 문하서 성리학 공부 조선 전기 나라 기반 다져 〈척불소〉 상소 올렸지만 불교 교유는 계속 이어가? 조선 전기의 문인 하연(河演, 1376~ 1453)은 조선이 건국된 후 성리학을 토대로 나라의 기반을 다지는 데 공헌했다. 그의 자는 연량(淵亮), 호는 경재(敬齋) 또는 신희옹(新稀翁)이다. 어린 시절부터 목은 이색(牧隱 李穡, 1328~1396)과 야은 길재(冶隱 吉再, 1353~1419)에게 뛰어난 필법과 재주를 인정받았으며 대학자 정몽주의 문하에서 성리학을 공부했다. 그의 집안은 대대로 고려의 은택을 입었는데 조선이 건국되자 부친 하자종(河自宗, ?~1433)은 두문동에 들어가 절의를 지키고자 하였다. 그러나 아들 하연이 식년문과에 급제, 봉상시 녹사에 중용되자 마음을 바꾸어 조정에 나아
송설체(松雪體) 능한 문재 日·中 사신도 문장력 감탄 세간 ‘변절자’ 폄하 받지만 허망한 功名의 이치 깨달아 신숙주(申叔舟, 1417~1488)는 안견의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에 찬문(贊文)을 올릴 만큼 시서(詩書)에 능했던 인물이다. 특히 송설체(松雪體)를 잘 썼다고 전해지는데 이는 원대 조맹부(趙孟?, 1254~1322)가 완성한 서체이다. 왕희지의 서체를 법 삼아 유려하고 굳센 서체를 만들었던 조맹부는 고려 후기 이제현(李齊賢, 1287~1367)과 깊이 교유했다. 그러기에 조맹부의 아내 관도승이 죽었을 때에 이제현이 멀리 호주까지 문상을 갔던 것이니 그들의 사귐은 신분과 나이, 학식과 국경을 초월했던 셈이다. 따라서 고려에서 송설체가 유행한 것은 이제현의 영향이 컸으니 신숙주가 송설체에 능
예악·병법·율역 두루 밝고 임금 향한 충심도 뛰어나 표면적 해불론 지었지만 승려교유 단절 않고 이어 ? 조선 전기 서거정과 쌍벽을 이뤘던 이승소(李承召, 1422~1484)는 김수온(1410~1481), 강희맹(1424~1483), 김종직(1431~1492)과 함께 조선을 대표하는 문장가다. 자는 윤보(胤保)이고 삼탄(三灘)이라는 호를 썼다. 17세의 나이에 진사시에 합격한 후 식년 문과에 장원 급제한 후 집현전 부수찬(集賢殿 副修撰)에 임명되었다가 얼마 후에 응교(應敎)로 승진되었고, 여러 관직을 거쳐 이조와 형조의 판서, 좌·우참찬을 역임하였다. 그가 외직인 충청도 관찰사로 부임하여 병이 나자 임금(세조)이 약을 하사할 정도로 신임을 받았다. 특히 예악(禮樂)뿐
잇단 士禍에도 절제 갖춰 폭군에게 소신 밝힌 충신 승려들과 꾸준히 교유하며 자신 글에 僧俗不二 나타내 정치, 사회적으로 혼란했던 시기에는 삶의 기준도 바로 세우기 어려운 법이다. 한치 앞을 예측할 수 없는 상황에서는 생존만이 더욱 또렷한 목적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런 시절을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은 혹 시류에 동조하여 부귀영화를 누리거나 아니면 의리명분을 중시하여 스스로 당면한 현실의 어려움을 몸으로 겪어낸다. 하지만 인과론적인 역사의 패턴은 일시적인 부귀란 결국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일 뿐이고, 의리를 실천한 이는 오래도록 길이 남을 명예를 얻는다는 사실이 언제나 명징(明澄)했다. 우정 김극성(憂亭 金克成, 1474~1540)의 자는 성지(成之)다. 호는 청라(靑蘿), 우정(憂亭)이라 하
어린 시절부터 孝 관심 높고 책 발간해 교화사업에 힘써 탁월한 글재주로 시문 남기며 茶香 속 유불 경계 넘나들어 모재 김안국(慕齋 金安國, 1478~1543)은 김굉필(金宏弼)의 문인으로, 조광조와 함께 도학에 밝았던 인물이다. 자는 국경(國卿)이며 호(號)를 모재라 하였다. 저서로는 〈모재집〉 〈모재가훈(慕齋家訓)〉을 남겼고, 사림파의 선구자로 지극한 정치(至治)를 표방하였다. 1503년 별시문과에 합격한 후 승문원에 등용된 이래 박사, 부수찬, 부교리 등을 역임하였다. 1517년 경상도 관찰사로 부임하여 향교마다 〈소학〉을 권했다고 하니 이는 어린 시절 〈소학〉을 읽었던 감동과 관련이 깊은 듯하다. 〈국조인물고〉에는 그가 7세에 이미 글을 읽을 줄 알았는데 〈소학〉의 ‘효성
면앙정 중창 후 가단 형성 조선 시가문학에 큰 기여 불교관 이해도 뛰어나 절 머물며 승려들과 교유 조선 중기 호남의 가단(歌壇)을 이끈 송순(宋純, 1493~1582)은 담양 출신으로 거문고를 잘 타는 풍류객일 뿐 아니라 음률에도 밝았던 인물이다. 자는 성지(誠之), 수초(遂初)이며 면앙정(?仰亭), 기촌(企村)이라는 호를 썼다. 1552년 면앙정을 중창하여 호남 제일의 가단(歌壇)을 형성하였으니 당시 이곳에 모인 인사로는 기대승(奇大升)과 임제(林悌), 김인후(金麟厚), 임억령(林億齡), 박순(朴淳), 고경명(高敬命) 같은 사대부들이다. 특히 기대승은 〈면앙정기〉를 썼고 임제는 부(賦)를 지어 고상한 면앙정의 아취를 세상에 알렸다. 송순이 처음 벼슬길에 오른 것은 151
성균관 합격 후 이황과 인연 정미사화로 고향에 내려가 학문연구와 인재양성 주력 석존·공사상 담은 시 지어 호남시단을 이끌었던 하서 김인후(河西 金麟厚, 1510~1560)는 수많은 승려들의 시축 말미에 제발(題跋)을 썼던 인물이다. 그의 자는 후지(厚之)이며 하서(河西), 담재(湛齋)라는 호를 썼다. 어린 시절 김안국(金安國)에게 소학을 배웠고, 1531년 사마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입학한 후 이황(李滉)과 깊이 교유하였다고 한다. 1540년 별시 문과에 급제, 권지승문원부정자(權知承文院副正字)에 임용된 그는 이듬해 호당에 들어가 독서에 전념할 수 있는 사가독서(賜暇讀書)의 기회를 얻었다. 그가 세자를 보필하고 가르치는 홍문관박사 겸 세자시강원설서, 홍문관부수찬으로 임명된 것은 1543년이다.
어려서 두각 나타낸 文才 이황과 성학 진흥에 노력 음식·의복 등 사치하지 않고 승려들과 격의 없이 교유해 조선 중기 문인이자 관료였던 임당 정유길(林塘 鄭惟吉, 1515~1588)은 차를 즐겼던 선비로 70여 명이 넘는 승려들과 교유하며 이들의 시축에 제발을 썼던 인물이다. 조부가 영의정 광필(光弼)이고 아버지는 강화부사 복겸(福謙)이었으며 어머니 또한 이수영(李壽永)의 딸이었으니 내외가문(內外家門)의 규모를 짐작하게 한다. 특히 비상한 기억력을 지녔던 그는 책을 읽을 때에 여러 줄을 한 번에 읽었으나 읽은 내용은 끝내 잊어버리지 않았다고 하니 범인(凡人)과 다른 비범함을 타고났던 인물이었음이 분명하다. 김상헌(金尙憲, 1570~1652)이 쓴 ‘묘지명(墓誌銘)’에는 그의 천재적인 면모를 다음
문학적 천재성 일찍 드러나 병조좌랑 등 여러 관직 거쳐 고승과의 담소·차 즐기고 승려와 창수한 시만 수만 편 ? 조선중기의 문신(文臣) 금계 황준량(錦溪 黃俊良, 1517~1563)은 퇴계 이황(1501~1570)의 학풍을 따랐던 인물이다. 그의 자는 중거(仲擧), 호는 금계(錦溪)이다. 세상에 그의 문명(文名)이 알려진 것은 18세 때의 일이다. 당시 남성(南省)의 시험에 응시했던 그가 지은 책문(策文)은 누구도 대적할 수 없는 명문이었던지 이를 본 고관(考官)은 무릎을 치며 칭찬하였다고 한다. 그러므로 그가 매번 시험에 응시할 때마다 앞자리를 차지했던 것은 우연한 일만은 아니었던 듯하다. 어린 시절부터 문자를 이해했고 그가 말하면 다른 사람들을 놀라게 했던 그의 천
권팽로·이황 문하서 수학 국가 요직 두루 거쳐 승려와 인연 시로 남기고 茶에도 조예 깊은 문인 백담 구봉령(栢潭 具鳳齡, 1526~1586)은 시문에 능했으며 수많은 승려들과 교유하면서 이들과의 아름다운 인연을 시문으로 남겼다. 어린 시절부터 남달랐던 그의 품성은 일찍 부모를 잃었지만 의연하게 처신했던 것에서 드러난다. 조실부모한 그에게 소학의 문리를 얻게 한 것은 그의 외종조 권팽로(權彭老)다. 이후 퇴계 이황(退溪 李滉, 1501~1570)의 문하에서 수학했기에 그의 학문적 연원은 튼실했다. 이뿐만이 아니다. 그는 비교적 평탄한 환로(宦路)를 걸었다. 퇴계의 문하에서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한 이후(1546년), 1560년 별시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부정자(承文院副正字)를
최경창·이달 더불어 삼당시인 명나라 사신 ‘백광선생’ 칭해 처영 스님과 오랜 인연 등 승속 넘은 벗들과 유불 교유 조선 중기의 인물, 옥봉 백광훈(玉峰 白光勳, 1537~1582)은 일찍부터 벼슬에 올라 나라에 보국(報國)하려는 의지를 접었다. 그 이유는 자세하지 않지만 그가 한미한 집안 출신이었다는 점과 정치적으로 혼란했던 시절을 살았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닌가 짐작할 뿐이다. 그도 한때 선릉참봉(宣陵參奉)이나 소격서(昭格署) 참봉을 지냈으나 이는 호구지책(糊口之策)을 위한 것이라서 그리 오래 머물지는 않았다. 대부분 강호에 머물며 시작(詩作)에 몰두하여 송풍(宋風)을 버리고 당풍(唐風)을 따르고자 하였다. 후일 그와 최경창(崔慶昌, 1539~1583), 이달(李達, 1539~1612)을 삼당
뛰어난 능력으로 관직 섭렵 파직되는 변고도 수차례 겪어 승려들과 오랫동안 정 나누며 승속 넘어 진정한 벗 거듭나? 조선 중기의 문신 월정 윤근수(月汀 尹根壽, 1537~1616)는 영의정을 지낸 윤두수(尹斗壽)의 아우다. 어린 시절 김덕수(金德秀)ㆍ김덕무(金德懋) 형제에게 공부했다. 퇴계 이황(退溪 李滉, 1501~1570), 남명 조식(南冥 曹植, 1501~1572)뿐 아니라 율곡 이이(栗谷 李珥, 1536~1584), 우계 성혼(牛溪 成渾, 1535~1598) 등과도 교유했다고 전해진다. 1558년 별시 문과에 급제하여 승정원 주서와 연천 현감을 지냈으며 기묘사화에 사형을 당한 조광조의 신원을 상소했다가 과천현감으로 좌천되는 등 정치적으로 곤란을 겪었다. 이듬해인 1563
어렸을 때부터 책 섭렵 시에 대한 탁마 열의 커 성불암·불일암 유람하며 오랫동안 승려들과 교유 손곡 이달(蓀谷 李達, 1539~1612)은 조선 중기 인물이다. 서출로 태어나 신분의 제약을 벗어날 수 없었던 시대 상황에서 나라의 동량이 되기에 충분한 자질을 타고 났지만 자신의 역량을 펴지 못한 채 불운한 세월을 보냈다. 잠시 한이학관(漢吏學官)을 지냈던 인연도 어린 시절부터 세상의 모든 책을 섭렵해 글에 능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얼마 되지 않아 벼슬을 버리고 이리저리 떠돌아 다녔다. 한때 뜻이 맞는 고죽 최경창(孤竹 崔慶昌, 1539~1583)과 옥봉 백광훈(玉峰 白光勳, 1537~1582) 등과 시사(詩社)를 결성, 서로의 의지를 공유하며 흡족한 시절을 보냈으며
전공 세워도 賞에 무관심 향리 풍속 순화 힘쓰면서 한때는 불교 배척했지만 만년에 승려들과 교유해 64세가 되어서야 겨우 사마양시에 합격했던 성여신(成汝信, 1546~1632)은 불세출의 문장으로 세상에 회자되었다. 이러한 그의 역량은 어린 나이에 신숙주의 증손인 신점(申霑)의 문하와 남명 조식(南冥 曺植, 1501~1572)의 문하에서 글을 배우며 배태된 것인지도 모른다. 임진왜란과 당쟁으로 얼룩진 시절을 살았던 그의 행로도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한때 신선세계에 빠져 산천을 주유했다. 하지만 나라가 위난에 놓이자 분연히 일어나 곽재우(郭再祐, 1552~1617)와 함께 왜군을 무찌르는 전공을 세우면서도 논공행상에는 관심을 두지 않고 은일하는 선비로 돌아갔다. 이뿐만이 아니다. 전쟁이 끝난 후의
대곡선생 성운 문하서 수학 재주 뛰어나도 名利 거리 둬 生死가 모두 공함을 드러내고 불교적인 삶 지향했던 유학자 조선 중기의 인물, 임제(林悌, 1549~1587)는 호남이 자랑하는 풍류남(風流男)이다. 평소 검을 좋아하고 피리를 좋아했던 그는 자유분방하여 얽매임을 싫어했던 그의 품성대로 20세가 되어서야 대곡선생(大谷先生) 성운(成運)의 문하에서 수학했다고 한다. 그의 기질은 〈국조인물고〉에 ‘동서붕당(東西朋黨)의 의논이 일어나 선비들이 앞을 다투어 명예를 가지고 서로 추켜세우면서 끌어당기었으나 공은 자신 멋대로 행동하고 무리에 가담하지 않았으며 또 몸을 낮추어 사람을 섬기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에 벼슬이 현달하지 못하였다’고 하였다. 천출로 ‘타고난 재주가 뛰어나 날마다 수천 마디의 말을
사신 요구도 단번에 해결한 速作·多作 능력 갖춘 문장가 시험 代作해 한직 머물러도 도인 풍모로 승려들과 교유? 차천로(車天輅, 1556~1615)는 조선 중기 문장가로 한호(韓濩), 최립(崔?)과 함께 송도삼절(松都三絶)이라 칭송되는 인물이다. 그의 자는 복원(復元), 호는 오산(五山), 난우(蘭?), 귤실(橘室), 청묘거사(淸妙居士)를 썼다. 그는 출중한 글재주로 선조의 총애를 받았지만 평생 하급관직을 전전하며 고단한 삶을 살았다. 연유는 과거 시험 대작(代作) 사건과 개성출신이라는 지역적 한계 때문이다. 조선이 건국 된 후 개성 출신의 과거 정지이유는 다분히 정치적이었다. 이중환(李重煥, 1690~1756)의 〈택리지〉에 “태조께서 공양왕의 선양을 받아 수도를 한양으로 옮겼는데 고려의 신하였던
광해군 폭정 피해 산속 은둔 폐위 사실 듣고도 복귀 안 해 벼슬 구하는 길 멀리한 채 승려들 시축에 많은 글 남겨 정치, 사회적으로 혼란기를 살았던 유몽인(柳夢寅, 1559~1623)은 문장가로 글씨에 남다른 재주를 드러냈다. 그의 자는 응문(應文), 호는 어우당(於于堂), 간재(艮齋), 묵호자(默好子)이다. 설화 문학의 대가로 야담을 집대성한 〈어우야담〉과 시문집 〈어우집(於于集)〉을 남겼다. 한때 성혼과 신호의 문하에서 수학했지만 경박하다는 책망을 듣고 쫓겨나 성혼과의 관계가 소원하였다. 1589년 중광문과에 장원급제하여 병조참의를 거쳐 황해감사, 도승지 등을 역임했다. 임진왜란 때에는 선조를 호종하는 임무를 수행했으며, 1609년에는 성절사 겸 사은사로 임명되어 대명외
14세에 승보시 장원 급제 후 조정 대표해 中외교 담당해 말년에 승려와 교유 늘면서 돈독한 우정 글로 남기기도 천하에 문장가로 이름을 떨쳤던 이정귀(李廷龜, 1564~1635)는 어린 나이에 당대의 문장가 한유((韓愈)의 ‘남산시(南山詩)’를 차운(次韻)하여 시를 지을 만큼 글재주가 뛰어났던 것으로 전해진다. 나이 14세에 승보시(陞補試)에 장원으로 급제한 후, 증광문과에서 병과로 급제하였던 그는 중국어에 능해 어전통관(御前通官)으로 조정을 대표하여 명나라 사신을 접대하는 등 외교 활동에 높은 수완을 발휘하였다. 그가 공을 세운 탁월한 활약상은 바로 명나라 병부주사 정응태(丁應泰)를 파직시킨 일이다. 바로 정응태가 조선을 무고하는 사건이 일어난 것인데 이는 조선의 입장을 불리하게 하였다. 다시
동몽교관 임명에 禮 안 갖추고 자유로운 기질로 벼슬 그만둬 충심 담은 직언에 귀양 당해도 가난한 백성에 연민 잃지 않아 역사에 기록된 인물들에게는 시(詩)로 인해 변고를 겪은 일이 흔했지만 다른 한편으론 절창(絶唱)의 시를 남겼기 때문에 이름을 남긴 경우도 흔하다. 조선 중기에 문필가로 손꼽히는 석주 권필(石洲 權?, 1569~1612)도 바로 그런 인물 중 하나다. 그는 자유로운 기질의 소유자로 구속을 싫어했다. 그는 한때 가난을 염려한 동료들의 추천으로 동몽교관(童蒙敎官)에 임명되었음에도 상부에 예를 갖추지 않은 채 곧바로 학생들을 가르쳤다. 이런 그의 기질이나 “관대를 하고 예조에 나아가 예를 갖추라”는 말에 “그런 일을 잘 못한다”고 하고 벼슬을 그만두었던 그의 처세는